[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2) 풀밭에 풀처럼 살다가

 

 

풀밭에 풀처럼 살다가

뜨거웠네, 김을 매는 맨발바닥이 뜨거웠네
까만 화산회토에 종일토록 내리쬐던
칠팔월 목 타는 땅에, 풀도 나도 타던 때,
바람이 동에서 불면 이 땅엔 비가 왔지
비오면 풀뿌리가 땅을 바짝 움켜쥐고
머리채 다 뽑히도록 기를 쓰고 버텼지
바랭이는 바랭이대로 엉겅퀴는 엉겅퀴대로
모시풀은 모시풀대로 질경이는 질경이대로
하늘이 허락한 높이로 제자리를 지키며
신음은 있었지만 풀은 결코 울지 않았네
눕는 시늉하지만 풀은 결코 눕지 않았네
슬퍼도 아침이 오면 금세 눈물 거두며
이제 풀 가까이 눈높이를 낮추리라
초록 물 뚝뚝 지는 그런 시를 가꾸리라
풀밭에 풀처럼 살다가 詩만 두고 가리라.(2013)

/ 2013년 고정국 詩

사진=고정국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내 고향 위미마을 농토는 대부분 흑색 화산회토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주에 아직 감귤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여름철 밭농사는
바랭이와 힘겨루기에 판가름 날 정도였습니다.
웬만해선 뽑히지 않으려는 그 질긴 근성에다
몸통이 잘려서도 중간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성장해 가는
바랭이의 생명력 앞에, 농부들 손 마디마디에 쇠못이 박혔답니다.

삼 형제 중 중간인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농사일을 했습니다.
여름철에는 소먹이 목동은 물론, 어머니와 누나들과 함께
‘촌부자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땡볕 아래 맨발로 앉아
오리걸음 해야 하는 그토록 지겨운 김매는 일까지 하면서
일 년간 한 달 이상 결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 결석이 잦다 보니, 공부 성적은 늘 중하위로 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방학 숙제로 제출한 식물채집과
바랭이에 대한 관찰일기의 글짓기를 보신 담임 선생님이
앞으로 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이 ‘일기’는 누가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무턱대고 “선생님, 잘못했습니다”하고
양손 손바닥을 머리 위로 내밀었습니다.
혹시 내가 쓴 글이 잘못돼서 잣대로 손바닥을 때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머리 위로 내민
나의 두 손을 꼬옥 잡으시고는 고개를 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시면서
“정국아, 앞으로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지?
글을 참 잘 썼더구나”
라고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마디는 집에서건 집 밖에서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첫 번째 들었던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님의 칭찬을 육십 년 넘게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이 <시작노트>에서 발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찰일기 주인공이 바로 오늘 ‘바랭이’였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한명옥 스승님 영전에 오늘 이 <시와 시작노트>를 올립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