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3) 절뚝절뚝 유월이 가네

 

절뚝절뚝 유월이 가네

1.
간절한 촛불 앞에선 바람도 키질을 삼가더라
삼보 일 배 이보 일 배, 일보 일 배도 모자라서
하얗게 색소가 빠진
들꽃들만 남은 지금
어린 손 천 번을 모으면 하늘도 생각이 바뀌실까
열네 살 삘기 꽃들이 촛불 하나씩 켜들고
미선이 효순이 부르며
마을 쪽으로 가고 있다

2.
잠 설친 수국꽃잎에 눈물방울이 푸른 아침
목발 짚은 사내가 꽃 위에 꽃을 얹히네
미안타, 미안타 하며
절뚝절뚝
유월이 가네

/ 2003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유월 문턱을 넘어서면 변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늘의 빛깔이고 다음이 들꽃 빛깔입니다.
알록달록 현란한 봄꽃들이 떠나간 자리마다
하얗게 색소가 빠져나간 들꽃들이 들어섭니다.
여기저기 들찔레가 타래를 이루고 삘기 꽃들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 켜듭니다.
시를 쓰면서 나이를 먹다 보니 가끔씩 들녘에 핀 삘기 꽃조차
촛불로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2002년 6월 13일
우리 여중생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무참히 희생되었을 때,
어린 학생들이 촛불 하나씩 켜 들고 서울 시청 앞에 모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때 내가 살았던 금악오름 삘기 꽃들도
촛불 하나씩 켜 들고 유월의 들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촛불이 하나일 때는 기도의 상징이고, 둘일 때는 제단의 상징이며,
십이요 백일 때는 집회의 상징이었다가,
천이요 만일 때는 이미 시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발자국이 쌓여서 길을 이루고 시간이 쌓여서 역사를 이룹니다.
그리고 흰 꽃들이 모여서 유월의 들녘을 적시고 있습니다.
양심과 법과 질서가 도저히 통하지 않았을 때
약자들은 연대를 이루어 이에 맞섭니다.
비폭력의 상징이요, 약자들의 상징이면서 진실의 상징인 것이
촛불시위인 것을 현대의 삶 속에서 배웠습니다.

“흰꽃 핀 둔덕마다 무덤도 많은 나라
상잔의 포연 속에 꽃 한 송이 지던 날부터
촌로는 한 채 봉분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
- 졸시 ‘염소’ 중에서

4월과 6월 사이엔 피는 꽃만큼이나 지는 꽃이 많은 것이
이 한반도의 슬픔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유월이면 현충일이 있습니다.
역사가 우리 앞에 미안한 것인지, 우리가 역사 앞에 미안한 것인지,
최근 들어 이곳저곳 급작스레 많아진 빈소까지 찾아와
꽃 위에 꽃을 얹히고, 절뚝절뚝 분단 조국의 유월이 가고 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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