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4) 피리새

 

피리새

비 오면 하루벌이로 
한 끼니를 때운다는

장님 안마사가 
젖은 지폐를 헤아릴 때

누군가 지붕에 올라 
깨진 피리를 불고 있었다.

/2002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아주 오래 전 KBS 주말 프로에 한국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 <동양극장>이 방송됐습니다. 
거기에 당시 경성 뒷골목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한 세트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인숙 골목에 남루한 차림의 한 사내가 피리보다 작은 파이프를 물고
“삐- 삐-” 소리내며 
지나가는 장면, 그 피리로 호객하며 먹고 살았던 장님 안마사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가끔씩 들렸던 그 소리… 
지금도 70대 이상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차-압 싸-알-떠어-억”하는 찹쌀떡 목판 장수의 
여운과 함께 장님 안마사의 피리소리로 깊어져갔던 구슬픈 한국의 밤을 추억할 것입니다. 
어쩌면 새들의 세상에도 IMF가 닥쳤는지, 그때 그 장님 안마사들이 
하나같이 하늘로 돌아간 지금 이 땅에는 피리새가 대신 내려와 운답니다. 

암수술 받고서야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는 어느 환우患友의 고백처럼 
눈과 귀를 다시 열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린답니다. 
“삐이-, 삐이-”그 피리새 소리는 애인 없는 처녀총각에게만 들리고, 
상실의 외로움에 흐느끼는 사람에게만 들리고,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들 귀에만 들린답니다. 
하늘은 이처럼 온갖 것들을 지상에 내려보내시어 
혼자 깨어 뒤척이는 영혼들과 벗하며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2002년 우리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을 치를 당시 주변 미물들까지 
월드컵을 치르는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6월 22일 오후 스페인과 4강 진출을 놓고 뼈 부서지게 싸우고 있을 때
평소 극성이던 
파리나 모기들도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지 꼼짝 않고 벽에 붙은 채 숨죽이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홍명보 선수가 마지막 슈팅을 성공시키는 순간 
“꼬오링! 꼬오링!” 이집 저집 창밖으로 울음 섞인 함성이 터져 나오자
벽에 붙어 숨을 죽이던 모기와 파리들이 좋아 윙윙 집안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러자 골목 똥개들도 덩달아 기뻐 날뛰면서 컹컹 난리를 피우더랍니다. 

그 무렵 새벽 3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거리응원 나간 딸아이가 
귀가하지 않아서일까 “삐-, 삐-” 아빠 피리새의 걱정스러운 울음소리가 습기 찬 유월의 밤하늘을 가르고 있더랍니다. 

붉으락푸르락 욕설투성이라도
견딜만 하구나 이 세상은
좋아라 4강진출이 음주 벌점을 사하였듯이
저게 그 등급이 다 같은 밥사발이면

좋겠다. 

- 수국2

2002년 DJ 정부는 우리나라 축구 월드컵 4강 진출을 축하하여 
도로교통법 음주 벌점 전체를 
면제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시기에 썼던 「수국 2」를 함께 올렸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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