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19) 지식인의 사명, 성찰해야 할 절박한 상황

/ 사진=픽사베이
고난은 사람에 따라 삶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독초가 되기도 한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 사진=픽사베이

내 나이는 후하게 계산해도 여름날 오후 5시 정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학에서는 변변치 못한 수준이지만 인간과 조직에 관한 연구도 하고, 크고 작은 보직을 맡으며 인간집단의 적나라한 역동성의 이면도 경험하며 얻은 결론은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 인간의 지혜론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지혜롭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가? 무엇이 그 차이를 결정하는가. 이를 결정하는 변수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나는 참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70대 초입에 들어선 지금도 무명의 바다를 헤매고 있는 심정이다. 단지 조금이라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생에 불과할 뿐이다.

공자는 72세에 세상과 하직했다. 그 당시 평균 수명이 35세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장수한 편이다. 그는 논어에서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마음을 따른다는 뜻이다. 70세가 되면 마음이 가는 데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 不踰矩)고 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했지만 허탕이었다. 자기를 알아주는 주군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궁핍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면 그가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오래 살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 그 동력은 마음을 잘 다스려 평정심을 잘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종심은 평상심과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나는 해석한다. 종심론은 질풍노도의 인생사를 경험하면서 얻은 공자의 위대한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민족시인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예이츠는 ‘지혜는 나이와 더불어 오는가(The Coming of Wisdom with time)’라는 제목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잎은 무성하나 뿌리는 오직 하나/ 내 청춘의 허위 많던 젊은 시절 나뭇잎과 꽃을 햇빛에 흔들며 자랑했거늘/ 나 이제 시들어 진리가 될 것인가?
(Through Leaves are many, The root is one / Through all the lying days of my youth, I swayed my leaves and flowers in the sun/ Now I may wither into the truth.)

예이츠는 74세까지 살았다. 이 시는 예이츠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쓴 작품으로 알려졌다.  공자 못지않게 그 시대 기준으로는 매우 장수한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이 시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시의 내용에 공명이 간다. 허세와 나태와 시행착오가 많았던 젊은 날을 살았던 나에게 이 시는 울림이 더욱 강했다. 역시 시나 시조는 나이가 들어야 이해도나 공감도가 높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가 묻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지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빌 게이츠는,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지혜와 나이는 비례하는가? 없지않아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혜는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내는 정신의 능력(어학사전)이다. 

지혜를 얻는 데는 세 종류가 있다고 중용은 가르친다. ‘生而知之(생이지지)’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알고, ‘學而知之(학이지지)’ 배움을 통해서 아는 경지에 이르며, ‘困而知之(곤이지지)’ 고생고생 힘들여서 아는 경지에 이르니 이른바 三知之(삼지지)이다. 또 중용에는, 성인은 나면서부터 알고, 대현(大賢)은 배워서 알고, 보통 사람은 애를 써서 안다고 했다. 生而知之에 해당하는 사람은 예수나 석가 같은 사람일 터이니 그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 논외로 하자. 

많이 배웠다고, 살면서 온갖 고생을 많이 겪었다고 지혜가 터득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오만방자하고 희로애락에 탐닉하고 자기주장만이 최고라는 확증적 편향에 사로잡혀있는 인간군상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나이가 벼슬인 것처럼 생각하는 노인들도 종종 본다. 제삼자에 의해 세칭 ‘꼰대’라고 칭해지는 이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협소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 좁은 안목을 넓이고 제 생각을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기주장만 진리인 것처럼 고집한다. 그러니 지혜는 커녕, 균형 감각이 생길 리가 없다. 

지혜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온다. 지혜를 얻는데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단지 교과서적인 지식은 지혜를 얻는데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또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도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감수성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종심은 나이 많이 든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대학교 총장으로 일할 때, 제주대학교에 260억원 가량의 발전기금을 쾌척한 재일교포 김창인 회장을 일본 오사카에서 가끔 뵐 기회가 있었다. 그 액수가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당시 그의 재산이 2조원에 이른다는 말도 들었다. 제주 경제계 원로이신 송봉규 회장님과 얼마 전에 작고하신 신용준 전 한라대학 학장님이 김 회장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에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김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망 전후로 모든 것이 우울했던 시대였다. 김 회장은 구두코에 꽃을 수 놓은 여성용 수제화를 디자인해서 팔았다. 꽃이 수놓아진 신발은 선풍적 인기를 얻어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 재산형성의 기초가 되었다고 했다. 

김 회장께서 주장하는 실천철학의 핵심 개념은 본인이 만든 조어인 ‘유한오도(流汗悟道)’이다. 땀을 흘려봐야 인생의 가는 길을 깨우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설파한 땀에는 피나는 노력과 삶의 고통으로 흘리는 눈물이 다 내포된 개념이다. 그는 화두를 던졌다. 목숨을 걸 정도로 노력해보지 않은 자, 인생의 길을 알 수 있느냐고. 인생의 고통의 강을 건너면서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 인생을 알 수 있느냐고. 김 회장 경험치가 일천한 사람은 인생에서 진정한 길을 알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인생 행로를 바로 본 일리 있는 지적이다. 

괴테도 같은 명언을 남겼다. ‘어두운 공원 한 귀퉁이에 앉아서 눈물비로 범벅된 빵 한 조각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한평생을 살면서 봉착하게 되는 시련에 이어진 고통과 눈물이야말로 세상과 인생을 보는 지혜의 자양분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 고생은 돈 주고라도 하라’는 옛 어른들이 남긴 말은 진리이다. 고난은 사람에 따라 삶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독초가 되기도 한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살면서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을 많이 만났다. 그 사람 중에서 지혜가 전혀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 염치를 배우지 못한 허상도 많았다. 너는 얼마나 잘났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발끈할 필요는 없다. 나도 지혜가 그리 출중하지 못하고 염치도 다소 모자라 그 심중을 털어놓는 것이다. 다만 나는 진심으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 중에는 삶과 지식 간에 간극이 너무 큰 이중인격자들이 많이 있다. 진보를 외치면서 자신의 생활방식이나 재산 축적 방식은 진보적 삶과는 거리가 먼 소위 ‘입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그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승자독식에 관한 숭배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야수적 자본주의’의 윤리가 그분들의 삶의 한 준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유용한 지식이 곧 지혜는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그 사례는 지천에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도 ‘생계형 친일(親日)’은 논외로 제껴 두더라도 입신 영달을 위해서 친일한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또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도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국가에 해악을 끼친 지식인들은 부지기수다.이에 반하여 학력이 일천하고, 배운 게 변변치 않아도 지혜롭게 인생을 산 사람들도 많다. 

과거 나의 어머니 세대는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혜가 모자라지 않았다. 요새 기준으로 보면 배웠다고 할 것까지 없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에 갇힌 아들에게 썼다는 편지는 지금도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의 거룩한 표상이다. 안중근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에 불복해 항소할 것을 염두에 두고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의로운 일을 한 값으로 그 선고받았으니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라는 편지와 함께 수의 한 벌은 지어 보냈다. 보통의 어머니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최고의 학력을 보유한 오늘날의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같은 입장에 직면했을 때 조마리아 여사처럼 할 수 있는 어머니들이 있기는 있을 것인가. 나의 내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늠하기조차 버거운 일이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미스 우크라이나가, 세 명의 자식을 키우는 중년의 어머니가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이 나라를 존경하게 됐다. 역사의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부패한 푸틴 정권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민족은 정신이다. 정신이 있는 한 그 민족은 영원히 생존한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 중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본다. 단지 처세가 그 사람에게 그런 위치에 올려놓았을 뿐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짐승이다. 짐승의 속성은 본능에 충실해서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더 본능적이냐 덜 본능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단지 타 동물과 비교해 다른 측면이 있다면,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법과 제도, 교육, 종교, 문화에 순치되어 오늘의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입각한 생물학적 심리학,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 자본주의 심리학도 인간을 동물로 가정한다. 반면 에리히 프롬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고상한 사회적 존재로 본다. 

심리학의 계보가 어떻든 인간이 명예, 재산, 성, 권력 등 원초적인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매우 드물게 그러한 욕구를 초월한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인간은 성인이거나 그 반열에 오른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람은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하고, 공자는 군자라고 했으며, ‘신은 죽었다’라고 부르짖은 니체는 초인(超人)이라고 했다. 니체가 규정한 바에 의하면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라고 했다. 누가 어떻게 분류하였건 간에 인격은 갈고닦아야 한다는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과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의 7가지 감정의 4단 7정 논란은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노회한 이황과 혈기 왕성한 기대승 사이에서 최대의 논란을 일으켰다. 예컨대 측은지심이라고 하는 것도 문명의 산물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본래 내재한 천성인지 가늠이 쉽지 않다. 나는 문명의 산물로 보는 쪽이다. 인간 대부분은 이념형으로 제시한 본능에 철저히 충실해 사는 사람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 양극단의 어느 지점에서 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부모가 죽은 것은 쉽게 잊히지만, 재산을 잃은 것은 오래오래 억울함으로 남는다’ 고 말했다. 피렌체의 명문가 집안 출신인 마키아벨리도 그리 고상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 있어 재산에 대한 욕심이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지만, 목적만 정당하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犬儒主義)를 제창한 그답게 너무 본능에 충실한 직설적 화법이다. 

우리나라 지성사에서 존경받는 다산 정약용도 강진 유배 시절 젊은 과부와 살면서 그사이에 딸 하나를 뒀다 한다. 귀양살이가 해제된 후 고향인 남양주로 귀향한 다산을 그 여인은 딸을 데리고 찾아갔다고 한다. 마침 다산은 출타 중이었고  모녀의 등장에 부담을 느낀 다산의 본부인은 그 모녀를  양반집에 노비로 팔아넘기고 말았다.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된 모녀는 탈출하여 먼 길을 걸어 강진으로 귀가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일이 비밀에 부쳐질 리 만무하였지만,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강진으로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제주 유배인들에게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행적만 놓고 봤을 때는 다산도 왕조 신분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협량한 지식인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는 아직도 선거철이 되면 혈연, 지연, 학연 등의 부족(部族) 본능에 충실하여 캠페인을 하거나 투표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 지식인조차도 선거에 부족 본능을 초월하기가 쉽지 않으니 일반 유권자야 더 논할 대상이 아닐 터이다. 인간사회가 정말 진화하기는 한 것인가 하고 의구심 가질 때가 많다. 사회는 세계화와 최고의 과학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거기에 걸맞은 정치는 아직 태동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객관성을 유지하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가짜뉴스나 무용한 정보가 인터넷이라고 하는 대양에서 해류처럼 출렁이며 온 지구를 거침없이 휩쓰는 오늘날, 객관성과 보편성 추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최근 마틴 울프라는 경제분석가가 쓴 ‘민주적 자본주의 위기’라는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는 지금 선동적 독재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라고 썼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부모는 민주주의가 압승했다는 안도감에 1990년대에 눈을 감았지만, 손자들이 언젠가 맞이할 22세기는 어떨까. 나는 자연재해와 핵전쟁만큼, 전체주의가 창궐하는 미래가 두렵다’라고 걱정을 쏟아냈다. 이 책에서 민주화가 진행 중인 나라는 2002년 43국에서 지난해 14개국으로 줄었다. 반면 전체주의화 되는 국가는 13개국에서 42개 국가로 급증했다. 그만큼 자유 진영이 맥을 못추고 쇠퇴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유민주는 태생적으로 선동과 증오 정치에 취약하다. ‘개인과 사상의 자유’ 같은 추상적 가치보다는 편을 가르고 선동하는 전체주의적인 ‘증오의 동력’이 더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본산인 미국도 탈진실이 판치고 그 결과 트럼프 같은 기형아가 나온 것이다.

지식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절박한 심정으로 성찰해야 할 작금의 상황이다. 지식인에게 희망을 포기한 사회에서는 구령이, 권력이, 재력이 인간을 재단하는 박제화된 사회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다. 이런 사회가 파시즘이다. 그런 사회에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구성요소인 사랑, 자유, 창조가 가능할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멀리 갈 그것 없이 북한을 보면 알 것이다. 아름다운 연애 시를 썼던 백석도 북한에서 시심을 펴보지도 못하고 산지기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br>

#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