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5) 그날 꽃님이

 

그날 꽃님이

꽃에다 ‘님’자를 당겨
‘꽃님’하고 부르는 순간

와락 가슴에 안겨
‘시인님!’하고 부르는 꽃

즉흥시 삼천 송이가
하늘 가득 피었지

/2013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나의 행보에는 가끔 ‘무작정’이라는 초록 깃발을 내걸 때가 있습니다. 
2012년 현대불교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네 계단을 밟고 단상에 올라가 상패를 받았습니다. 
상패를 받고 하나, 둘, 셋, 넷 다시 네 계단을 내려오는 4초 동안에 얼핏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조 일만 계단 내려 걷기> 과정을 거치겠다는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곧바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오늘 여기 「그날 꽃님이」는 그 이듬해 봄 삼천 계단을 내려밟은 곳에서 만난 단시조입니다. 

그리고 2022년 시조 전문지 《정형시학》이 다룬 <고정국 특집> 코너에
평론가 박진임 교수의 해설 「고정국 시학, 그 2인칭 타자 윤리학」에서
“왜 우리는 그리도 남을 ‘님’이라 부르기에 인색할까? ‘님’자는 주변에 널려 있어
‘당겨’오면 그만이라고 시인은 이른다. 뉘를 위하여 그토록 한 음절 말을 아껴둔단 말인가? 
눈과 귀가 어두워 자신만을 바라보아 타자의 존재에 무심한 탓이리라.
꽃의 존재란 모든 타자들의 대명사에 불과할 것이다. 
‘님’이라 부르자마자 그만 무너지듯 온몸을 던져 안겨드는 꽃들이란 얼마나 외로웠단 말인가. 
그 모든 타자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이 그리고 그 타자들의 존재이유를 살펴 밝혀주면서 
그것으로 수수편편首首篇編 즉흥시를 빚는 이가 바로 시인이 아니던가? 
이처럼 고정국 시인은 단시조 한 편을 통하여 평이한 일상어 
‘님’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한다.”라고 일면식도 없는 
제주 촌놈의 작품 행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정국 시인의 텍스트는 
김준오 박사의 『시론』에서 강조하는 바를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언어를 아껴 쓰면서 적재적소에 부려놓고 있어 ‘탁월하게 어눌한 담론’을 실현한다. 
이미지, 리듬, 시적 어조 등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각 어휘가 지닌 음가를 고려하여 
적절히 배치하고 음절수를 조절하면서 음악성을 느끼게 한다.”라고 썼습니다.

기왕 내친 김에, 그곳 <고정국 특집코너>에 함께 발표했던 단시조 
「유월다큐–쥐며느리」 한 편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듯 올렸습니다. 

이웃집 쥐며느리 어디론가 바삐 간다
치매 든 친정노모 젖은 이불이 걱정인지
불러도 들은 척 만 척
가던 길만
가던 걸.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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