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6) 호시노 도모유키, '식물기', 김석희 옮김, 그물코, 2023

호시노 도모유키, '식물기', 김석희 옮김, 그물코, 2023. / 사진=알라딘<br>
호시노 도모유키, '식물기', 김석희 옮김, 그물코, 2023. / 사진=알라딘

봐, 공상하면 할수록 길이 많아지고 무수한 길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아? 뭐든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뭐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언제나 있다.
상상하는 내가 존재하는 한, 항상 똑같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나는 변화하고 있다. 물의 흐름처럼.
— 「디어 프루던스」 중에서

1.
인공지능이 확장하고 있는 영역은 일상의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손전화기로서 통신기의 역할을 훌쩍 넘어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컴퓨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좀 심하게 얘기하면, 21세기 인류의 삶은 인공지능의 매트릭스로부터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급속도로 회자되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에 기반한 챗GPT는 단적인 한 사례에 불과하듯, 예의  최첨단 과학기술은 ‘융합’으로서 전문 지식과 서로 다른 분야의 연결‑접속‑통합의 사회문화적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인간은 지금까지와 현저히 다른 현실을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이와 함께 이런 삶을 사는 인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인간, 즉 신인류(新人類)로서 급변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의 수레바퀴를 굴릴 터이다. 

2.
그런데 이러한 신인류와 아주 다른 그 어떤 신인류가 생겨나면 어떨까. 인공지능이 일상에 너무나 깊숙이 침투한 나머지 인공지능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내면화된 것과 전혀 다른, 식물의 생태와 관련한 것 모두가 인간의 삶에 관여하면서 심지어 인간이 식물화하는 그래서 ‘식물되기’에 대한 자기인식을 담대히 드러내는 신인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작가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집 '식물기'는 ‘식물되기’와 연관한 신인류의 삶과 그 존재성에 대한 서사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식물기'에 수록된 12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래디컬한 문제의식은 책머리에 해당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만두었을 때, 인간은 정말로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9쪽)라는 충격적 물음으로 제기된다. 그러니까, 호시노가 '식물기'에서 집중 탐구하는 인간은 종래 우리에게 낯익은 소설의 주체, 말하자면 근대적 주체로서 세계와 대립․갈등․분투하는 도정에서 자기인식을 정립해나가는 ‘인간됨’을 갖춘 전인적 존재에 비중을 두는 게 아니다. 대신, 이러한 근대적 주체를 추구하는 길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인간됨’을 심각히 배반하고 부정하는 반(反)인간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띤 ‘비(非)인간‒되기’, 즉 ‘식물되기’로서 신인류를 향한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 “정말로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을 그는 탐구한다. 

3.
'식물기'에서 「피서하는 나무」는 작가의 예리하면서도 웅숭깊은 문제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오키나와의 여러 섬들 중 미야코지마에서 연휴를 보내던 유리오네 가족은 유기견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기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가족은 죽은 개를 집 정원에 묻고 그곳에 작은 나무를 함께 심는다. 히말라야 지방이 원산지인 이 나무는 나뭇잎이 흡사 물고기 모양이다. 가족들은 정성스레 이 작은 나무를 키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작가가 시적 상상력의 힘을 빌려 이야기한다. 개의 주검이 묻힌 정원을 감싸고 부는 공기 중 바람은 히말라야의 푸르고 푸른 천공(天空)을 자유자재 흐르는 흡사 바다의 신비와 포개지더니 그래서 죽은 개 무덤에 심은 나무의 잎은 각종 물고기 모양의 환영으로 읽히는 게 바로 그 이유다.

그러면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개와 형제처럼 지내온 유리오가 작은 나무에게 말을 거는 부분이다. 아침 인사와 학교 일을 얘기하고, 자기 전 나뭇잎과 줄기를 쓰다듬으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인사도 한다. 유리오는 “처음에는 혼자 중얼거리는 게 쑥스러웠지만, 습관이 되자 자연스러워졌다. 구술 일기를 쓰는 기분이었다.”(22쪽)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구술 일기’를 쓴다는 것인데, 표면상 유리오는 작은 나무에게 일방통행식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리오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개와 영원한 이별을 한 게 아니라 죽은 개의 시신의 영양소를 머금고 생장한 작은 나무야말로 서로를 “함께 끌어안고 이제 몸의 일부가 섞인 채 살아간다.”(23쪽)는 생명의 우주적 순환의 진실을 절로 깨닫는다. 

그런데 이 진실이 한층 경이로운 것은 인간이 이러한 관계에 두루 포함되어야 한다는,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공식(共食)’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유리오는 이렇게 생장한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신의 배설물을 나무에게 준다. 유리오의 이 자연스런 행위는 과학기술 문명의 사위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오랫동안 망각된 채 매우 낯설고 촌스러운 시대 퇴행적인 것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유리오의 생태순환적 삶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서로 ‘공식’을 하는 거라는”(27쪽) 우주적 생명의 순환의 경이로운 진실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우주의 뭇 존재는 ‘함께 먹고[共食], 함께 살며[共生], 함께 존재하는[共存]’, 생태순환적 삶의 진실을 작가는 궁리한다.

여기서, 덧보태고 싶은 게 있다. 비평의 매력은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내는 일이듯, 「피서하는 나무」의 서사가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유기된 강아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가볍게 넘겨볼 수 없는 사안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에 대한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을 상세히 논의할 수 없지만, 오키나와의 유기견과 관련한 서사로부터 작가 호시노의 생태순환적 서사가 정치사회적 문제의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만 강조해두고 싶다.

4. 
이와 관련하여, 쉽게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 생태순환적 진실에는 식물이 본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고사리 태엽」, 「인형초」, 「시조 독말풀」에서는 인간이 아예 식물화되는 SF적 서사를 만날 수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현재에 이르는 인간의 문명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을 펼친다. 

「고사리 태엽」에서 작중인물 호시노는 식물전환수술을 받고 가슴에 고사리 태엽을 정기적으로 감아줘야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식물로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만일 보행식물로서 식물전환수술이 실패할 경우 식물원에 뿌리내린 채 재배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공교롭게도 작중인물 이름은 실제 작가의 이름과 같아 작중인물은 작가의 퍼스나로 읽어도 무방한데, 이처럼 식물로 전환한 존재는 분명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일 때 통용되던 행복의 가치는 이제 쓸모없이 덧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인간 존재가 추구하던 행복과 전혀 다른 속성의 그 무엇이 식물 존재를 충족시킬까. 식물 존재가 그렇듯 햇빛과 물 그리고 공기의 적절한 화학적 배합 과정이 동반하는 자급자족뿐만 아니라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완전한 죽음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불사의 순환적 삶을 사는 것이 함의한 그 무엇이 새로운 행복일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최첨단 인공지능의 과학기술 문명의 위력 속에서 삶을 에워싸는 구조악(構造惡)과 행태악(行態惡)은 인간 존재의 무기력과 왜소함을 배가시킨다. 그 와중 유무형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소유한 자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들어맞는 행복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제도화하고 있다. 「고사리 태엽」의 말미에 식물전환수술 받은 작중화자가 남긴 최후의 언어, ‘이게 행복이라는 건가?’(115쪽)에 응축된 물음은 그러므로 다의적 이명(耳鳴)으로 번진다. 현대사회에서 팽배해진 인간 존재의 예의 행복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지금까지 추구한 이러한 행복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전복적 상상력의 실재로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작가의 문명적 물음과 고뇌가 이 물음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5.
작가의 이 고뇌어린 물음을 숙고할 때 「인형초」와 「시조 독말풀」에서 보이는 만화적이고 엽기적 상상력의 서사적 전언은 의미심장하다.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현실은 식물이 지구 생태환경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는바, “식물들이 인류 문명을 파괴하려”(123쪽)는 것을 저지하는 특수 공작원 ‘네오 가드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인류 문명 파괴자‒식물과 인류 문명 수호자 지구 영웅‒‘네오 가드너’ 사이의 선악 대결을 벌이는 대중서사와 비슷하지만, 그 심층에는 인간 존재의 자유의지와 행복 그리고 “아직 인간으로 살고 싶”(133쪽)은 것과 연관한 심오한 물음이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인간은 이미 식물을 모시는 쪽이 되었다. 혁명은 이미 이루어졌다.”(142쪽)고 중얼거리는 작중인물 ‘네오 가드너’의 비판적 판단이다. 이것은 식물에 대한 인류 문명의 패배를 참담하게 슬퍼하는 일종의 인류 종언의 서사를 겨냥한 게 아니다. 그보다 역설적이지만, 인간 존재가 최첨단의 문명사회를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팽배해진 온갖 물신화(物神化)——여기에는 근대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롯한 과학기술 문명의 만능주의 아래 억압․왜곡․소멸된 신성(神性)의 가치를 대신한 온갖 세속주의 가치의 범람 속에서 인간 존재의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의 지옥도(地獄圖)에 감금된 수인(囚人)의 처지를 직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춤추는 소나무」에서 작중인물 아주머니가 신사(神社) 본당의 공터에서 피리를 불자 공터에 부는 회오리바람과 함께 공터 주변 소나무와 뭇 존재들 모두 공터 가운데서 회전하는 춤을 추며 그동안 망실했던 신성성을 회복하는 경이로운 현실에 담긴 작가의 서사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단절되었던 신성성과 이어지는 것은 곧 망실했던 신성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신사를 찾은 작중의 소년들은 “어른이 될 수 있을”(157쪽) 성장의 계기를 얻는 것이다. 냉정히 돌이켜볼 때, 우리는 이러한 신성성을 회복한 어른이 되었는가. 그래서인지, 식물기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 「샤베란」의 맨 마지막에서, 식물 샤베란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과정에서 내는 소리가 작가의 모국어인 일본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언어로도 치환시킬 수 없는 식물계의 주술적 언어라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인간 세계를 넘어 저 무한한 우주의 존재와 조우하려는 서사적 재현에 전율할 따름이다.  

미시모리노카쓰코도테기. 규디도라부탁조락킨나미카논치‒마쿠우리조데모우데못만타에에나무사노셍모꾸방가제포로아유페모로가미피오니칵쇠릇앙헤믐자….(210쪽)


#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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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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