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6) 신발 한 짝

 

신발 한 짝

한 운명을 싣고 돌아온 또 하나 운명이 멎다
닻줄조차 반납해버린 무 톤 급 전마선 한 척
하반신 물속에 담근 채 
돌을 베고 누워 있다

폐선 밑바닥에 바다 한쪽이 들어와 산다
그 바다 한가운데 하늘 한쪽이 내려와 살고
열아홉 어부의 딸 같은
낮달 잠시 머물다 간다

세상에 피를 바치고 세상 밖으로 버려진 것들
노을 녘 바닷길을 저벅저벅 걸어 나왔을
잡부의 신발 한 짝이
폐선처럼 마르고 있었다

/2008년 고정국 詩

ⓒ고정국
ⓒ고정국

 

#시작노트

서귀포시 대정읍 오일장은 매월 1일과 6일에 열립니다. 이 작품 「신발 한 짝」은 대정읍 송악도서관에 그곳 주민들에 대한 글쓰기강좌 차 8회에 걸쳐 출강하던 때 썼던 것입니다.

2008년 무덥던 날 오후, 강의 차 도서관에 도착한 시각은 강의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빨랐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일장 구경을 하면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마침 이곳에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한눈에 보이면서, 꼬불꼬불 좁다란 해안도로가 무척이나 정겹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 낮은 방파제 계단에 앉아, 사들고 온 붕어빵 봉지를 펴려는데, 태풍에 밀려왔던 것인지, 바닥에 구멍이 뚫려 하반신을 물속에 담근 채 돌베개를 베고 누운 전마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닻도 밧줄도 노 자루도 다 반납해버린, 말 그대롤 사람에 피를 바치고 세상 밖으로 버려진 폐선이었습니다. 가엾은 그 전마선은 밑창이 뚫려 바다가 그 안에 들어와 있었고, 그 바다 속에는 다시 하늘 한쪽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 복판에 열아홉 살 정도의 갸름한 얼굴의 하현달이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붕어빵 머리 부분 한쪽을 따서 그 낮달에게 ‘고시래’하였습니다.

그날은 전마선의 겉모습을 보면서 첫째 수와 둘째 수를 썼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도서관 강의 날짜에, 이 작품을 마무리하려고 다시 그 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폐선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내졌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어느 외국인 근로자가 신었음직한, 줄 끊긴 슬리퍼 한 짝이, 폐선의 그 모습으로 올라와 땡볕에 마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그 메마른 슬리퍼가 나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들이 결국 “사람에 피를 바치고 세상 밖으로 버려진 것들”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한 짝 슬리퍼가 나를 알아보고, “쓰레기를 문학 내부로 영접하여, 이를 재활용하는 것이 시인이 할 몫”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신발 한 짝’이라는 제목까지 정해주면서, 작품 셋째 수의 마무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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