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7) 세미가, 할머니와 디지털 훈민정음, 좋은땅 출판사, 2022.

사진=알라딘

이 책의 제목인 “디지털 훈민정음”은 책에 담긴 15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담긴 동명의 에피소드이다. ‘근후’ 어린이가 할머니와 한글공부를 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림을 보고 글자를 맞추는 것에서 리모콘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패턴 그리기와 글자 연습을 할 수 있는 디지털 훈민정음 앱을 다운 받아 함께 학습을 시작한다. 주말의 가족 모임에서 근후는 장기자랑 대회에서 래퍼처럼 디지털 훈민정음 노래를 한다. “애들아 애들아, 디지털 훈민정음 ... 할머니에게 알려주라.” 단순하면서도 깊은 노래다. 

이 노래는 디지털 격차를 좁히기 위해 가족이 세대공감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계이지만 급격한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는 디지털 소외를 야기한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할머니와 함께 겪은 일상 속 디지털 이야기를 랩에 담은 이 노래에는 세대간 단절을 넘어서 공감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지어서 널리 펴낸 뜻은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에 잘 담겨있다. 손자가 할머니에게 디지털 일상을 알려주는 것 또한 큰 틀에서 같은 마음이 담겨있다. 

이 책은 디지털문명 시대의 일상에 담긴 이야기들을 모아서 엮어낸 책이다. 저자 세미가는 할머니가 겪는 디지털 일상을 손자인 근후와 그 가족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완도에 사는 제주 출신의 1946년생 어머니와 광주에 사는 2013년생 조카가 이 책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인공이다.

1970년대 생인 세미나가의 글에 2000년대생인 조카 규리안이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렇듯 따뜻한 가족이야기로 디지털 문명과 일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은 담담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디지털 시대, 공감의 사회를 꿈꾸며” 치열하게 40여년을 살아온 청년 활동가의 원대한 포부가 담겨있다. 

“디지털 기기를 대면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주위 분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습니다. 화살표 방향 표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원 기호를 모르는 어르신들, 기계가 고장 날까 봐 만지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기초원리부터 단계별, 반복 학습,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체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그 마음을 생각합니다. 자음과 모음을 한 글자 한 글자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만들었던 그 마음으로 디지털 기초 교육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기를 희망합니다.”

▲완도 할머니 집 가는 길 ▲바다에서 신나는 놀이 ▲할머니 손수레 밀어 드리기 ▲멋진 무대가 된 밤바다 ▲근후네 가족은 멋쟁이 ▲근후 친구는 할머니 ▲스마트폰이 재미있는 초등학생 근후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파라다이스 ▲할머니의 짝짝이 슬리퍼 ▲할머니 카드가 없어요? ▲할머니는 깡통 로봇 ▲6.25 전쟁과 할머니 ▲할머니가 살던 세상 ▲디지털 기계 괴물과 수호기사 ▲할머니와 디지털 훈민정음에 이르는 15개 에피소드에는 세미나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담겨있다. 

세미가의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으로 완도로 이주해 살아간 해녀이다. 그 때문에 완도에서 나고 자라 광주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일해온 세미가에게 제주어는 모국어(Mother language)에 가깝다. 이 책 곳곳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담담한 가족 일상으로 풀어낸 세미가의 마음에는 고향을 떠나 이주민으로 살아온 20세기 제주-전라도 여성의 역사가 담겨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와 주인공들 사이에는 일상의 진실을 토대로 단단하게 연결된 고리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꿔온 청년 정치인이 자기 이야기를 펼치는 첫발을 자신과 가족공동체로부터 도시와 국가로 확장해 나가면서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이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현(現) 광주시립미술관장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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