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7) 개망초 이름으로

 

개망초 이름으로

경술국치 이후에도 나라 안은 늘 아팠다
초여름 도로변에 슬픔의 사슬을 잇고
비로소 ‘乙’(을)의 뜻으로 땅 표면을 지키며<중략>

그리고 꽃과 나는 산성토양을 선호했다
불과 한두 달에 온 국토를 하얗게 감쌀,
지독한 내성을 갖추고 하늘 향해 피었다

젖은 팝콘 주워 먹듯, 젖은 땅에서 줍던 우화
그 꽃 목걸이를 다시 꽃에게 걸어주며
개망초 그 낮은 곳에 함께 살아 좋구나

먼데 천둥소리 으렁으렁 우는 날에 
아픈 새 울음소리 비 사이로 듣는 날에 
까맣게 어둠이 와도 꽃을 접지 않았다

/2013년 고정국 詩

ⓒ고정국
ⓒ고정국

 

#시작노트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합됐던 1910년, 그 치욕의 해를 우리 민족은 ‘경술국치’의 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필 그때 이 망한 나라에 찾아 들어왔다 해서 ‘망초’보다도 더 지독한 ‘개망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개망초가 이 땅에 들어와 나라가 망했는지, 나라가 망해서 이 풀꽃이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6월에서 8월까지 기나긴 폭우와 염천炎天의 중심에서 이 풀꽃은 산성토양에 버티는 법을 배워, 한반도 민초들과 함께 우리 땅의 표면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고정국 시인은 자연을 그리면서, 그 자연 속의 힘없는 존재들에게서 역사를 함께 읽고 있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을 위해 싸웠던 무수한 백성들을 ‘민초’라 부른다. 경술국치의 시대, 그 시절엔 민족이란 그 정체도 불분명했을 터이나, 부당함에 맞서며 정의를 위해 그들은 봉기했다. 권력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의연히 자신들의 믿음만으로 일어섰던 사람들이다. 잡초 같은 그 존재들이 이 땅을 지켜왔고, 그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길가에 만발한 개망초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중략>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피어난 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 강인함, 의연함을 개망초는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개망초의 ‘개망초됨’이 완성되는 종장 앞에서, 고정국 시인은 한껏 서정성 강한 시공간의 장면을 준비해둔다. 그리하여 개망초의 존재론, 그 완결성을 드높인다. 따라 낭송해도 좋으리라, “먼 데 천둥초리 으렁으렁 우는 날에/ 아픈 새 울음소리 비 사이로 듣는 날에……”<후략>

문학평론가 박진임 교수는 이 작품에도 과분한 평을 해주셨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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