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54) 임흥순 다큐 ‘비념’, 안은미 무용 ‘조상님께...’

모든 이의 늙음과 죽음은 평등할지 모르나 죽음이 찾아온 사람이 나의 할머니라면 그에 대한 감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만큼 깊어진다. 여윈 손가락으로 만들어 주던 소소한 음식부터 물끄러미 나를 바라봐 주던 시선까지 할머니의 죽음이 앗아간 것 때문에 가슴은 먹먹해진다. 

할머니 개인의 이야기로 역사를 말하는 예술가가 있다. 지난 6월 초 제주시 납읍리에 소재한 고 강상희 할머니의 집 마당에서 임흥순의 영화 상영이 있었다. 이 집은 남편인 임흥순과 함께 영화제작사 반달을 이끄는 김민경 감독의 외할머니댁으로 4.3으로 남편을 잃고 한 많은 삶을 살던 곳이다. 강상희 할머니와 이 집은 두 사람이 만든 영화 <비념>의 주인공과 배경이 되었고 이날 영화 상영의 현장이 되었다. 

납읍리에서 열린 할망마당 상영회. / 사진=양은희
납읍리에서 열린 할망마당 상영회. / 사진=양은희

초여름 맑은 날 저녁에 임흥순의 작업 일부를 그의 장조모 집에 임시로 만든 ‘마당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도 인상적이었지만 사실 눈에 들어온 것은 4.3과 6.25를 겪은 후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할머니 김동일 여사(1932-2017)가 생전에 무수하게 만들었다는 손뜨개 작업과 유품이었다. 김동일 여사는 임흥순과 김민경이 도쿄에서 만난 조천 출신 4.3 생존자였고 그의 이야기는 후에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 담아낸 바 있다. 이후 여사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두 사람은 여사의 유품을 한국으로 가져왔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우리를 갈라놓는 것들〉로 선보인 바 있다.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엮은 이 날 행사에서 필자는 스크린 주변과 마당 곳곳에 놓인 다채로운 손뜨개 작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필자 역시 위 미술관에서 위 전시를 봤었지만 납읍리 한 농가 마당에서 다시 접한 유품은 더 가까이 더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는 듯했다. 작업 대부분 바늘과 색실로 작은 원형을 만들어 서서히 커다란 테이블보로 확대해 간 것들이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강박적일 정도로 양이 많았고 뜨개 작업 하나하나에 들어간 손놀림과 시간을 생각하면 뜨개질은 힘든 삶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평화를 찾고자 애쓰던 여사가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을 엮어 만든 작은 형태에서 서서히 커다란 꽃 모양으로 키워가면서 사라진 4.3 희생자의 명복을 빌거나 아쉽게 젊은 나이로 쓰러진 친구들의 영혼을 불러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김동일 여사의 손뜨개 작업들. / 사진=양은희<br>
김동일 여사의 손뜨개 작업들. / 사진=양은희

아쉽게도 이 유품은 작가가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 중이나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들어 오는 가을 4.3평화기념관 전시실에서의 전시를 끝으로 정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손뜨개 작업은 김동일 여사 개인이 만든 것이나 우리에게는 그와 같이 4.3을 겪은 모든 여성들의 귀한 흔적이자 후대를 위한 기념비로 다가온다. 손뜨개 수십 점만이라도 4.3평화공원 어딘가에 남겨져 4.3 때문에 쓰러진 여성들을 위한 기념물로서 용감했던 제주 여성의 이야기를 퍼뜨렸으면 좋겠다. 

‘나의 할머니’를 넘어 우리들의 할머니에게 시선을 보내는 예술가도 있다. 지난 7월 초, 김정문화회관 무대에서 안은미컴퍼니와 제주의 할머니들이 만든 공연 <조상님에게 바치는 댄스>는 가히 할머니를 위한 무대였다. 안은미의 독무, 무용수들의 바닥과 공중을 오가는 춤, 그리고 할머니 춤을 기록한 영상, 그리고 무용수들과 제주의 할머니들이 어우러진 무대와 관객이 참여한 마지막 춤의 파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눈물과 웃음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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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의 <조상님에게 바치는 댄스>, 관객과 무용수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 사진=양은희

파격과 도발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현대무용가 안은미는 2010년 ‘안은미컴퍼니’의 단원 그리고 카메라맨과 함께 전국을 돌며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춤을 권하고 춤추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하며 안무를 짜 온 그에게 논두렁, 시장, 바닷가 등 일상에서 만난 할머니의 움직임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중년에 들어서며 늙음의 속도와 그에 비례해서 다가오는 삶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며 젊음과 미모를 예찬하는 사회에서 소외된 채 우리의 시야 한구석으로 밀려난 보통 할머니의 몸과 그 몸이 견뎌낸 시간 속에서 나오는 움직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 <조상님에게 바치는 댄스>는 사실 영어 제목 ‘Dancing Grandmothers’가 작품의 내용에 더 어울린다. 안무는 노인의 자세에서 영감을 받았고 몸빼 바지에 셔츠, 빨간 내의를 입고 흘러간 오래된 한국의 가요부터 전자음악까지 다양한 음악과 안은미가 기록했던 한국의 할머니들의 춤추는 영상 등을 배경으로 환희와 비애, 앙증맞음과 고독의 그늘까지 복합적인 감정의 높낮이를 오간다. 2014년 파리 미쉘 시몽 공연장에서 공연되었을 때 유럽의 무용계는 ‘서울의 피나 바우쉬(Pina Bausch)’라고 불리는 그의 새 공연에 매료되었고 이후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런던 등 해외의 여러 도시뿐만 아니라 서울 등 국내 여러 도시의 초대를 받아 공연되었다. 

안은미는 한 인터뷰에서 할머니의 막춤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공연의 주인공인 할머니들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나 정보기술(IT) 시대까지 경험한 세대예요. 전무후무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며 평생 육아와 가사, 생계를 위한 노동을 감내해야 했죠. 이분들에게 춤은 치유이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에요. 덩실덩실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던 거죠.” 

아름다운 발레, 절제된 한국의 고전무용, 세련된 현대무용을 마다하고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게 버틴 할머니, 그리고 한국의 할머니라는 집단의 존재를 통해 무용이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그의 철학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 혹시 할머니만 생각한다고 섭섭한 분들이 있다면 안은미의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나 십대를 위한 <사심없는 땐스>를 보시길 권한다.


#양은희

양은희는 제주출생으로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큐레이터 및 평론가, 미술사학자로 활동해 왔다. 현대미술과 미술제도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 번역서를 발표했다. 저서로 ▲현대미술 키워드 1(2022, 공저) ▲방근택평전(2021)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2017, 공저) ▲디아스포라 지형학(2016, 공저) ▲뉴욕, 아트 앤 더 시티(2007, 2010) 등이 있다. ▲개념 미술(2007) ▲아방가르드(1997) ▲기호학과 시각예술(1995, 공역)을 번역했다. 제1회 정점식미술상 수상자(2022)이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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