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333) 개라서 눈을 쑤시랴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 편집자 글


* 개랑 : 개라서, 개라고 해서

‘개라서 눈을 쑤시랴’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사진=픽사베이
‘개라서 눈을 쑤시랴’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사진=픽사베이

개는 가축 중에서도 가장 친근한 짐승이다. 한데 워낙 영물(靈物)이라 집에서 도둑이 들면 짖고 으르렁거려 범접하지 못하게 막아 나선다. 성급하고 사나운 개는 잡인의 출입을 못하게 파수꾼 구실을 톡톡히 한다.

충견(忠犬)이라 하듯 주인에게는 절대 복종하면서도 낯선 사람의 접근에는 독한 근성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개에 대해 아주 홀대(忽待)해 왔다. 주인의 뒤를 졸졸 따르기만 해도 ‘이놈이’ 하고 욕지거리를 하거나 그래도 쫓으면 냅다 발길질을 하기 일쑤다. 자고이래로 개를 그렇게 하대하고 멸시해 왔다는 얘기다.

요즘처럼 동물을 존중하는 시대에 개를 헌신짝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음은 물론, 지탄을 받아 마땅하리라.

시골집 마당에 놓아기르는 누렁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물며 가슴에 품고 다니며 가족처럼 애지중지하는 오늘에 그런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설 자리가 없으리라.

‘개라고 눈을 쑤시겠느냐’ 함은, 개라면 모를까 사람인데 차마 눈을 쑤시겠느냐는 것인데, 옛 시절이니까 귀에 들어왔지 지금 같으면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말이다. 개는 사람에게 가축이 아닌 반려(伴侶)다. 그런즉 언감생심, 개의 눈을 쑤신다는 말은 사람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외국에서 애견을 견공이라 하고 심지어는 재산 상속까지 한다. 대문호 사르트르가 사망하자 엄청난 유산(고료 수입)을 상속하는데, 계약 결혼으로 부인의 법적 신분을 얻지 못한 사실혼의 보브와르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개는 받았다잖는가. 

우리에겐 소극(笑劇)이나, 프랑스는 실제이고 엄연한 현실이다.

비천한 사람이라고 개처럼 하대해 눈을 쑤시는 행위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 아닌가. 인간은 누구나 존중돼야 한다. ‘개라서 눈을 쑤시랴’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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