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연극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제주가 아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른 오후 혹은 저녁 퇴근 시간이면 연극을 만날 수 있는 제주. 다양한 주제와 아이디어가 빛나는 무대에서,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연극을 만날 수 있는 제주.

6월 15일부터 7월 3일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일 동안 제주에서 열린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질문을 안겨줬다.

좋은 작품으로 감동을 느끼는 즐거움, 새로운 무대를 기다리는 즐거움.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안겨 주는 예술과 일상이 밀접하다면 도민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2023년 7월 3일 이후 제주 연극은 창작자와 관객에게 어떻게 존재할까?

1.
대한민국연극제는 매년 전국을 순회하면서 열리는 일종의 본선 대회다. 세종을 제외한 전국 16개 광역 단위 시도 예선 대회를 통과한, 각 지역 1등 팀들이 모여서 최고의 작품을 겨룬다. 지난해는 밀양, 올해는 제주에서 열렸다.

제주에서 열리는 본선 대회는 22년 만이다. 1992년(제10회), 2001년(제19회)에 이어 세 번째(제41회)다.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집행위원회는 기획의도·추진방침을 세 가지로 규정했다.

① 동시대적 가치 발굴(생명·평화·환경) 및 대한민국 연극예술의 균형 발전
② 전국 16개 시·도 대표 극단이 참가하는 최고·최대 연극 예술의 향연
③ 문화예술 중심도시 제주 위상 제고 및 제주도민 문화예술 향유

이런 방침을 바탕으로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는 총 15개 행사로 치러졌다. 이 가운데는 ‘공연 관람(향유)’ 비중이 가장 높다.

▲개막 공연 ▲경연 공연 ▲초청 공연 ▲네트워킹 페스티벌(소극장 공연) ▲시민연극제 ▲공연 배달 이벤트(아트 딜리버리) ▲아티스트 초청 공연(재주 보러 올래?) ▲제주 배경의 프로젝트 공연(탐나는 연극) ▲단막희곡 당선작 낭독극까지 9개 행사가 관객 입장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는 향유 성격이다.
 
나머지는 ▲학술행사(제주국제연극포럼) ▲제주연극사, 대한민국연극제 아카이브 전시 ▲시민참여 연극 경연 ▲연극인 100인 토론회 ▲연기 향상 워크숍 ▲폐막식과 시상식 등이다.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폐막식 모습. / 이하 사진=대한민국연극제 제주 페이스북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폐막식 모습. / 이하 사진=대한민국연극제 제주 페이스북

2.
대한민국연극제 본선은 경연 대회라는 태생적인 부분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특히 관객 입장에서도 언어, 기반, 정서 등이 조금씩 다른 국내 지역 연극을 만나는 자리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더욱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기에 연극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의 경연 일정은 6월 16일 전라북도 대표팀을 시작으로 7월 2일 경기도 대표팀까지 이어졌다. 전라남도 대표님 ‘극단 미암’은 뒤늦게 자체 사정으로 출전을 포기하면서 15개 팀이 맞붙었다.

전라북도 극단 창작극회의 ‘꿈속에서 꿈을 꾸다’는 임종을 앞둔 경순 할머니의 과거를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쟁, 산업화, 현재까지 시대 별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준다. 관록의 노년부터 중견, 신인까지 고른 연령대의 배우들이 보인 열연이 큰 힘을 발휘했다. 

제주도 극단 가람의 ‘울어라! 바다야’는 4.3으로 부모와 이별한 해녀 순이가 일본 대마도까지 건너가 가족을 부양하는 사연을 그린다. ‘견디다보면 낫고, 살다보면 살아지는’ 할머니 세대 제주 해녀들의 고되고 안타까운 삶을 생생하게 그린다. 

경상북도 극단 둥지의 ‘끝나지 않은 시간’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직후까지 이념은 모른 채 오직 사랑, 우정, 가족만 생각해온 순박한 청년 진구의 비극적인 삶을 무대 위에서 펼친다. 아치형 무대를 회전하면서 여러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연출이 돋보였다.

충청북도 극단 청예의 ‘밀정의 기록’은 일제강점기 당시 무장 항일 운동에 매진한 의열단 안에서 일본 경찰의 첩자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양쪽 모두에 밀정이 존재한다는 설정을 긴장감 있게 풀어간다. 

대구시 극단 에테르의꿈의 ‘무좀’은 대를 이어온 시골 본가 집을 허물고 펜션을 지으려는 집안 갈등 속에, 무좀처럼 질기게 이어지는 가족 간의 애증과 화해를 그린다. 별 다른 무대 연출 없이 3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들의 맛깔 나는 대사 호흡이 일품이다.

인천시 극단 십년후의 ‘애관! 보는 것을 사랑하다’는 128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최초 근대식 극장 ‘인천 애관극장’의 역사를 시대 별 대표 작품을 재현하거나 직접 보여 주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역사성과 장소성을 지닌 지역의 문화 공간을 소재로 삼은 창작은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할 만 하다.

충청남도 극단 둥지의 ‘천사를 보았다’는 작품 안에 세 가지 극을 등장시킨다. 다투는 남녀, 생각할 줄 아는 동물원 잉어, 신작을 둘러싼 극단 대표와 배우의 갈등까지.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진행될수록 세 가지 극이 연결되면서, 관객에게 ‘진실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대전시 극단 새벽의 ‘산책: 신채호의 삶과 사랑이야기’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부인 박자혜 여사를 만나고 뤼순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과정을 그린다. 군무, 조명, 의상 등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한 시도가 눈에 띄었다.

광주시 극단 좋은친구들의 ‘빌미’는 높은 부와 명예를 가진 가정과 정 반대의 환경인 다른 가정이, 시작은 소소했으나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겪는 줄거리다. 다소 무리한 설정도 있지만 빠른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은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경상남도 극단 미소의 ‘난파, 가족’은 어딜 가든 고집스럽고 가부장적인 한식 명인이 해외여행 도중 실종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걸쭉한 경상남도 사투리를 곁들인 배우들의 재치 넘치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돋보인다.

경기도 극단 한홀의 ‘불멸의 여자’는 마트 화장품 매장 노동자들에게 들이닥치는 시련을 다룬다. 권력을 쥐고 ‘을’을 착취하는 ‘갑’,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을’, ‘을’이 ‘을’을 괴롭히는 아이러니…. 그렇게 부조리한 구조 안에서 소시민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으로 끝내 무너지고, 관객들에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순 없는 여운을 남긴다.

기자가 관람하지 못한 울산시 극단 푸른가시의 ‘간절곶-아린 기억’과 강원도 극단 ‘파·람·불’의 ‘옥이가 오면’은 각각 분단으로 고통 받는 가족사와 치매를 소재로 다루며 관객의 박수를 받았다.

3.
공연 시작과 함께 한동안 들리는 건 풀소리, 보이는 건 구부정한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 뿐이다. 이내 나타나는 다른 할머니가 툭툭 말을 걸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럼에도 때맞춰 고개를 움직이며 반응하는 것을 보니, 말 없이도 통하는 돈독한 사이임에 분명하다. 

진주가 글을 쓰고, 김희영이 연출한 서울 극단 프로덕션IDA의 ‘배소고지 이야기’는 두 할머니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금강혼식을 맞이하는 말 없는 입분 할머니와 그의 절친한 순희 할머니. 두 사람 앞에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의 친구 백소녀가 등장한다. 그 때부터 작품은 2016년 금강혼식이 열리는 가을밤 전북 임실군 옥정호 인근 매운탕집과 1950년 한국전쟁 즈음 같은 동네를 오간다.

나이 많은 등장인물이 본인의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는 무척 친숙하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구조적인 면에서 여느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때마다 주요 장면을 나열하는 백과사전식 구조에 치우치면,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그런 우려를 피해갔는데, 극본·연출·연기가 삼박자로 어우러지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국전쟁 당시 실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참고한 이 작품은 입분과 순희를 중심으로 여자들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지리산 빨치산 우두머리에게 투신했다가 군인에게 구해져 경찰청장 부인 위치까지 오르는 입분. 경찰 남편에게 ‘내 가족이 아니’라고 버림 받고 군인에게 끌려갔지만, 학살터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해 홀로 살아온 순희. 

두 사람 인생에는 또 다른 두 여인이 등장한다. 빨치산에게 집단으로 몹쓸 짓을 당하며 넋이 나간 상태로 살아가다 일찍 생을 마감한 같은 마을 친구 백소녀, 그리고 군인 앞에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 오빠의 권유에 못이겨 순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한 시누이 막동이다. 

입분과 백소녀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과거를 공유하는 관계, 순희와 막동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던 사이에서 졸지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바뀐 관계다. 전자의 경우, 무슨 이유에서 인지 침묵하던 입분이 백소녀 등장과 함께 말문이 터지면서 점차 회복하는 서사로 흐른다면, 후자는 막동이 오빠의 사망 소식을 전하러 왔지만 순희가 동행을 거부하면서 복잡한 감정의 춤사위로 대비된다. 지난 과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길도 있지만, 쉽사리 용서할 수 없는 길도 있다는 점을 중심 인물들의 각기 다른 결말을 통해 보여준다.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의 한 장면.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의 한 장면.  

아울러 참혹했던 세월을 “살려고, 어떻게든 살려고” 몸부림치고 끝도 없이 감내했던 많은 윗 세대들의 모습도 입분과 순희를 통해 투영됐다. 여기에 주요 남자 인물들은 각기 대비되는 모습과 상징으로 나타난다. 

빨치산 치안대장은 백소녀를 겁탈하는데 앞장섰고 끝끝내 살아남아 신분을 세탁해 경찰청장 축하연에서 입분 앞에 선다. 그는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어렵게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과 대비되는 기회주의자를 연상케한다. 공씨는 젊은 시절 군인으로 참전했고, 시간이 흘러 경찰청장이란 고위 공직까지 지낸다. 그는 빨치산 토벌 과정 중 본거지에서 발견한 입분에게 손을 내밀고 평생의 반려자로 함께한다. 그 시대라면 치안대장 같은 짓을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공씨는 입분을 인격체로 존중했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아내가 말문이 돌아온 순간에도 진심으로 기뻐해준다. 

이 같은 줄거리 위에 입힌 대사들은 배경과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감정과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은유적 표현, 대사와 대사 사이를 비워두는 적절한 공백, 비언어적 표현이 알맞게 사용되면서 메시지는 은은하게 번지고, 감정은 더욱 짙어진다. 예를 들어 빨치산 치안대장의 입에서 나오는 “좋은 것은 함께 나누는 새 세상”이라는 대사는 폭력성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누구나 가슴 속에는 끝내야 할 전쟁이 있다”는 입분의 대사는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하는 한과 아픔을 나타낸다.

여기에 인물과 사건을 종합적으로 내포한 상징들은 극의 여운을 더하는데 한몫 한다. 순희가 만드는 매운탕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장소에서 핏물과 눈물을 흘려보낸 물을 머금은 물고기로 만든다. 순희와 막동이 함께 부르고 즐기던 ‘동무’ 노래는 예전에는 추억의 노래였지만 결국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배소고지 이야기’ 무대는 직사각형 단상이 무대 위에 올려져 있는 형태다. 관객 쪽 방향에만 두 사람 정도가 여유 있게 앉을 수 있는 정도로 파여있다. 그 자체로만 보면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무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은 오히려 비어있기에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가 큰 힘을 발휘했다. 

작품은 코러스(단역) 활용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단순 배경 인물로만 쓰는데 그치지 않고, 무대 장치 이상의 역할로 작품에 녹아든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순희가 기억하는 군인들의 양민 학살 장면이다. 코러스는 처음에는 공포에 떠는 주민으로, 그 다음에는 사격 자세를 취하는 군인으로, 다음은 쓰러진 주민으로, 마지막에는 망자의 혼백으로서 무대에 등장한다. 정해둔 동작과 선을 지키면서, 흐트러짐도 최소화한 장면의 전환으로 코러스는 ‘코러스’ 이상의 존재로 관객에게 각인됐다. 동시에 코러스들은 무대 아래 있을 때도 상황에 맞는 연기를 펼쳐보였다. 그렇기에 배우 밖에 없는 무대는 공백감 없이 관객을 집중시키는 힘을 간직했다.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심사위원진은 유래 없이 ‘배소고지 이야기’ 코러스 배우들(김신영, 남재국, 김동하, 오준석, 김윤서, 공준호, 김지원, 안선하)에게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줬다. 그 선택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선택이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이 작품의 화룡점정 같은 존재다. 입분과 순희 두 주인공의 연기력은 압도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머니에서 소녀로 바뀌는 초반부에 두 배우는 눈, 뺨, 입술, 턱, 목, 어깨, 허리, 팔, 무릎 등의 신체 부위를 변화시키면서 같지만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소녀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른 나이 때 모습도 연기하는데, 그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도 어색함 없이 소화해 내면서 관객의 감탄을 자아냈다. 입분 역을 맡은 배우 임정은은 신체 뿐만 아니라 백소녀를 안고 수십 년 만에 처음 토해내는 음성부터, 지날수록 말이 온전해지는 변화까지 훌륭하게 소화했다. 순희 역의 배우 윤진성은 활기찬 모습 이면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과거를 읊조리듯 대사와 표정으로 보여줬다.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의 한 장면.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의 한 장면.  

이렇게 ‘배소고지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증명해냈다. 화려한 무대와 장치가 없어도 배우의 힘과 활용 만으로 충분히 멋진 무대를 만들 수 있음을, 시시콜콜 하나부터 열까지 풀어내는 것보다 오히려 정제된 여백과 함축이 더 큰 여운을 선사할 수 있음을, 연출·배우·극본이 조화를 이룰 때 큰 감동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심사위원진은 이 작품에 최고상인 대상을 안겨줬다.

사족을 굳이 짜내 더하자면 마지막 순희의 춤사위가 다소 급하게 사라졌기에, 만감이 교차했을 순희의 심정을 담아 조금 더 춤사위를 보여도 좋지 않을지 쓸데 없는 생각을 더해본다. 

4.
극작가 배삼식의 희곡 ‘1945’는 작품의 공간적·시간적 배경이 조금 특별하다. 공간적 배경은 조선 국경과 비교적 가까운 중국의 대도시 장춘, 시간적 배경은 해방 직후인 ‘해방공간’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기쁨과 혼란이 공존하는 경계의 공간. 불완전함이 가득한 배경 속에서 조국행 열차를 기다리는 조선인들, 그리고 한 명의 일본인이 있다. 

무대에는 목재 기둥이 둘러싸듯 세워지고 바닥에는 단상이 설치됐다. 가운데는 나무 상자들이 일정하게 놓여있다. 이곳에서 부산시 극단 부산연극제작소 동녘의 연극 ‘1945’는 두 젊은 여인이 기차에 숨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한 명은 조선인 이명숙, 한 명은 일본인 미즈코. 본인들의 신세를 “팔린 물건”으로 자조하는 대화 속에서 관객들은 두 사람이 위안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뱃속에 아이까지 품은 일본인 미즈코는 명숙에게 매달리듯 도움을 구하고, 그 도움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장춘에 도착한다. 

작품의 이야기는 모두 전재민(戰災民) 신세인 등장인물들이 모이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하는 순간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목표는 바로 조선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하고 탑승하는 것. 등장인물들은 크게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어린 두 자매와 부모 가족, 노인과 아들 내외, 장춘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녀(장수봉·박선녀), 몸이 아픈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장춘에 묻은 남자 오영호, 그리고 처음에 등장했던 이명숙과 미즈코다. 

연극 '1945'의 한 장면.  
연극 '1945'의 한 장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은 생겨난다. 기차 삯을 마련하기 위해 떡 장사를 시작했고, 동고동락하며 나름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 와중에 이명숙과 오영호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신분을 증명하지 못한 미즈코의 문제도 오영호의 죽은 동생으로 처리하면서 해결한다. 마침내 기차표도 구하면서 짐 싸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갈등과 비극은 피할 수 없다. 이명숙과 미즈코가 속했던 위안소 여성관리자(박선녀)가 무리 중에 속해있었고, 세 사람은 일찌감치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는 상태다. 박선녀는 “조선에 도착하면 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편에 손을 대고 있다. 떠날 날이 다가오는데 장수봉은 장티푸스에 걸리고 박선녀는 중독 상태다. 미즈코와 이명숙의 진짜 신분도 드러나면서 결국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나뉘고 만다.

작품은 모든 구성원이 합심해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서 대립하고 반목하는 모습을 통해 ‘공동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심각한 아편 중독인 박선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장수봉을 챙긴다. 이명숙은 너 혼자라면 기차를 탈 수 있다는 제안에도, 어떻게 일본인과 함께 할 수 있냐는 비난에도 “지옥을 같이 겪은” 미즈코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기차도 포기하고 조국 대신 낯선 장춘에 남는다. 약자를 보듬는 건 결국 같은 처지인 약자들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한 채 기차에 오른다. 인종, 국가, 문화 등 공동체를 규정짓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이타심’이 빠진 공동체는 과연 공동체일까 라는 질문을 ‘1945’는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통해 아직까지 조명받지 못한,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한 역사의 피해자들은 없는지 강력한 울림을 남긴다. 

연극 '1945'의 한 장면.  

작품은 인물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사에 경상, 이북 지역 등의 찰진 사투리가 입혀 지면서 보는 맛과 듣는 맛을 한층 배가시킨다. 여기에 나무 상자를 활용한 연출은 작품의 풍미를 한껏 높인다. 각각은 보관함 혹은 의자로, 결합해서는 주방이나 빨래터 혹은 걷는 길로 변신한다. 매끄러운 소품 활용은 작품이 강조하고 싶은 연출에서도 돋보인다. 특히, 인절미를 만드는 장면은 기다란 천과 흰색 가루, 조명과 음악을 조합하면서 마치 희망을 극대화하는 환상처럼 다가온다. 일본어 억양을 가미한 어설픈 한국어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어 대사를 소화하면서 자막까지 오류 없이 입히고,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까지 더해 지면서 ‘1945’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에게 기억된다. 다만, 결말 부분은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각색이 이뤄졌는데, 그 자체로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나 개연성에 있어서 물음표를 깔끔하게 해소하지 못했다는 작은 흠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이번 대회의 1등은 ‘배소고지 이야기’와 ‘1945’ 가운데 결정되리라 예상했는데, ‘배소고지 이야기’는 대상(대통령상), ‘1945’는 2위인 금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폐막식에서 사회자는 치열한 토론 끝에 순위가 결정됐다고 밝혔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여백이 느껴지는 연기와 구성, 배우들의 신체 활용에 중점을 둔 연출이 돋보였다면, ‘1945’는 반대로 밀도 있는 느낌을 주면서 소품을 활용한 연출이 돋보였다. 관객 입장에서는 두 작품 모두 최고상을 받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결과는 결정됐지만 훌륭한 작품을 보여 준 두 극단에게 이 자리를 빌어 박수를 보낸다. 

5.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는 본선 경연 이외에 다양한 행사들로 진행했다. 오후 3시, 7시 두 차례 진행한 본선 경연 사이 마다 짧은 공연을 준비했고, 초등학교, 요양원 같은 생활 공간이나 관광 명소를 찾아가는 공연도 병행했다. 문예회관 야외 무대도 모처럼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관객이 다양한 공연을 만나는 ‘향유 확대’는 지역에서 타 예술에 비해 기반이 부실한 연극 예술의 저변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를 모았다. 

일단, 지난해 밀양 대회 등 최근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대회 경향과 달리 본선 경연을 2회로 늘린 결정은 향유 확대 취지와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서 선택의 폭을 넓혔기에 환영할 만 하고, 경연팀 입장에서도 완성도를 가다듬는 기회로 작용했다. 2회 공연은 문예회관, 아트센터, 비인까지 공연장을 세 곳이나 확보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준비 과정에서는 문예회관-아트센터와 비인을 비교하면 공간 성격이 조금 다르기에 이와 관련한 본선 경연 참가 팀들의 문제 제기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3곳이나 확보할 만큼 준비 기간이 예전처럼 1일이 아닌 2일이 주어졌고, 보다 충실하게 준비한 무대가 가능했다. 작품 완성도는 무대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사실도 몸소 확인했다. 여기에 공간을 빌려 이용하는 입장과 공간을 관리하는 입장은 서로 100% 만족할 수 없지만, 행사 기간 동안 세 공연장 무대 담당 직원들의 협조 또한 언급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본선 경연과 달리 나머지 면에서는 ‘향유 확대’에 충실했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다른 무엇보다 루마니아 팀 초청 공연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연극제에서는 루마니아 Tony Bulandra Theater 팀이 제주를 찾아 18일 저녁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아르고 원정대’ 공연을 가졌다. 이번 공연은 두 나라 연극인들의 교류 차원에서 열렸다. 앞서 6월 3일 루마니아 바벨페스티벌에서 개막 공연을 가졌고, 18일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에서 초청 공연으로 또 한 번 공연했다. 출연진 13명 가운데 7명은 한국인 배우다.

다른 나라의 연극을 만나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한국 배우들까지 참여하니 예술가와 관객 모두에게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에서 해외 공연을 만나야 하는지는 확실한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향유 확대’ 차원에서 무척 비효율적인 구조다. 앞서 언급했던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의 기획의도·추진방침을 다시 살펴보자.

① 동시대적 가치 발굴(생명·평화·환경) 및 대한민국 연극예술의 균형 발전
② 전국 16개 시·도 대표 극단이 참가하는 최고·최대 연극 예술의 향연
③ 문화예술 중심도시 제주 위상 제고 및 제주도민 문화예술 향유

2번과 3번 모두 사실상 향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열악한 제주 연극 여건을 고려하면, 이번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는 도민들이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공연을 볼 수 있는 향유 확대에 집중하는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루마니아 팀과의 합동 공연은 고작 한 차례에 불과했고, 그에 비하면 비교적 많은 예산이 투입됐다. 루마니아 팀 초청 공연에 투입된 예산은, 집행부가 본선 경연대회 한 팀에게 지원하는 금액을 훌쩍 넘는 억대라고 알려졌다.

국제 교류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분명 의미 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나, 대한민국연극제가 아닌 다른 기회에 시도돼야 여러모로 취지가 더 빛나지 않겠냐는 질문이다. 더욱이 다른 지역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제주 본선 대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해외 초청 공연 딱 한 번에 드는 비용이면 더 많은 장소에서 더 좋은 공연으로 도민과 만날 수 있지 않겠냐’는 아쉬움이 저절로 나오는 이유다.

더욱이 루마니아 팀과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준비 과정에서 공연 직전까지 전전긍긍한 문제, 마치 악세서리 같은 느낌으로 겉돌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국제포럼, 너무나 적나라한 급조된 완성도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개막공연 ‘치마돌격대’ 등 여러 문제점들을 종합할 때 해외 초청 공연 대신 내실 있는 준비가 더 낫지 않았냐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 루마니아 공연의 기획-제작은 손정우 현 한국연극협회장이 이름을 올렸다. 대한민국연극제보다 본인의 치적 쌓기가 우선이었다는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 냉철한 분석과 향후 변화가 필요한 대목이다.

전국의 젊은 극단들이 참여한 네트워킹 페스티벌은 참가 팀을 총 5개로 늘렸다. 특히 제주섬에서 머무르면서 반 강제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기에 오히려 소통이 더 끈끈했다는 반응을 참고해, 내년 대한민국 연극제 용인 대회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여기에 추사기념관, 돌문화공원, 협재해수욕장 등 섬 곳곳 명소에서 공연을 진행한 ‘탐나는 연극!’은 제주만의 가능성을 보인 기획이었다.   

협재해수욕장에서 선보인 융합예술실험극 '살고 있는가(Hati-Hati Atman)' 공연 장면.<br>
협재해수욕장에서 선보인 융합예술실험극 '살고 있는가(Hati-Hati Atman)' 공연 장면.
문예회관 야외무대에서 선보인 '탐라다, 제주할망' 공연 장면.<br>
문예회관 야외무대에서 선보인 '탐라다, 제주할망' 공연 장면.
비인 야외에서 선보인 '너, 돈끼호떼' 공연 모습.
비인 야외에서 선보인 '너, 돈끼호떼' 공연 모습.

6.
제주에서 복수의 연극 작품을 선보이는 기회는 제주연극협회가 주관하는 ‘소극장 연극축제’, ‘제주 더불어 놀다 연극제’, 그리고 대한민국연극제 지역 예선 대회까지 세 개 정도에 불과하다. 간혹 민간 극단에서 여러 작품을 기획해 선보이긴 하나 보기 드물다. 코로나19 이후로는 타 지역 초청 공연도 빠지면서 더더욱 다양한 연극 예술 향유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일부 아쉬움은 있으나 이번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를 통해, 도민들도 제주 안에서 보는 연극 예술이 전부가 아님을 직접 확인했다. 전국에서 온 본선 경연 팀들과 제주 연극계를 작품만 놓고 비교하면, 엇비슷한 경우도 있었지만 냉정하게 격차를 체감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이번 대회 한 번으로 제주에서 연극 창작과 관람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당연히 기대할 순 없다. 22년 만에 제주에서 열린 큰 연극 축제를 통해, 연극에 대한 재미와 흥미를 가진 도민들이 조금이라도 새로 생겨났다면, 이번 대회는 그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가 잠깐 타올랐다가 꺼지는 촛불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다. 도민들에게 ‘관심’이라는 불씨가 전달된 만큼, 그것을 키우거나 혹은 꺼뜨리는 건 어려운 여건이지만 앞으로 제주 연극인들의 손에 달려있다.

덧붙여 ‘예술 발전’이라는 공익적인 차원을 봐도, 제주 안에서 행정이 가진 중요한 역할을 봐도, 제주에서 만나기 힘든 연극을 도민들에게 정기적으로 소개하는 기회 역시 이번 연극제를 계기로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예술로부터 감동을 느끼는 경험은 일상에서 다양하고 많은 창작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본선 경연을 포함한 모든 공연 출연진과 제작진, 촉박한 일정에 밤낮으로 애쓴 집행위원회, 그리고 공연마다 관객들을 안내한 봉사자 등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를 위해 노력한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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