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8) 파리와의 동거

 

 파리와의 동거
-시조 스토리텔링

시는 노래이고 노래는 곧 눈물이란다
기뻐 울고 슬퍼 울고, 아파 울고 쓰려서 우는
파리가 시인이란다, 온몸으로 운단다

아불싸, 우리 파리가 소주잔에 빠져있네
아직 죽지 않고 “파리 살려!”소리도 없네
파르르 예쁜 파문만 소주잔에 일고 있었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고
푹 젖은 파리 녀석을 잔 밖으로 건져 올렸네
전신에 술 냄새 풍기며 비틀비틀 거리는 파리

<중략>

“파리 목숨 걱정 말고, 사람 목숨 걱정하라!”
술타령 낭만타령 신세타령 좀 그만하고
막 가는 세상을 향해 “더욱 크게!” 울라던 파리

그날로 삼십 오년 술 담배를 딱 끊었다
처량한 내 몰골이 그때서야 눈에 들고
까만 점 파리 목숨이 사람보다 더 컸다

절뚝이 날개 한 쌍을 나에게 주고 간 파리
밥보다도 친구보다 책보다도 더 고마운 파리
한 여름 동거를 끝내고 머리맡을 떠났다

/2006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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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파리는 차츰 힘겨운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아득한 사선을 넘고 넘어, 악착같이 금악리 집까지 찾아온 이유가, 오로지 <내가 울던 파리> 그 노래를 끝까지 듣기 위함이었다는 말에 나는 경악했습니다. 결국 나는 서슴없이, 원로가수 윤일로 선생의 히트곡인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파리의 지붕 밑에 거닐던 그대여, 지금 어데 사라졌나 사랑의 마돈나여, 내가 울던 파리 내가 울던 파리, 눈물의 추억만 남아 또다시 울던 파리…” 프랑스 ‘빠리’를 그냥 ‘파리’로 발음하면서, 열심히 파리의 비위를 맞추었습니다. 내 노래를 들으며 눈물 글썽이던 파리는, 노래를 마치자 천천히 내 어깨 위로 날아와 앉고는, “아저씨, 당신은 시인이 아니고 가수였구먼......” 그때서야 나도 솔직하게 “인간 사회에선 파리 목숨정도는 목숨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파리는 “그걸 내가 왜 모르겠수, 헌데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 목숨도 파리 목숨이나 별 다름이 없는 거 같던데요?” 했습니다. 그 말에 나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중략>
죽어서야 찾아온 파리 목숨만한 평화…, 그 슬픈 평화가 메모지 위에 가볍게 놓여 있습니다. 나는 메모지를 들고 한참동안 파리의 시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려 “후우-”하고 불었습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에서 아득하게 파리 사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한민국  광복 60주년을 맞는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2004년에 썼던 우화寓話, 「파리와의 외출」의 끝부분 옮기면서 <시작노트>에 대신하였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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