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재단, 4.3트라우마 치유 포럼
한홍구 교수 “치유의 공동체로 나아가자”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중에서

제주를 포함한 전 국토에 걸쳐,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정확히 셀 수도 없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그러나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가해자 위치에 서고, 책임자 처벌 없이 오히려 피해자를 범죄자 취급하며 진실 은폐를 강요한 “죽음마저 죽였던 한국 현대사”로 인해 정신적 고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주4.3, 광주5.18을 포함한 국가폭력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상처)의 근원을 분석하고, 4.3평화·인권 교육과 트라우마 치유를 연계하는 자리가 열렸다.

제주도가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과 4.3트라우마센터가 주관한 ‘2023 4.3트라우마 치유 포럼-국가폭력 트라우마 그리고 기억’이 20일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2023 4.3트라우마 치유 포럼-국가폭력 트라우마 그리고 기억’이 20일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2023 4.3트라우마 치유 포럼-국가폭력 트라우마 그리고 기억’이 20일 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4.3트라우마센터는 지난 2020년 5월 문을 열었고 내년 국립기관으로 승격을 앞두고 있다. 4.3트라우마 치유 포럼은 지난해 시작해 올해가 두 번째다.

올해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기조강연을, 심리건강연구소 김석웅 소장과 제주한라대학교 이정원 교수가 주제발표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찬호 과장과 제주대학교 엄미경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 식전 행사로는 4.3트라우마 센터 치유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4.3 당시 겪은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공연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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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는 기조강연 ‘국가폭력 트라우마 기억&치유’에서 국가폭력의 성격부터 실제 사례, 문제점, 대응 방안까지 폭 넓게 짚었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국가는 그 안의 구성원들이 정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받아들이고, 국가에게 일정 수준의 폭력을 위임한다. 일례로 누구나 원치 않는 세금 납부도 국가폭력 가운데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국가폭력은 적정한 수준에서 비례한 원칙으로 적용돼야 하지만, 한국 현대사는 그렇지 못했다. 국가폭력은 자연재해, 사인 간의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와 피해를 유발하기에, 트라우마가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주4.3을 포함한 한국은 국가폭력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다.

국가폭력 피해의 특징은 ▲피해의 심각성, 복합성 ▲보호자인 국가의 가해 ▲가해자가 있는데 불처벌 ▲피해자를 범죄자 규정 ▲사회적 낙인과 고립 ▲진실의 은폐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은 다양한 국가폭력이 오랜 시기에 걸쳐 복합적으로 자행됐다”고 분석했다.

한홍구 교수는 “광주 트라우마센터를 설립할 때 일원으로 참여했었다.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며 발전했지만,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 여러 나라들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국가폭력 트라우마센터가 없었다. 2012년이 돼서야 광주를 시작으로 2020년 제주에 두 번째로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한홍구 교수는 일제강점기부터 민간인학살, 이승만 정권, 연좌제, 1960년대, 유신시대, 전두환 시대, 노태우 이후, 조작간첩, 기타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 피해자와 치유 대상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트라우마센터 설립 과정에서 어떻게든 근거로 마련하고자 피해당사자 291만2300명, 광의피해자 731만6000명, 생존추정 181만9000명 등으로 수치를 냈지만 이 또한 추정치에 불과하다.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기조 강연을 맡았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기조 강연을 맡았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대목(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과 1954년 1월 피해자를 소리 높여 기억한 것만으로 경찰에 붙잡힌 제주의 ‘아이고 사건’ 등을 꼽으며 “한국 현대사는 죽음마저 죽이면서 말하지 못한 국가폭력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제도적으로 트라우마 치유를 정착시키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는게 한홍구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친일 세력, 군사 독재, 지역감정을 저지른 자들을 청산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그들이 정치 세력화돼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면서 공안검사 출신 국회의원 김기춘 등이 앞장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온라인 상에서 5.18 피해자들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표현으로 폄훼하는 행태나, ‘남편 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이순자의 발언, 윤석열 정부 국가수사본부장 내정자였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의 폭언 등 이제는 청소년 층까지 문제가 이어지면서 트라우마가 전이되는 상황이다.

한홍구 교수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에서 다시 살아나 여순10.19, 제주4.3 학살에 가담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본토에서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이후 5.16 군사반란을 거쳐 정부 요직을 꿰차고 지금까지 곳곳에서 살아남았다. 결국 국가폭력의 가해자는 그놈의 그놈”이라며 한국 국가폭력의 가해 세력은 뿌리가 같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는 폭도들이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다. 과연 어떤 폭도들이냐. 동학혁명, 3.1운동, 일제강점기 의병, 광주 시민군, 6월 항쟁까지, 이들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인물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폭도”라면서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다케, 이승만, 곽영주, 박정희, 차지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같은 인물들이 그들을 폭도라고 불렀다”고 일갈했다.

/ 사진=포럼 자료집
/ 사진=포럼 자료집
/ 사진=포럼 자료집
/ 사진=포럼 자료집

더불어 제주는 “조작 간첩사건의 노천 광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제주 출신들이 조작간첩의 피해를 입었다. 이 또한 4.3으로부터 이어지는 아픈 역사라는게 한홍구 교수의 설명이다.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2차 가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트라우마 치유는 가능할까. 당분간 치유가 안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내성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2차 피해가 왜 나올까? 그래도 되니까 나오는 거다. 유튜브가 생기고 나서는 돈까지 버니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개탄했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폭력 2차 가해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피해를 공유하는 지역 공동체들이 연대하면서 서로를 치유하는 ‘치유의 공동체’를 제안했다. 또한 가해자의 민낯을 알리는 ‘역사의 재판’도 덧붙였다.

역사의 재판은 자신이 10년 가까이 이어가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이다. 공소시효가 없는 역사의 공소장으로 역사의 법정에 세운다는 취지다. 반헌법행위자에는 제주4.3 관련 인물도 포함될 전망이다. 바로 홍순봉 제주도경찰국장(이하 4.3 당시 직책), 송요찬 9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문봉제 서북청년단 중앙위원장, 김재능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 탁성록 9연대 정보참모,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 등이다. 학살의 책임에서는 유해진, 박진경 그리고 미군도 빼놓을 수 없다.

/ 사진=포럼 자료집
/ 사진=포럼 자료집
한홍구 교수.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한홍구 교수.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한홍구 교수는 노태우 아들, 전두환 손자가 뒤늦게 사과하는 모습은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자신들이 손가락질 받는다는 걸 알기에 그 중에서 몇몇이 못 견디고 나오는 것이다. 4.3도 그런 분위기 만들어야 한다”면서 반헌법행위자열전 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홍구 교수는 드라마로도 제작된 미국 소설 ‘파친코’의 한 구절(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를 꼽으며 “원작에서 ‘상관없다’는 표현은 ‘no matter’로 표현됐다. 이것은 좌절하지 않았어, 다시 일어났어 정도의 강한 긍정”이라며 “국가폭력 치유는 센터가 아닌 치유의 공동체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모욕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룰로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을 경험한 공동체들의 서로를 치유하면서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를 품어가야 한다. 그 역할을 제주4.3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4.3트라우마센터에 대해서는 “사회·국가 폭력으로 발생한 트라우마였기에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치유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4.3트라우마 센터는 치유 효과를 검증하고 축적해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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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에서 심리건강연구소 김석웅 소장은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트라우마 피해 사례를 통해 제주가 참고해야 할 점들을 조언했다.

김석웅 소장은 ▲트라우마센터 재원 확대 및 우수전문 인력 확충 ▲전국의 피해자를 아우를 수 있는 국립트라우마센터 분원 확대 설치 ▲세대별, 성차에 따른 트라우마 치유 서비스 ▲사회적 치유를 위한 관련 법제의 구체화와 방안 마련 ▲국가폭력 이후의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상설위원회 신설 ▲국가폭력 피해자의 자긍심 제고와 사회적 지지를 위한 학교-시민 교육의 확대 ▲국가폭력 트라우마의 사회적 치유를 위한 문화콘텐츠 개발 지원 등을 제시했다.

포럼 식전 행사로 4.3 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본인 들이 4.3 때 겪은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제작해 공연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포럼 식전 행사로 4.3 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본인 들이 4.3 때 겪은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제작해 공연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공연을 보며 눈물 짓는 참가자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br>
공연을 보며 눈물 짓는 참가자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한라대학교 이정원 교수는 ▲트라우마 치유와 4.3교육이 ‘공동 목표’ 연계 ▲4.3교육 제도 및 지원 기반과 연계 ▲트라우마 센터 운영 모형과 연계 등을 꼽았다.

토론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찬호 과장은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센터가 향후 두 치유기관과 단순한 연계가 아닌 국가폭력 생존자를 대상으로 한 소중한 치유 경험을 물적, 인적 자원에서 승계해 연속성을 이어가는 방안이 반영되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제주대학교 엄미경 교수는 “4.3 평화인권교육은 피해자 의식과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역사적 기억을 정의하고 전승하는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교과서 기술을 비롯한 각종 자료의 생산과 교육사업의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 평화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시민교육의 관점에서 다양한 사업을 수행해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과제 해결을 담당하는 민주시민 육성 과제, 나아가 전국과 세계 시민교육과 연대해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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