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0) 불나비를 위한 서시

 

 

불나비를 위한 서시

불이 있는 곳은 
속 뜨거운 자들의 꽃밭입니다
웃자란 불면의 촛대엔 밤마다
가난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납니다

턱 낮은 창을 열고 앉으면
어느 유배의 습지대를 지나
임종의 때와 장소를 찾아온 야행의 날개,
한 생애 하향곡선의 끄트머리가 일순
하얗게 떨고 있습니다.

타협 없이 살아온 생애일수록
타협 없이도 죽을 수 있다는 
불의 나라, 꽃의 나라
남아 있는 거라곤 이 시각
동체로 벽을 뚫는 일
불꽃처럼 황홀한 추락입니다
불을 품고 부활하는 날개입니다

자정을 넘긴 촛대엔 눈물이 식고
소리 죽여 이름 한 번 부르는 일
항거했던 자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불이 있는 곳은 속 뜨거운 자들의 꽃밭입니다
빛이 있는 곳은 날개 있는 자들의 고향입니다

동체로, 동체로 벽을 뚫는 일
타협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1990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글쓰기에도 한창나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혈기가 넘쳐흐를 때야말로, 모든 글줄들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한밤 중에 정전되는 경우가 아주 잦았습니다. 그 한 순간 정전이 바로, 이 자유시 한 편을 쓰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준 것이었습니다. 

자정 무렵에 정전이 되자, 서랍 속에 반토막짜리 양초를 꺼내고 불을 켰습니다. 하필 그때 어떻게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는지, 불나비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양초 불꽃을 향해 여러 차례 돌진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날개에 불이 붙고 파닥거리며 떨어졌습니다.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결국 그 움직임이 멎고 말더군요. 

배추흰나비는 꽃밭에서 꿀을 얻지만, 저 겁 없는 불나비는 촛불을 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꽃과 불꽃, 타협과 돌진, 꿀과 분신, 임종의 때와 장소 등등 갖가지 상념들이 떠오르면서 낙서처럼 합당치 못한 시어들이 무질서하게 원고지로 쏟아졌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시는 결코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직한 내 감성의 언어적 표출이었습니다. 그 장황하면서도 즉흥적 감정의 소용돌이를 가감 없이 몸 밖으로 쏟아낸 것이 바로 「이 불나비를 위한 서시」입니다. 이때 powerfeeling이라는 문학용어가 창작현장에 적용되면서, 시 쓰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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