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9) '을묘왜변과 제주대첩', 김석윤·김형훈·오수정·윤성익·현혜경·홍기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연구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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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주연구원

고대 바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루쉰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래 길이란 없었다. 사람이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차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밟아 길이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육지의 길은 능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바닷길을 내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너른 바다를 그저 항해하면 되지 무슨 길이냐고 할지 모르나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옛날 바닷길을 지나는 선박은 서너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정상적인 것은 상선과 어선, 그리고 객선인데, 이외에 비정상적인 것이 있으니 노는 부러지고 닻도 끊어져 하염없이 흘러가는 표류 선박이고 다른 하나는 뱃길의 불청객 해적선이다. 

세간의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은 표류와 해적인데, 표류에 관한 책에 비해 해적에 관한 책은 양적으로 적다. 관심을 가졌으되 참고할 만한 책이 흔치 않으니 그만 내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을묘왜변은 들은 적이 있으나 제주대첩은 생소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무지를 탓해야하는지, 아니면 제주 패스에 발끈해야하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을묘왜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을묘왜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을묘왜변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척으로 일시에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어 달량포達梁浦로 계속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다. 또한 어란도於蘭島, 장흥, 영암, 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왜구를 토벌하다가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 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 왜구를 토벌하고 영암에서도 왜구를 섬멸하였다.”(152쪽에 동일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른다면, 제주대첩은커녕 을묘왜변조차 제주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명종실록』(1555.07.07)에 이미 “영암의 수성守成과 제주의 파적破敵”이라고 하여 제주의 승전을 기록한 바 있으며, 명종 스스로 크게 이겼다는 뜻에서 ‘대첩大捷’이라고 치하한 바 있는데, 어찌된 일일까?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을 읽으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퇴각하던 왜구들은 본토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제주로 다시 침입하였다. 1555년 6월 21일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다는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의 장계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른바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서막이었다.”(152쪽)

인용문에서 말하는 제주 앞바다는 화북포(일명 별도포)를 말한다. 당시 제주 북쪽에는 화북포, 조천포가 도외와 연결하는 포구였고, 비교적 작고 수심이 낮은 건입포(산저포)는 도내 선박이 주로 들고났다. 이렇듯 화북포는 조선시대 온갖 배들이 들고나는 중요 항구였으며, 노봉 김정이 포구 확장 공사를 하다 과로사한 곳이었고, 김정희, 최익현 등 숱한 유배객들이 배소지配所地로 가기 전에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또한 1555년 6월 27일 왜구 1천여 명이 40척의 왜선을 타고 상륙한 곳도 화북포이다. 

그들이 상륙한 후 곧 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간 것은 오로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함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라도 남해안에서 패배한 후 당시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對馬島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로 향한 것은 약탈은 기본이고 전열정비와 더불어 새로운 근거지 확보라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첩大捷의 비결

중국 고대 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남송시대에 편찬한 유가 경전인 십삼경十三經이 있다면, 무인에겐 북송 시절에 편찬한 무경칠서武經七書가 있다. 『손자병법』, 『오자병법』, 『육도六韜』, 『삼략三略』등에서 필승과 필패의 이유와 조건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대의 병법이라고 현대전에 무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손자병법을 배우는 까닭은 한문을 익히기 위함이 아니다. 냉병기 시대든 열병기 시대든 전술, 전략에 공통점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필승 전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을묘왜변의 제주대첩은 김수문 목사라는 유능한 무관과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김몽근 등 군민이 일심동체로 전투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1555.08.10)에 ‘사졸士卒이 한마음이 되어 방비에 힘썼기 때문에 왜적을 물리쳤다(與士卒爲一心, 勤修防備, 盡力措置, 能却賊兵, 其功甚大).’라고 기록된 사실로 알 수 있다.”

말인 즉 사전에 철저한 방비가 있었고, 또한 주장主將과 병사, 관리와 백성이 일심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뜻이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데 감히 누가 덤빌 것인가? 설사 덤벼든다 한들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3일간에 걸친 치고받는 공방전攻防戰 끝에 승기勝機의 전환점이 된 것은 날래고 용감한 ‘효용군驍勇軍’ 70명의 용맹성과 말을 타고 적진으로 치달아 돌격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4인(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와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그리고 화살로 적장을 쏘아죽인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의 활약이었다.(158쪽) 

정로위는 중종 7년(1512년) 처음 설치된 정예군으로 한량 계층 중심의 내금위內禁衛 부대이다. 당시 제주에는 없던 병종이기 때문에 김수문 제주목사가 부임할 때 함께 들어온 군관으로 추정된다.(159쪽) 갑사는 전문 직업군인으로 무예가 뛰어난 자 중에서 선발했다. 정병正兵은 평민 가운데 현역군인으로 복무하는 자를 말하고, 보인은 정군(정병)을 지원하는 평민으로 군역을 맡은 이다. 이렇듯 정로위 김직손을 제외하고 나머지 4명은 모두 제주 출신이다. “관리와 백성이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말이 나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조정은 제주대첩을 이끈 이들을 가상하게 여겨 포상하고 품계를 올려주었으며, 옷감을 하사했다. 명종 11년 여름 기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주 사람 김성조가 왜변을 당하여 후군後軍을 거느린 장수로 남수구에서 적을 패배시켜 ‘건공장군建功將軍’을 상 주었다.”(171쪽)
   
왜구와 해적

해적은 말 그대로 바다의 도적이다. 서양의 바이킹도 해적이고, 동양의 왜구도 해적이다. 해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를 주무대로 삼는 도적을 말한다. 이에 반해 왜구倭寇(또는 왜적倭賊)는 유별나게 키가 작은 일본열도 출신 가운데 바다에서 도적질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 쉽게 말하자면 바다를 무대로 활약하는 일본 도적이다. 구寇나 적賊이나 모두 도적의 뜻이다. 하지만 한자의 특성상 주어 앞에 놓이면 형용사가 되고, 뒤에 놓이면 동사가 된다. 물론 명사로 쓰일 때도 있다. 따라서 ‘왜구’라고 하면 왜가 도적질을 했다는 뜻도 된다. 예를 들어 『고려사』 고종 10년(1223년) 5월조에 “왜구금주倭寇金州”라는 말은 왜가 금주를 노략질했다고 풀이하지만, 같은 책 충정왕 2년(1350년) 2월조에 나오는 “왜구지침, 시차(倭寇之侵, 始此)”는 왜구의 침입이 이로부터 시작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본서의 제1장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의 왜구」, 제1절 「왜구란 무엇인가?」에서 왜구의 의미, 왜구의 시작과 끝 등에 관한 논술을 읽어보면 ‘왜구’라는 말이 일본인 해적으로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350년쯤이며, 조선에서는 1587년(선조 20년) 손죽도損竹島와 선산도仙山島 약탈 사건을 끝으로 종식되었다.(35쪽) 16세기 이후의 바다 도적은 후기 왜구라고 하는데, 주로 명나라 시절 중국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은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일본인들도 있었지만 중국인들이 다수였다. 그렇다면 전기 왜구와 다른가? 본서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가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모두 일본에 근거지를 둔 도적집단으로 노략질과 인신매매 등에 간여했다는 점에서 전기 왜구와 일맥상통한다.(43~44쪽)  

왜구든 왜적이든 모두 해적이다. 해적은 바닷길에서 상선의 재물을 노리지만, 오히려 육지에 상륙하여 노략질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먹고 살기 힘들면 도적질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자莊子․도척盜跖」편에서 도적도 나름의 도의道義가 있는 말이 그냥 우스개만은 아니다. 명대 사람 정약증鄭若曾은 『주해도편(籌海圖編)』(1562년 초간初刊)에서 당시 왜구들이 민간에 쳐들어와 자행한 작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아를 기둥에 묶어 끓는 물을 붓고, 그 아기가 울부짖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즐긴다. 임산부를 붙잡으면 태아의 성별을 내기에 걸고 배를 갈아 확인하는데, 술내기였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니 더럽고 악독하여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본서를 보기 전까지 이는 모두 일본 출신의 왜구가 저지른 일이라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혹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16세기 명나라를 상대로 한 해적 활동의 주체는 주로 중국인들이었다는 발언 때문이다. 당연히 해적이 모두 왜구는 아니고, 왜구가 모두 일본인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구 중에는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어쩌면 한반도 출신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혹자의 주장대로 백제 유민들 가운데 해적이 된 이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성공鄭成功은 중국사에서 명말청초 군인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청조에 저항하며 명조 부활을 도모함)을 위해 싸웠으며, 네덜란드 군대를 몰아내고 타이완을 정복한 군사영웅으로 존중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아비 정지룡鄭芝龍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모친을 둔 해적 출신이다. 

하지만 1937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중국 난징南京에서 일어난 대학살(난징대학살)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으며, 일본인 일부는 그 역사조차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명대 중국 해안에서 벌어진 일 역시 그들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왜 그들은 자꾸만 감추고 지우려고만 하는가? 그리하여 화려한 기모노와 산뜻한 옛 거리, 정적靜寂의 정원과 다소곳한 다도茶道, 꼼꼼한 잔기술과 치밀한 계획성 뒤에 침탈의 역사, 야만의 역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왜 자꾸만 상기시키려고 하는가? 왜 자꾸만 지금 그들의 DNA에 그 옛날 왜구가 보여준 잔혹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도록 만드는가?   

제주대첩이 문화콘텐츠가 되어야 하는 이유

앞서 본 바대로 을묘왜변에서 ‘제주대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이 빠져 있으며,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주도지』에서도 외면 받고 있다.(265~268쪽) 이게 웬일인가? 

“평소 경의 충의와 목숨을 나라에 바쳐 북채를 쥐고 죽으려는 정신이 아니었다면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하여 이와 같은 대첩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명종은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이런 글을 내려 ‘제주대첩’을 치하했다. 그런데 어찌 지금의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그의 ‘대첩’을 기억하고 복원하여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무지의 소치인가? 아니면 바쁜 일상에 치여 헤아리지 못하는 무관심일 따름인가?  

필자는 ‘국뽕’(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무조건 한국을 찬양하는 말)이라는 단순 유치하면서도 위험천만한 발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한때 ‘조국’과 ‘민족’에 심취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지닌 편협성과 이기성이 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전파하여 오히려 ‘조국’과 ‘민족’의 순수한 뜻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순신이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혼자 중얼거린다. “오늘 세게 맞았네!”

장두의 목이 날아갔다는 기억만 가진 이들에게 아기장수의 꿈이 어찌 자라날 수 있겠는가? 처절한 아픔과 날선 외침만 가득한 곳에서 어찌 화해와 공존이 가능하겠는가? 우리에겐 꿈과 희망, 자부심과 승리의 기억이 필요하다. ‘제주대첩’이 문화콘텐츠로 거듭 살아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을묘왜변과 제주대첩』 제4장에 「역사문화자원과 콘텐츠」라는 긴 문장의 논문이 실린 이유 또한 이것일  터이다.  을묘왜변을 소재로 그린 벽화가 제주시 이도 일동 제이각 남쪽에 있으며, 제주시 오현교에 을묘왜변 전적지 표지석이 있다고 하니(175쪽) 반드시 가봐야겠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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