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20) 역사적으로 깊은 악연, 늘 경계해야

다만 중국이라는 대국과 잘 지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늘 중국의 의도를 검증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믿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 사진=픽사베이
다만 중국이라는 대국과 잘 지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늘 중국의 의도를 검증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믿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 사진=픽사베이

지난 6월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의 발언이 여론의 분노를 샀다. 그는 대한민국 제1야당 대표를 초빙한 만찬에서 “한국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베팅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자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고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대중 무역 적자는 탈중국화 시도 때문”이라고 말하는 등 한국을 위협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그러면 주중대사의 선을 넘는 이러한 오만무도한 발언을 개인적인 언사로 치부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중국외교부의 국장급에 따르는 일 개 대사가 본국의 훈령이나 허락 없이 겁박에 가까운 막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한국은 과거 조선에서 외교관으로서 무한대의 권력을 휘들었던 이홍장이나 위안스카이가 판치던 병약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이제 세계 경제 10위권에 속한 부강한 나라다. 

중국 대사의 발언은 과거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 살았던 가슴 미어지는 역사를 다시 한번 소환하게 한다. 그의 발언에서 중국 지도자들의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몇 년 전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다. 그뿐만 아니다. 시진핑은 고구려도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폄훼하면서 고구려라는 거대한 역사적 실체를 부정했다. 사실 지난 500년 동안 중국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과거 고구려와 백제는 조선과 달리 중국과 당당하게 싸웠다. 두 나라는 자발적으로 무릎 꿇기를 한사코 반대했던 나라였다. 고구려는 수‧당과 엄청난 전쟁을 치렀고 을지문덕이 대승을 이끈 살수대첩은 수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 이민세는 안시성에서 날아온 독화살을 맞아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고구려를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광대한 영토를 가졌고 절망을 모르던 대단한 나라, 고구려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처럼 가슴 아픈 일이 있겠는가. 당시 당나라 장군이었던 소정방 등이 전후 문제처리차 당 고종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소정방은 ‘고구려는 굴종을 모르는 민족이니 다시 일어설 것이다. 따라서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당 고종은 어른과 어린이 할 그것 없이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들은 노비와 성 노리개로 삼아 치욕적인 삶을 살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죽임을 당한 고구려 백성이 무려 20여 만명이 된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 중 일부는 고구려를 떠나 일본·탐라 등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탐라로 들어온 유민들은 고구려를 잊지 않기 위해서 고(高) 씨 성(姓)을 썼다는 설도 있다. 당 고종은 고구려 국서고에 있는 모든 역사서도 모조리 불태우고 역사적인 현장은 모두 소각시키라고 명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고구려와 백제에 관한 학술적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가 망한 후 소정방의 예측대로 고구려는 장엄한 발해로 부활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나 만주까지 호령하던 고구려가 사라짐으로써 우리나라의 지도는 쪼그라질 때로 쪼그라졌다. 그야말로 대륙 국가가 초라한 반도 국가로 전락했다. 이 줄어든 지도를 누가 그렸나. 그 장본인은 김유신과 김춘추다. 이 두 사람은 현실 권력에서는 이겼지만, 민족적 관점에서는 역사의 큰 죄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고려도 몽골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나라의 간판을 조선으로 바꿔 달았다. 그 후 중국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부터 1895년 시모노세키(하관)) 조약 때까지 500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지배했다. 조선은 무력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알아서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서 들어간 나라였다. 조선의 왕은 왕(王)이라 칭하고 제(帝)라고 부르지 못했다. 신하들도 왕을 ’폐하‘라 부르지 못하고 ’전하’라고 불렀다. 두 나라 간의 분명한 서열이 정해졌다. 이로써 조선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가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중국을 문명의 표준으로 삼고 그 외의 나라들은 야만의 나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철저하게 조선 정치지도자들의 의식을 점령했다.

이러한 세계관에 반기를 드는 지적인 작업은 전부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임을 당했다. 친중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다. 그는 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명복을 비는 사당(만동묘)을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의 묘비에 죽은 날짜도 이미 세상에 없는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쓰도록 했다. 조선이 망한 후 3.1운동을 주도한 33인 중에 유림 대표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위정척사파의 영향 때문인가.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 500년 동안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서 온갖 고초를 꺾었다. 

일본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중국에는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었다. 조선의 왕은 중국의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고 매년 중국에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등이 다 휘었다. 중국 사신의 횡포는 논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의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다 떨었다. 그 기간에는 외국인은 장안에서 얼씬도 못 했다. 예컨대 그 당시 인질로 한양에 압송되어 귀족층의 자제를 상대로 광대놀이를 하던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도 남한산성으로 유폐되어야 했다. 중국 사신들이 혹 조선이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오해를 할까 두려워 알아서 내린 조치였다. 중국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자들이 조선에 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의 왕이 직접 나가 영접하던 곳이 지금 서대문에 있는 영은문(迎恩門)이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1894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중국이 패함으로써 조선은 500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사실상 지배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당시 조선을 독립시켜 준 꼴이다. 그리하여 서재필 박사 등이 주축이 되어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세웠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도 독립문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부끄러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이 중원을 통일하여 강대한 힘을 가졌을 때 한반도는 수많은 고초를 꺾었다. 한나라 대 조선(고조선)이, 당나라 대 고구려가, 원나라 대 고려가 사실상 망했다. 발해의 멸망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냉철하게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안목을 키우는 것이 역사의식이다. 시진핑의 집권 이후 중국은 G2 국가가 되었다. 그야말로 미국과 힘을 겨루는 상대가 되었다. 시진핑이 집권하자 그는 감췄던 발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4년 베이징에서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공산당 기관지는 당나라 때 많이 썼던 ‘만방래조(萬邦來朝)’라는 아주 오만한 표현을 썼다. 세계의 여러 나라가 조공을 바치러 중국에 온다는 뜻이다. 이 슬로건을 통해 우회적이지만 화려했던 당제국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중국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몽이란 중국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이 누려온 동아시아의 패권적 지위와 영화를 되찾고 주변국들이 중국에 복종하는 신형 조공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수립한 당주석 임기제, 후임자를 미리 정하는 격대지정 제도 등 민주적 절차를 다 없애버렸다. 홍콩, 티베트, 위구르 등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대만의 미래도 예측불허다. 아마 러‧우크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중국과 대만 관계가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러‧우크라 전쟁에서 힘으로 현상을 변경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는 세계 양심 세력들의 연대에 의해서 좌절될 것이다. 그 결과가 중국에 주는 교훈은 자못 클 것이다. 중국은 이제 모택동 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다. 일당독재, 개인 우상화, 법치 말살, 민주화 시위 대대적인 탄압 등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 그런 나라가 힘만 있다고 세계의 존경받는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중국몽의 허상도 벗겨져야 한다. 중국이 주로 개발도상국에 선심 쓰듯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도 대상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한 경제식민지 전략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나라들의 도로·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자비로 포장된 차관이 중국으로부터 공여되지만, 무상원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광업권 등을 담보로 한 유상 원조다. 인프라 건설에 드는 노동력, 건설자재, 기술 등은 전부 중국에서 가져다 쓰기 때문에 관련국에는 떨어지는 이득도 별로 없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된다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 조달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도 자원개발권을 담보로 엄청난 차관을 중국으로부터 빌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앞으로 러시아 경제가 중국에 예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 

사드 사태로 인한 한한령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제주도의 국제화는 곧 중국화나 다름없었다. 당시에 중국 자본과 중국 관광객이 밀물처럼 제주로 몰려왔다. 그러나 제주의 풀뿌리 경제에 선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른바 중국 특유의 폐쇄적인 가두리 관광방식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제주도에 오는 중국 관광객이 중국 자본이 세운 식당, 호텔, 쇼핑센터, 토산품 점 등만을 제한적으로 이용하니 제주경제에 미치는 확산 효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카지노 시설에 오는 중국 도박꾼들도 현지 결제방식 등 중국 편향적인 가두리 틀 안에서 돈을 쓰고 가니 그 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못하다. 그야말로 제주판 일대일로 정책이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중국 자본은 물론 중국 관광객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국인에게는 땅을 팔길 거부하는 나라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국 관광객이 없으면 제주 관광은 다 죽을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상 사드, 코로나19 범유행 과정에서 중국 관광객은 급감했지만 제주공항은 여전히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까지 중국의 영향권 하에 두기 위한 교두보 확보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나온 중국이 어떻게 호주의 정치·경제. 문화계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분석한 책(글리 이브 해밀턴, 중국의 조용한 침공, 2021 세종서적)은 주목해볼 만하다. 이 책은 중국 자본이 호주(중앙과 지방에 관계없이)의 정·관계는 물론. 언론·시민사회 인사들까지 뇌물 등으로 부패·포획시키는 과정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왜 저자가 책 제목으로 ‘침공’이라는 표현을 썼느냐 하는 것이다. 중국이 호주의 정치·경제‧문화 등에 침투해서 그쪽 인사들을 철저하게 중국의 영향권 하에 묶어 두려는 작업이 마치 전쟁의 치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그런 표현을 썼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전쟁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전쟁관과 아주 다르다. 중국은 전쟁을 초한전(超限戰)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한다. 여기에는 군사적 수단과 민간영역의 구분이 없다.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군사 안보 영역을 벗어나 민간영역을 총동원하고 특히 IT 기술을 이용한 컴퓨터 해킹, 정보 탈취, 무역전쟁, 금융전쟁, 뇌물…. 가용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동원해 전쟁을 전개하는 전술 개념이다. 군사적 싸움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계 등에서 중국이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도 군사적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전쟁개념이다. 그 방법으로 호주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뇌물, 정치자금 등을 공여한다거나 중국 자본의 원활한 사업권 확보에 반대하는 정치인, 언론인, 관료, 시민사회 대표 등에 대해서는 협박, 공갈, 창피 주기, 매수 등을 가한다. 이런 방식이 전부 다 전쟁의 수단 개념이다. 

이 개념의 뿌리는 중국인의 경전인 수호전이나 모택동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전쟁과 비전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회색지대 개념을 주목해야 한다. 마 웬 이라는 세계적인 중국 기업가도 공산당원인지,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인지 구별이 어렵다. 중국의 거대한 IT 기업인 샤오미의 주인도 중국의 정보기관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참 믿을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외국 시민들이 중국에 대한 논의와 인식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설정한 틀 내에서 사유, 논의되도록 유도하는 것도 전쟁의 주요 개념이다. 이른바 한국의 일부 대학에서도 설치·운영되고 있는 공자학원이 그러한 역할을 부수적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현지에서 시민권을 확보한 중국인을 내세워 사회단체를 장악하게 하거나 지방. 중앙 정치인으로 선거에 당선되도록 재정지원 등의 공작도 서슴지 않는다. 호주에서는 중국 자본의 장학생으로 성장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된 예도 있다. 최근 보도로는 중국 대사가 주재국에서 식당을 가장한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예도 꽤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식의 공작정치는 중앙·지방을 막론하고 중국의 이권이 걸려 있는 곳에서는 광범위하게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주도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간 많은 성취를 이뤘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많은 나라가 독립되었지만, 그 나라 중에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에 들어간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과거 몽골이 세계 패권 국가였던 시대에 40년을 항거한 나라는 고려밖에 없다고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몽골은 고려를 두고 대단한 나라라고 했다. 중국에 여진족 등 과거 수많은 종족이 있었지만, 그 많은 종족이 오늘날 문자와 문화를 잃고 한(漢)족에 흡수된 후 흔적도 없이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반하여 중국의 뒤통수에 있는 우리나라는 끝까지 우리말과 우리글, 작은 땅이지만 영토와 우리 문화를 지켰다. 대단한 한민족(韓民族)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때문에 우리나라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특히 중국이 통일하여 강대국이 되었을 때 더욱 그랬다. 이제 한국은 중국에 쫄 정도로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다만 중국이라는 대국과 잘 지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늘 중국의 의도를 검증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믿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축적된 힘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의 힘은 군사력, 경제력과 문화력을 포괄하는 총체적 신개념이다.

나는 중국의 장래를 크게 밝게 보지 못하는 편이다. 현재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양극화, 민족문제, 도농 간의 큰 격차, 점점 커지는 시민사회의 세력, 노령화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또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야수적 자본주의 행태, 패권적인 힘의 과시로 국제사회에서 점점 왕따가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의 MZ세대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오래된 이야기다. 미국 카터 정부 시절에 백악관 대통령 안보 수석보좌관을 지낸바 있는 세계적인 석학 브레진스키는 생전에 중국은 향후 몇 개의 지역으로 쪼개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시간은 사회과학자를 망신시킨다’라는 말도 있지만, 의미 없는 진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미래가 어떻든 우리나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몇 년 전인가 중국이 몽니를 부린다고 한국의 대통령이 베이징까지 날아가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산봉우리’라며 몸을 낮췄는데 이런 식의 비굴한 자세로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송시열 등 친중 사대주의자들이 조선을 스스로 소중화로 자처하면서 조선이 처한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했으나 그 결과는 파당적인 원리주의 고착화와 조선의 참담한 멸망이었다. 


#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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