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4) 서문공설시장 고군자 어르신 ②

서문공설시장의 작은 순댓집, 진경순대의 고군자 어르신(1940년생, 구좌읍 평대리 출신)께서 순대를 만들어 팔아보겠다고 처음 생각한 시기는 어르신의 나이 26세였다. 어르신이 만든 순대는 맛이 좋아 입소문이 퍼졌다. 동문시장에도 보내고 식당에서도 어르신의 순대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어르신이 지금의 순대 맛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스물다섯 넘고 83년 진경순대 하기까지 누구를 뵙지도 않고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나의 생각대로 만든 거야. 어떵하면 (최고의 순대로) 도달하게 맛있게 할까. 이 직업이라는 것이 얼른 설르지 못해. 서울 당면순대는 쫀득쫀득 하거든. 우리가 제주에서 먹던 식으로는 쫀득쫀득한 맛이 안 나와. 그 쫀득쫀득한 서울 전문 영업소는 특허가 있겠지. 제주에서도 어느 순대집은 육지 올라가서 특허를 사왔다고 하데. 나는 글을 배우지 못해서 그것을 못해서 한이 맺혀. 그래서 이렇게 꾸준히 내가 만들어 보며 하다보니 (세월이) 넘어가는 거지.”

어르신께서 식당을 운영하며 순대도 갓 만들기 시작했을 때가 1965년 즈음인 것으로 보인다. 식당을 시작하고 진경순대를 열기까지 이십여 년 가까이, 맛있는 순대를 만들기 위해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제주 전통 방식의 메밀가루와 보릿가루를 넣어 만든 피순대는 어르신 세대의 입에는 너무나 맛있었지만 육지 순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경한 음식이었다. 어떻게 하면 쫀득거리면서 맛있는 맛을 낼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긴 세월동안 어르신의 삶의 경험과 무수한 시도 끝에 개발한 맛이 지금의 진경순대 좌판에 깔려 있는 순대들이다.

/ 사진=김진경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긴 세월동안 어르신의 삶의 경험과 무수한 시도 끝에 개발한 맛이 지금의 진경순대 좌판에 깔려 있는 순대들이다. / 사진=김진경

조천에서 식당을 하시다 서문시장에 터를 잡은 때가 1969년. 서문시장에서 처음 식당을 한 자리는 지금 위치는 아니라고 하셨다. 바로 서문다리 아래서 장사를 했다. 김치 장수, 두부 장수 모두 다리 아래 있었다. 1969년 제주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해, 어느 할머니가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실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 이후 지금의 자리인 다리 위로 올라왔단다. 그때 함께 터를 잡은 이웃 상인들이 지금까지도 40년 이상 시장을 함께 지키고 있다고 말하셨다.

“시장의 한 명 아는 아이는 가이가 6살에 이디 서문시장에 왔는데, 그땐 다른 할망들도 다 2층에 판잣집 지어서 살았어. 근데 가이가 지금 마흔두 살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기서 식당 하주게. 우리끼리 겅 골앙 웃었주게. 여기 순대(진경순대) 막창순대는 내가 직접 개발한거라. 껍데기 얇은거(소창)는 주로 잔칫집에 들어가는 거거든. 큰창자인데 얇아. 당면순대는 쏠(찹쌀) 안 들어가고 당면만 넣은거야. 벨아벨 걸 다 넣어봐도 쫀득쫀득 안했어. 거 참 이상해. 아니 뭘 넣어야 쫀득쫀득해서 맛있을까. 평생 그것만 생각했던 거 닮아. 나중엔 그거였어. 아무 재료나 막 넣으면 안 되는 거구나.”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경순대는 기본적으로 메밀가루와 보릿가루를 쓴다. 메밀가루와 보릿가루 모두 예전부터 가지고 오는 곳이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순대에 들어가는 재료는 거짓으로 넣으면 절대 안된다고 강조하셨다. 여기에 꼭 쓰시는 과일이 있다. 어르신이 마트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며 고른다는 ‘이 과일’에 따라서 순대 맛이 많이 좌우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좋은 걸로 본인의 눈과 손으로 직접 고르는 과일이 들어가야 진경순대의 맛과 식감이 결정된단다. 

신선한 돼지피에 메밀가루와 보릿가루. 마늘, 양파, 대파, 생강, 고추 등의 야채도 첨가된다. 이 베이스에 찹쌀 혹은 당면을 넣기도 하며 두 종류의 순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제주에서 창도름이라고 불리는 막창에 찹쌀을 넣어서 만드는 순대까지. 고군자 어르신의 50년 넘는 세월의 레시피가 담긴 진경순대의 순대들이다.

그 중에서 창도름으로 만든 순대가 가장 비싸다. 돼지에서 많이 나오지도 않거니와 막창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순대보다 공이 더 들어가기도 해서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만큼 쫀득거리면서 베지근한 맛이 일품이라 가격은 제일 비싸지만 창도름순대를 찾는 단골들이 많다. 그 다음 얇은 껍질들로 만든 찹쌀순대와 당면순대는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 두루두루 사 가신다 했다. 어르신이 창도름순대가 가장 비싸다고 해서 얼마나 비싸길래 그렇게 말씀하시나 싶었는데, 만원 어치를 사가는 손님의 접시를 보니 순대가 넘쳐흐를 정도로 수북이 쌓아주고 계셨다. 고군자 어르신의 손끝에서 썰리는 순대와 포장대에 올라간 순대 접시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표정은 오랜 단골 순대 가게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설레임의 미소가 옅게 번져 있었다.

"꾸준히 나만의 레시피를 연구했어. 어떻게 하면 맛있을까 뭘 넣으면 좋을까 늘 생각하면서 만들었지. 남들은 저렴한 재료 넣을 때 나는 좋은 것만 넣으려고 했어" 인터뷰 中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꾸준히 나만의 레시피를 연구했어. 어떻게 하면 맛있을까 뭘 넣으면 좋을까 늘 생각하면서 만들었지. 남들은 저렴한 재료 넣을 때 나는 좋은 것만 넣으려고 했어" 인터뷰 中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우리가 식당을 할 때 세무서가 여기 근처에 다 있었어. 뭐 경찰, 법원, 병원 다 여기 있어났주게. 순댓집 허가를 내랜 하니까 우리가 이름을 세무서에 가서 입력을 해야 하는데 우리 아저씨가 순진하주게. 나한테 전화 오길래 ‘상호 이름을 뭐로 고르카’ 하는거라. 우리 애기아빠에게 ‘아무거라도 고릅서게’ 하고 말 하난 진경순대가 된 거주. 아들 이름이 진경이어서 진경이었어.”

당연히 여자 이름이라고 생각해 따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상호라고 생각했는데 아드님의 이름이었다는 반전과 함께 왜 이렇게 오랜 단골이 많으시냐는 내 질문에 어르신의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 순대 좋앙 사주면 고맙고 안사주면 말고. 나는 엿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거짓말 하지 않고 놈 속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정리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지. 거짓말하면서 넘기려고 하지 않고 꾸준하게 고대로만 살면 돼요. 그런 생각을 늘상 가지면서. 그냥 나름대로 손님이 오시면 고맙고. 사람이라는 건 생전 단골이 없어. 사람이 젤 얌사스러워. 믿었던 나무도 팽 길 수 있고. 사람이라는 것은 무서워서 늙어 가면 입은 닫고 손은 떼어야 돼. 곧고 싶은 말 다 골으멍 살 수는 없거든. 2004년에 순대집하다 다쳤을 때도 일 년 동안 고생했는데 어떻게 속상해도 그냥 그런가 해야지. 내가 막 비관하면 안 돼. ‘어떤 요령으로 삶을 헤쳐 나가면서 살까’ 그런 생각을 해야지, ‘나는 왜 이럴까’ 비관하면 안 돼. 그러면 사람이 더 피곤해져. 자기 자신을 항상 낮춰야 돼. 겅 해가면 내가 마음이 울적하면 괴롭고 하니까 얼굴에 표현이 나와 버려. ‘내가 왜 그러지, 놈들한테 초라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다 보면 그냥 내가 사는 것도 동글동글 사는 거지.”

진경순대에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오는 이유를 어르신의 말씀에서 찾았다. 인생을 살며 타인에 의한 나의 평가에 집중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내 자신의 삶의 기조를 가지며 사신 고군자 어르신의 가장 큰 인생 철학. 바로 정직함과 꾸준함, 그리고 삶에 대한 낙관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아닐까. 늘 배우지 못한 것이 마음속 가장 큰 짐이셨음에도 비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과 꾸준함이었다.

“우리 순대 좋앙 사주면 고맙고 안사주면 말고. 나는 엿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거짓말 하지 않고 놈 속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정리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지.” / 사진=김진경
“우리 순대 좋앙 사주면 고맙고 안사주면 말고. 나는 엿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거짓말 하지 않고 놈 속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정리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지.” / 사진=김진경

그 결과가 바로 이 서문시장의 조그마한 순댓집. 진경순대다. 어르신의 늘 한결같은 삶의 태도는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찾아와주는 한결같은 단골손님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어르신이 손님들에게 지어주시는 미소. 이 미소는 단순히 장사를 하기 위해 짓는 미소가 아니고 83년 넘게 살아오신 어르신의 삶을 대변해 주는 어르신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유독 어르신의 미소가 작위적이지 않고 편안해 보인다고 느꼈는데 아마 이 곳을 찾아 주신 손님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진경순대의 쉬는 날은 없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정해서 집에서 쉬는 것보다 그냥 시장에 나와 버리는 것이 훨씬 마음도 몸도 낫다고 하셨다. 문을 닫는 시간도 따로 없다고 했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오시고 시장에 손님 발이 끊기면 들어가신다고 했다. 늦게라도 시장에 왔다 순대를 못 사고 가는 손님이 있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오로지 쉬는 날은 시장 상인 모두가 문을 닫고 쉬는 명절뿐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군자 어르신은 서문시장에 터를 잡고 시장에서 한평생 사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0년 제주중학교 근처로 집을 지어 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어르신이 기억하고 계신 나이 57세였다. 내 집보다 시장이 더 편하고 익숙한 곳일 수 밖에 없었다.

“집 짓고 딱 들어갔을 때 나 열심히 살았다고 만족하지 않았어. 아니,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질 않았어. 집만 있는 것뿐이지. 내가 집 지어서 이사 한 연도는 내 기억 속에 떠나지 않아. 왜냐면 난 글보다 기억이 더 강해. 서문시장은 잘도 오래되었어.”

서문시장이 공식적으로 개장한 해는 1954년 11월 13일. 고군자 어르신이 시장에 들어온 해는 그로부터 15년 후인 1969년이다. 곧 일흔 해를 바라보는 서문공설시장에 고군자 어르신의 세월의 깊이도 54년째 담금질하고 있다. 어르신은 이 시장통을 지켜오는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내 집보다 시장이 더 편하고 익숙한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은 이 시장통을 지켜오는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내 집보다 시장이 더 편하고 익숙한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이 시장통을 지켜오는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내 집보다 시장이 더 편하고 익숙한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김진경

지금은 순대 공장들이 많이 생겨서 예전에 거래했던 거래처들도 분산되기도 했지만,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그저 자식들과 함께 순대를 만들며 진경순대를 좋아해주고 찾아주시는 손님들에게 줄 수 있는 현재가 다행이고 좋다. 다만, 동문시장처럼 서문시장도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찾아주면 좋겠다고 말하신다. 그래서 어르신은 그저 묵묵히 매일매일 나와 가게를 비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신단다. 언제 손님들이 많이 올 줄 모르는데 한산하다고 가게를 닫으면 다른 상인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거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시장을 둘러보니 조금은 한적한 시장통이지만 문을 닫은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 곳 시장 상인 분들은 늘 언제나 이렇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너무 바빠졌어, 너무. 나도 어떨 땐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지. 그런데 여기 상인들 모두들 안 쉬어. 그러니까 같이 나와서 힘을 보태는 거지. 그게 생활이 되었어. 우리가 살다 보면 너무 약고 너무 짜고 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못 살더라고. 돈을 벌어져도 거만해지면 안 되는데, 겅은 말아야 하는데 하며 살아. 악착같이 돈을 벌어도 소용없어. 죽을 때 칠성판 하나만 들고 가는데 뭐. 우리 인생 가는 길에 가져가는 것은 그거 하나밖에 없어. 엿날 할머니 때부터 하던 말 ‘죽을 때 칠성판 하나만 들고 갈거. 무사 겅 욕심냄서.’ 나는 그저 내가 가는 날까지, 순대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시장에 나오려고 해.”

한적한 제주의 시장통 안, 작은 체구의 팔십대 중반의 할머니가 전해주는 삶의 가치와 이야기는 나에게 묵직한 울림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고 경쟁하며 사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과 비교는 인생을 사는 데 걸림돌만 될 것이다. 나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를 위해 건강하고 거짓 없이 사는 삶. 작고 가까운 것부터 감사함을 느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나는 고군자 어르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곳 서문시장 상인 분들은 늘 언제나 이렇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사진=김진경
이 곳 서문시장 상인 분들은 늘 언제나 이렇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사진=김진경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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