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시어터 ‘중섭, 빛깔 있는 꿈’

두텁다고 보기 어려운 제주 연극계에서 ‘두근두근시어터’의 존재감은 자타공인 남다르다. 제주에서 유일한 ‘가족·어린이극 전문 극단’으로 활동하며 멋진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 명성은 제주 밖까지 떨쳤는데, 올해로 35회를 맞이하는 아시아 최대 인형극 축제 ‘춘천인형극제’에 이번까지 3년 연속 초청 받는 기염을 토했다. 제주 안에서는 가족극 후발 주자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됐다.

두근두근시어터의 올해 신작 ‘중섭, 빛깔 있는 꿈’은 여러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원치 않았던 어려운 여건에서도 동력을 지켜온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흥미와 여운을 남기는 작품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후배·동료 연극인들과의 협업을 시도하며 어엿한 제주 연극계의 한 축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3일부터 5일까지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중섭, 빛깔 있는 꿈'의 출연진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중섭, 빛깔 있는 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제주와 인연이 있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을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대사가 거의 없는 융복합 비언어공연, 즉 ‘이미지 놀이극’으로 제작했다. 

작품은 두 명의 이중섭의 시선을 따라간다. 한 명은 검정색 옷을 착용한 미래의 중섭, 다른 한 명은 갈색 옷을 착용한 과거의 중섭. 두 인물은 복장과 함께 나이도 차이를 뒀다. 

작품 시작과 함께 애잔한 표정을 지닌 미래의 중섭은 허공에 붓질을 하고, 그에 맞춰 과거의 중섭과 가족이 등장한다. 과거의 중섭 가족은 소박한 차림일지언정 행복하다. 두 자녀는 티격태격 하지만, 중섭과 그의 아내 마사코는 행복하게 바라본다. 중섭과 아이들은 비행기 타기, 자전거 태우기, 기차놀이 등 대사 없는 몸 놀이로 행복했던 서귀포 생활을 그린다. 

이중섭 가족의 추억은 각종 오브제를 통해 극대화 된다. 특히 커다란 흰색 천은 표현이나 내포한 의미 모두를 아울러 백미로 꼽힐 만 하다. 무대 전체를 덮고도 남을 커다란 천이 펄럭이는데 이중섭의 자녀들은 그 안을 오간다.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천은 바다, 자녀들은 물놀이 임을 알 수 있다. 흰색 천은 무대 가장 안쪽에 있는 마사코의 앞치마로부터 시작한다. 두근두근시어터의 대표작인 ‘할머니의 이야기치마’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곧이어 천은 객석으로 향하면서 빔프로젝트로 이중섭이 그렸던 게, 나비 등을 등장시킨다. 어린 관객들은 머리 위 천을 채우는 그림을 신기하게 마주한다. 

어린이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내는 효과적인 연출을 더하면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가족 사랑의 메시지를 압축시킨 인상적인 장면이다. 특히 물놀이를 끝내고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천으로 보듬으면서, 이내 천을 길게 모아 무대 한 가운데를 갈라 전쟁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아픔을 짚어내고, 황소 머리로도 활용한다. 미래의 중섭이 현실의 중섭에게 종이배를 전달하면서 마지막 이별로 이어지는 구성까지 물 흐르듯 매끄럽다.

작품은 고독하게 숨진 이중섭과 ‘아이’ 인형의 환상 장면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아이’는 이중섭 작품에서 등장하는 실제 자녀 태현, 태성을 상징하는 그림을 본떠 만든 인형이다. 두근두근시어터는 ‘아이’ 인형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키에 배우 두 명이 머리, 팔, 다리를 움직이도록 제작했다. 아빠 이중섭이 오매불망(寤寐不忘)으로도 모자랄 그리움으로 편지마다 그려 넣은 자녀들은 인형을 통해 구현됐다. ‘아이’를 껴안고 볼을 비비고 발을 만지면서 간질이는 중섭의 행동은 현실성을 더한다. 작품 속에서 중섭은 가족과 이별할 때 종이배를 전해준다. 환상 속의 중섭은 종이배로 황소 얼굴을 접어 ‘아이’와 즐겁게 장난친다. 이별의 상징이 원 없이 이어질 자녀와의 사랑으로 재활용되는 연출 역시 인상 깊다.

이후 작품은 ‘아이’와 게, 물고기, 나뭇잎, 꽃잎 등을 조합하는 장면을 상당부분 보여준다. 이것이 이중섭의 실제 작품을 참고했다는 사실은 작품 사진을 띄우는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시킨다.

이처럼 ‘중섭, 빛깔 있는 꿈’은 두근두근시어터가 설명한 대로 “신체 표현, 오브제, 미디어 콘텐츠가 짜임새 있게 넘나드는 융복합 비언어 공연”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놀이를 비롯한 몸동작부터 한 손에 드는 크기에서 배우 여럿이 협동하는 크기까지의 다양한 소품, 무엇보다 어린이 관객의 흥미를 때마다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면서 동시에 동년배 부모 관객들의 감성까지 다가간다. 여기에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한 이중섭의 인생과 실제 작품을 기반으로 제작한 오브제들로 인해 이중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객이라면 더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이중섭을 소재로 한 오페라, 뮤지컬 등과 비교해도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다.

작품 속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지고 난 뒤, 은지화 작업을 한다. 무대에서는 손바닥 위에 펜을 잡고 있는 듯 손으로 그리는 연기를 통해 은지화 작업임을 보여준다. 바지 주머니나 안쪽에서 실제 은박지를 꺼내거나 아니면 꺼내는 동작만이라도 더한다면 공감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사족을 더해본다. 이중섭 사망 이후 ‘아이’ 인형이 각종 소품과 합을 맞추는 부분은 이전 가족 장면과 비교했을 때 다소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 전반부에는 가족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반부는 이중섭의 작품에 주목했다고 이해할 대목이지만, 나뭇잎 부채춤까지 등장시킬 필요 없이 조정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게, 물고기, 나뭇잎, 꽃잎을 순서대로 하나씩 보여주기 보다는 차라리 한데 모이는 방식은 어떨까 싶다. 까마귀 장면에서는 까마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대가 어두웠다.

이번 작품은 강지훈, 고건하, 김소여, 김은정, 김현주, 조성진이 출연진으로 참여했다. 조성진, 김은정은 두근두근시어터와 이전에도 함께하며 호흡을 맞춰왔다. 마지막 장면에 짧게 등장한 무대스태프 김지은까지 덧붙여 나머지는 청년극단 RED, 가람, 예술공간 오이 등 제주 안에서 활동해온 젊은 연극인이다. 협업은 인력 풀이 협소한 지역 연극계의 한계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작품은 젊은 연극인들에게는 대사 연기가 아닌 몸짓 연기에 방점을 맞춰 역량을 키우는 기회로, 두근두근시어터는 활동의 동력을 보존하면서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작품 연출은 유홍영이 맡았다. 유홍영은 2004년 제주 자파리연구소와 함께 이중섭 공연 ‘화가 이중섭 제주이야기’를 연출한 바 있다. 그때 역시 여러 오브제를 활용한 이미지극으로 제작했었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을 보면서 2004년을 떠올리는 관객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중섭, 빛깔 있는 꿈’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1.4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제주 서귀포에 도착한다.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대단히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가는 슬픈 이주가 태반이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해가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의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

모든 것이 궁핍했고 1년도 채우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이중섭 가족의 서귀포 생활. 두근두근시어터의 ‘중섭, 빛깔 있는 꿈’은 부족했지만 진심으로 가족을 아꼈던 한 예술가를 통해, 가족 사랑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구구절절한 대사와는 또 다르게 몸짓과 소품을 통해 감정에 다가간다.

몇 년 전 두근두근시어터 주축 구성원이 활동을 멈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극단 멤버들과 연관 있는 회사에도 우려할 만 한 일이 벌어졌다. 객관적으로 봐도 희소식과는 거리가 멀기에 염려가 커지기 마련. 그럼에도 단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공백을 충분히 채우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중섭, 빛깔 있는 꿈’은 본인들이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주 유일 가족·어린이극 전문 극단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올해도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활동할 두근두근시어터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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