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2) 독짓는 늙은이처럼

 

독짓는 늙은이처럼

물 불 마다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땅만큼 하늘만큼 우여곡절을 다스려온
부처님 이목구비의 옹기 한 점을 뵙습니다

만삭의 항아리를 밤새도록 쓰다듬으며
뜨거운 열손가락 지문까지 물려받은 
또 한 점 검붉은 살갗이 독신처럼 늙습니다

당신의 손바닥엔 바보들만 산다지요
목 짧은 토우들의 분절 없는 아우성 속에
늦도록 옹기를 굽는 조선 노을이 서럽습니다

/ 2010 고정국 詩 

/ 사진=고정국<br>
/ 사진=고정국

#시작노트

자연읽기, 자아읽기, 고전 읽기, 세상 읽기는 오래도록 유지해오고 있는  나의 필독 4종의 고집스런 항목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체험에는 반드시 하나의 지혜가 따른다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체험에는 한 편의 시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시 쓰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0년이 저물 무렵,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 추진위원회에서 옹기에 관한 시조 한 편을 청탁해 왔습니다. 순간, 고교시절에 읽었던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가 떠올랐고, 독 짓기와 시조 짓기의 유사점, 거기에다 내 삶의 일면이 겹치면서 어렵잖게 이 작품을 써낼 수 있었습니다.

「독짓는 늙은이」가 단순히 한 도공陶工에 대한 삶의 애환을 그린 내용 같지만, 주인공 송 영감의 비탄과 분노 속에는, 민족 항일 말기의 암담한 시대상이 연상되기도 하는 작품이어서, 시조 제목도 「독짓는 늙은이처럼」 으로 했습니다. 

이제 눈 감고 돌을 던져도 시가 되어 돌아오는 나이, 생의 계절은 어느새 성찰省察이라는 거울 하나를 내밀고 있습니다. 

어느 무덥던 날 해질 녘, 나의 산책코스인 도두봉에 올랐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도두봉 정상에서 노을 속에 가라앉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말과 글로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몸짓으로, 또는 침묵으로 주고받기도 합니다. 수평선과 구름 사이로 해가 스며들면서, 가마 속 그 옹기들이 내뿜는 분절 없는 열기가, 노을 속에 아우성처럼 들려왔습니다. 이 나이토록 ‘시조라는 옹기’를 굽는 제 심경을 작품 속에 그려보았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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