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4) 밤의 정형시(定型詩)

 

 

밤의 정형시(定型詩)

선한 자의 울음소리가 풀숲에서 들려온다
마지막 가는 여름에, 여태 쓰지 못한 시를 
“또르르” 귀뚜라미가 
정형시를 쓴단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병든 세상의 소식들을 
저들도 이탓저탓 밤 노래로 시름을 풀며
어젯밤 불렀던 노래를 
다시 꺼내 부르며

풀벌레 시작법에도 각운(脚韻)은 반듯하다
“찌르르”로 시작해서 “찌륵찌륵” 마무리 짓는…
보폭(步幅)을 나도 모르게 
그 리듬에 맞춘다

/ 2013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자연 가까이 기거하면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노라면, 문밖의 강아지 방귀소리는 물론 아주 미세한 곤충의 발자국  소리도 헤아릴 정도로 귀가 맑아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있는 하늘 아래에는 밤에 우는 것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 소쩍새 소리, 고양이 소리 등등, 결국 저들은 따로따로 분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과 오순도순 한솥밥 먹고 살면서 “아직도 이 땅에는 밤에 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라며 귀띔해주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언어를 자연의 언어로 통역해 올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를 우리의 언어로 받아쓰는 자가 시인인 셈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이 땅 산천초목이 이땅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농민들은 이미 시인들이며, 도시 사람들은 돈을 주고도 향유할 수 없는 자연과의 고차원적 교감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졸시 「밤의 정형시」는 굳이 시작노트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독자분들께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귀로 보고, 눈으로 접해 듣는, 병든 이 세상의 각종 소식들’을 대하면서, 어젯밤 불렀던 노래를 다시 꺼내 부르며 시름을 푸는 풀벌레 소리가 요즘들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짜릿짜릿 열나흘 밤, 열아홉 살 달님이 뜨면
달빛에 감전된 풀들이 반금속성 소리로 울었고
잠결에 파고 들어와 갈비뼈 하나를 조르던 녀석.
-「그리운 귀뚜라미」

 
또 하나의 <가을 다큐>…, 열나흘 달빛이 풀잎에 닿으면,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나 한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보입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 빛깔을 보기만 해도, 살갗에 짜릿짜릿 닭살이 돋습니다. 주변 풀숲에서 제 짝 하나를 꼬시려는 수놈 귀뚜라미도, ”찌릿찌릿, 찌릿찌릿“ 반금속성 소리를 낸답니다. 이 계절엔 가끔 이불속에 귀뚜라미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따서 만들었다는 ‘이브’가 ‘아담’에게 그때 갈비뼈를 자기에게 직접 달라고 조르는 것 같습니다. 

2004년 8월 마지막 날, 금악리 작업실에서 있었던 공감각적 심리 현상을 단시조로 노래했던 졸시 「그리운 귀뚜라미」입니다. 그냥 읽고 ‘픽’  한 번 웃고 지나치시기 바랍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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