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사진=1998년 9월 제주에서 열린 제79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 참석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사진=1998년 9월 제주에서 열린 제79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 참석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정치인들에게 결단은 중요한 의무이자 능력이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모이고 충돌하는 통치 현장에서 유능한 결단은 뒤엉킨 상황을 풀어가는 해법이 되기도 한다.

나치 정부에 부역했던 칼 슈미트는 국가 존망과 같은 예외상황에서는 통치자가 내리는 결정이 중요하다며 결단주의 정치이념을 전파한 바 있다.

통치자가 내리는 결단이 타당성과 합리성을 확보하는 데는 국가 존망과 같은 예외적 상황이 필요했다. “지금은 위기다. 이 상황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며 위기 상황 만들기는 결단주의 전조다.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고 초헌법적 권한을 누린 박정희 정권도 다르지 않다. 정치적 혼란 극복과 조국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국가 목표로 내세우며 유신헌법을 강제했다.

지금도 우리는 또 다른 결단주의 정치를 쉼 없이 경험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법원이 내린 일제 강제동원 배상 판결까지 무력화시키는 제3자 배상 해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일관계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정상화를 위한 결단이라 포장한다.

예외상황 만들기와 결단은 더 노골화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며 마치 당장 나라가 뒤집힐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비상상황을 설정했으니 당장 언제 어느 곳에서 공산전체주의 소탕 작전을 벌일지 모른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설치는데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일본 핵 오염수 방류도 지지하고 독촉한다.

정작 당사자는 거부하는데도 일본 강제동원 기업들이 물어야할 배상금을 우리 기업 기부금으로 대신 물겠다고 한다. 또 이를 당사자들이 거부하자 법원에 공탁까지 하려한다. 

이게 모두 비정상인 한일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결단이니 받아들이라 말한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도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관계 정상화 노력은 국민의 이익,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며 내린 고독한 결단"이라며 거든다.  

통치자나 정치인에게 결단은 중요하다. 하지만 통치자가 내리는 결단은 민주적 절차에 취약하고 다수 주권자를 배반할 위험이 있다. 예외상황에서 벌어지는 예외적 결단은 수많은 주권자들의 뜻을 배제하면서 마땅히 누려야할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고 박탈하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권은 민주정치를 운영하는 핵심이자 침해받지 말아야 할 권리다.

우리나라 헌법에 따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에 따라 개인의 인격권, 행복 추구권에는 개인의 자기 운명 결정권이 전제된다.

개인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권으로써 자기 결정권을 누린다면 지방자치단체도 주민 자치와 단체 자치권을 누린다.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관계 속에 지역주민이 누리는 자기 결정권은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를 이루는 꽃이다.

하지만 지방자치 시행후에도 자치단체가 누려야할 자기 결정권은 중앙정부로부터 제약받으며  반쪽짜리 지방자치란 오명을 받아왔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은 자기결정권, 자치권 확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자치권 강화를 내세운 제주특별자치도도 중앙정부 결정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제주 제2공항 건설 과정은 취약한 자기결정권을 말해준다. 제주 제2공항 건설은 제주 지역 사회와 도민들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며 불가역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도민들은 자기결정권에서 멀어져있다. 

2015년 11월 제2공항 예정지 발표도 중앙정부가 도민 모르게 했으며 추진과정에서도 도민들은 배제된다. 도민 사회는 대립과 갈등에 빠져들었으나 이를 해결할 도민 자기결정권은 힘을 잃었다. 아니 스스로 포기해 버린 자기결정권이다.

지난 2021년 어려운 과정을 거친 끝에 도민의 뜻을 묻는 찬반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도, 당시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여론조사 결과를 무시한 채 제2공항 추진을 강행하며 도민 자기결정권은 포기당했다.

도정을 이어받은 오영훈 지사는 여러 차례 제2공항 해법으로 자기결정권을 원칙처럼 내세웠다. 

하지만 이제 도민들은 오 지사에게 제2공항을 둘러싼 자기결정권은 아직 유효한가 묻는다.

지사 취임후 1년여 시간이 지나는 사이 국토부는 전략환경영향평가 환경부 동의를 이끌어냈다. 국토부는 또 지난 3월에는 제주도에 제주 2공항 개발사업 기본계획(안) 보고서를 송부하고 의견 제시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는 여론조사상 더 많았던 반대 의견은 커녕 도민 대다수가 바라던 주민투표 요구조차 무시했다.

오 지사가 내세우던 도민 자기결정권은 지난 14일 열린 도지사와 시민단체 간담회에서 사실상 의미를 상실했다. 간담회에서 시민사회 대표들은 가장 큰 현안인 제2공항 건설에 대해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했다. 하지만 오 지사 답변은 법적 한계 호소와 추진과정에서 검증 약속이 고작이다.

제2공항에 대한 기본계획이 고시되면 도지사로서는 주민투표조차 요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향후 환경영향평가 동의절차 과정에서 충분히 검증하고 논의하는 시간이 올 것”이라며 환경영향평가 절차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이는 환경영향평가 제도 특성과 경험을 볼 때 제2공항 건설 추진 의지와 다름없는 얘기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환경피해를 최소화하는 기능이다. 환경영향평가 심의 결과도 원안동의나 조건부동의, 재심의로 나뉜다. 환경영향평가서가 부실하고 환경 피해가 아무리 크다 해도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재심의가 전부다. 그러다 보니 몇 번 재심의 절차를 거치면 결국 환경영향평가를 통과한다. 도의회 동의도 절차에 그칠 뿐이다. 그러다보니 개발사업에서 환경영향평가가 제동을 건 사례가 없다.

그런데도 정작 주민투표를 비롯한 도민 뜻을 반영하는 해법 찾기는 포기한 채 환경영향평가 절차에 기대는 것은 궁색할 뿐이다.

더욱이 도민을 대표하는 도지사임에도 권한이 없다는 말은 상실감을 남긴다. 제주 미래를 결정하는 엄중하고 중요한 일인데도 정작 도민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처지다. 

지난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4주년이었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던 시절인 2009년 6월, 서거하기 두 달전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새롭다. “하려고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 김효철 논설위원(곶자왈사람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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