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 사진전 관객와의 대화
“제주돌담은 소중한 존재, 기억하고자 촬영”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의 사진전 연계 행사인 관객과의 대화가 26일 오후 큰바다영에서 열렸다. / 이하 사진=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의 사진전 연계 행사인 관객과의 대화가 26일 오후 큰바다영에서 열렸다. / 이하 사진=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돌과 돌담, 나아가 제주돌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서는 ‘제주돌챙이’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특별한 사진전을 열었다. 전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서민생활연구자 고광민은 “조환진 대표를 비롯한 제주돌챙이들은 돌담으로 제주다움을 남기는 예술가”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조환진은 26일(토) 오후 3시 제주 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에서 사진전 ‘머흐러지민 또시 다우곡’에 따른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가졌다. 이번 전시는 조환진이 2014년부터 촬영한 제주 돌담, 돌챙이 흑백 사진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 제목은 ‘무너지면 다시 쌓고’라는 뜻의 제주어다.

조환진은 제주시 한림읍 출생으로 제주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99년 생각하는정원에서부터 돌을 만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제주대학교 사진동아리에서 시작했다. 김영갑 사진가를 만나서 사진을 배우고 돌담 일도 경험했었다. 현재 돌빛나예술학교를 운영하면서 돌담 쌓기 교육 등 돌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관객과의 대화는 특별히 ‘제주 생활사’의 저자 고광민 선생이 참여해 짧은 강의를 덧붙였다.

고광민은 “예로부터 제주 돌담은 크게 밭담, 집담, 산담(무덤)으로 나뉜다”면서 “제주에서 한라산, 산방산 등은 돌산이라 나무를 심었고, 360여개 오름은 화산재로 이뤄진 흙산이기에 나무에 적합하지 않아 풀을 키웠다. 국가가 제주에 전략적으로 국마장을 세웠고, 제주 백성들은 농사를 위해 소를 키웠다. 다른 방목 문화 지역과는 다르게, 제주는 고정된 정주여건이면서 가축은 방목하는 흔치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방목지와 비방목지를 구분하기 위해 돌담을 세웠다”고 제주돌담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요약-설명했다.

고광민 선생은 제주 돌담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제주의소리
고광민 선생은 제주 돌담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제주의소리

고광민은 “그런데 제주 행정이 밭담만이 세계중요농업유산이라고 지정하는 바람에 집담과 산담은 허멩이가 돼 버렸다”면서 “이제는 돌담이 무너져도 세울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 고유한 제주돌담 대신 반듯하게 쌓은 담만 남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제주 백성들은 돌멩이 하나도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런 배경에서 조환진 작가가 제주돌담을 주제로 여는 사진전은 크게 축하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조환진은 자신이 돌챙이로 살아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질의응답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가 50년 동안 돌챙이로 살아오셨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난 돌챙이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아버지 역시 별 말이 없으셨다”며 “출산 이후 건강이 나빠진 아내를 위해 돌집을 짓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2005년부터 3년에 걸쳐 돌집을 지었다. 그때부터 어찌하다보니 돌챙이로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환진은 제주돌챙이의 변천사도 풀어 설명했다. 일단 제주4.3 때 마을이 불에 타고 축성 작업도 하다보니 돌챙이가 많이 필요해졌다. 그 뒤에는 본격적으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방풍용 돌담, 저장 창고를 만들어야 해서 직업적으로 돌 쌓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시멘트와 규격화된 벽돌이 널리 보급돼, 제주돌은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면서 돌챙이 일도 함께 줄었다. 그러다 2000년대 즈음 제주 이주 열풍이 불면서 주택 건설도 덩달아 활성화돼 이곳저곳에서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조환진 대표. ⓒ제주의소리

조환진은 “은퇴했던 돌챙이들이 그때 복귀하기도 했다. 돌담 쌓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면서 “농사는 땅이 필요한데 돌 일은 자기 몸만 건강하면 가능하니, 타 지역 출신들이 제주에서 돌 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조환진은 돌담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문화도 여럿 소개했다.

그는 “옛날 제주에서 돌집을 지을 때는 돌담 먼저 쌓고 그 다음에 목수가 와서 지붕을 올리고 집을 지었다. 돌챙이들은 가장 먼저 돈을 받고 빠져나왔다. 그래서 돈 못 받을 일도 거의 없고 대우도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집을 다 짓고 나서 가장 마지막에 울타리를 쌓으니 집주인 형편에 따라 돌담 규모가 줄어들기도 하고 비교적 돈 받기가 어려워졌다”면서 “언젠가 한림 옹포에서 식당을 갔는데 식당 주인이 날 불렀다. 따라가 보니 돌챙이에게 돌담을 맡겼는데 형편없어서 금세 무너졌다고 내게 하소연을 했다. 반대로 단단하게 잘 세워진 돌담들은 ‘누구네 아버지가 쌓은 담’, ‘누구네 할아버지가 쌓은 담’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돌담 하나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말했다.

조환진은 사진 작업 뿐만 아니라 올해 이탈리아,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등에서 열리는 해외 돌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제주돌문화를 알리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제주의소리
40년 경력의 각자장 고정팔 씨(오른쪽). ⓒ제주의소리

그는 전시 홍보물에도 “돌챙이 김창원 형님을 비롯한 여러 돌챙이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뿐만 아니라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40여년 동안 돌에 글씨를 새겨온 돌챙이 선배 ‘각자장(刻字匠)’ 고정팔 씨를 먼저 소개하는 등 동료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예의를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돌에 대해 궁금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돌챙이의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문화원과 함께 옛 돌챙이 어르신 구술 기록 등을 정리한 책 ‘제주돌챙이’을 올해 펴냈다”고 설명했다.

특히 “취미로 찍던 사진은 결혼과 함께 여건이 마땅치 않아 전부 정리했다가, 2014년부터 다시 찍기 시작했다. 제주 돌챙이들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서 알려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제주 해녀와 비교하면 돌챙이에 대한 관심이 너무 낮아서,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해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일하러 갈 때 틈틈이 한 장씩 찍고 있다”며 앞으로도 제주돌챙이와 돌담을 세상에 알리는데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전시장 풍경. ⓒ제주의소리
전시장 풍경. ⓒ제주의소리
작품 사진. ⓒ제주의소리
작품 사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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