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5) 구월

 

구월

볕살이 눈치 슬슬 꼬리 내리는 비포장 길
복날을 겨우 넘긴 똥개들의 머리를 쓸며
황록색 춘추복 입고
매부 오듯 구월이 오네

길섶에 강아지풀이 늘 배고픈 한국의 구월
물난리 도열병 씨름도 이쯤해서 허리를 펴면
새참 술 논두렁 위에 
허수아비 콧등이 붉어

팔순을 자로 잰 듯 굽힌 만큼 파먹고 살던
굽은 등 자벌레 노인이 요양원에 실려 간 지금
수확기 한 달을 넘긴
끝물 고추가 서럽게 탄다

/ 2000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구월은 그 어휘만으로도 묘한 서글픔을 느끼게 합니다. 여름과 가을의 중간에서 이미지의 하향곡선이 시작되는 사람의 일생으로 본다면 장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계절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땅 모든 초목들도 춘추복으로 갈아입으면서 단풍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넉넉한 것 같으면서도 배가 고프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때도 어쩐지 슬픈 노래를 선곡하게 하는 것이 구월입니다. 하늘과 땅, 계절과 계절, 사람과 사람,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등의 이러한 접점에는 고독이 서리게 마련이고, 구월은 그 고독이 서서히 살갗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20년 전 필자가 농업잡지를 발행할 때, 전국 과수주산지 취재를 위해, 호남 쪽 순회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내다보며 메모지에 끄적였던 내용을 시조 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그때 나의 교통수단은 마을마을을 경유하는 완행버스를 택했답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한반도의 서정과 서사가 있으며 나처럼 나이 먹는 농촌의 실상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볕살이 슬슬 꼬리 내리는 비포장 길, 복伏날을 겨우 넘긴 똥개들의 모습 그리고, 논밭이나 산 쪽에서는 차츰차츰 춘추복으로 갈아입고 단풍을 준비하는 자연의 모습, 그리고 허수아비 들판을 지나 다시 군내버스는 이미 수확시기 한달쯤 늦어버린 고추밭을 보면서 이미 80대가 돼버린 농촌풍경을 바라보면서 만난 시대적 언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훌쩍 왔다가 훌쩍 가버렸던, 어린시절 나의 매부들처럼 우리나라의 이월과 구월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벼 포기 쓰러진 논 한가운데
허수아비 헛것처럼 
서 있다

벼는 쓰러져 깨어 있고, 
허수아비 선 채 
자고 있다

참새 서넛 어이없어 
그냥 간다.

-「가을소묘 3」 전문

나주에서 해남으로 가는 완행버스 창밖으로 태풍과 호우를 견디다 못해 쓰러진 논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새 서넛이 그 논밭 위를 지나면서 짤막한 시대풍자의 자유시 한 편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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