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82) 홍성익 저, 가와세 슌지 인터뷰, 조승미 옮김, ‘그림의 길, 음식의길’, 논형, 2021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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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벗어난 지 80년이 되어가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의 국가체제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제 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해방을 맞이했으나, 식민지 이전에 존재했던 한반도 전역의 온전한 나라를 세우지 못한 우리는 진정한 독립에 이르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해방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계지배 질서 재편이라고 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얻은 해방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반쪽짜리 독립은 곧 남북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이 끝난 지 7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분단극복의 길은 멀게만 보인다. 

이렇듯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며 흔들리고 뽑혀나갔다. 왕조에서 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기는 했으나 무능하고 타락한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겼고, 조선의 사람들은 일본제국의 식민으로 전락했다. 국권을 잃은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백성들은 일제 식민지의 2등 국민으로서 생존권을 유린해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특히 살기 위해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옮겨야하는 강제이주, 즉 이산의 고통은 다수의 식민지 사람들이 겪은 아픔이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조선 사람들은 만주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 도서 곳곳으로 떠나야했다. 수십만의 조선인들이 흩어져 다시 만난 곳에 조선동포사회가 생겨났다. 일본에서도 곳곳에서 동포들의 삶터가 꾸려졌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오사카의 이쿠노구이다. 지금도 수십만의 재일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쿠노구는 제주도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식민지시대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오사카에 다수 정착했고 탄탄한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그러나 4.3학살을 거치면서 살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의 저자 홍성익의 부모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재일교포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 여기 홍성익이라는 제일 교포 2세의 삶과 예술이 있다. 제주시 건입동 출신의 선친 아래서 태어난 홍성익은 제주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삼는 재일동포 3세이다. 오사카 이쿠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제주4.3을 겪은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의 선친은 해방 후 제주도로 귀국했다가 4.3의 격랑 속에서 다시 오사카로 돌아갔다. 어머니 또한 4.3학살의 현장 경험을 안고 오사카에 정착한 피해자다. 그의 부모님은 노점상을 하다가 떡 제조사 덕산(도쿠야마)물산을 창립했다 가업을 물려받은 홍성익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사업을 벌였다. 떡과 냉면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일본과 북한에서 왕성하게 사업을 추진했다. 

‘그림의 길, 음식의 길’이라는 책 제목은 그의 삶이 걸어온 두 갈래 길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친구 가와세 슌지가 인터뷰를 맡아 정리한 이 책은 음식 관련 사업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담은 회고록이다. 그의 삶과 사업과 예술은 재일조선인사와 한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냉전시대를 살아온 재일동포이다. 전 지구에 걸친 냉전은 남북 사이만이 아니라 일본 조선동포 사회 내부에서의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홍성익은 이 대립의 사슬을 끊고 남북을 오가며 사업가로 활동해왔다. 지난 수십 년간의 평화 국면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신 냉전의 기운이 돌고 있다. 홍성익이 사업가로서 남북을 오간 것은 평화 시절의 일이었다. 

홍성익은 다시 냉전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 간절한 평화의 염원을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삶은 사업에서 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을 관통한다. 일본의 조선대학 미술학과를 마치고, 오사카시립미술연구소를 수료한 그는 1980년대 일본 화단의 촉망받는 신진이었다. 1987년 태평양미술회상, 1988년 문부대신상, 1990년 야스이상 등 당시 주목받는 청년작가로서 활동했다. 20년 동안 사업에 전념하던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쿠노 코리아타운 출신 화가’ 홍성익은 재일조선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들의 삶의 애환과 통일 열삼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과 재일조선인 차별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그는 청년의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사업가 이전의 구상회화에서 사업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추상회화로 바뀌었지만, 한평생을 걸어온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토대로 한 예술세계의 일관성은 그대로다. 그는 조선인 차별에 맞서 동포사회를 이끌어온 재일조선인이다. 나아가 제주4.3과 광주5.18 그리고 남북통일의 열사를 이야기하는 해외동포이며, 한국의 음식문화를 일본과 남북에 펼치며 사업을 벌여온 경영인이고,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전쟁과 국가폭력, 이념을 앞세운 대립과 갈등, 분열의 시대를 넘어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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