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7) 삼십초에 쓴 시

 

삼십초에 쓴 시

비 그치자 풀벌레 소리 
석 섬 분량이 쏟아진다

물에 불린 滿月이 
산창 밖에 떠오른다

천지간 백금가루가 
만석쯤은 
쌓인다

/ 2006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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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도로 우측으로 차를 세우고 문을 여는 순간, “왁자자…,” 풀벌레 소리가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저들 풀벌레들도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기필코 제 짝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소나기가 지나간 직후여서 더욱 그런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빗물에 흠씬 부풀린 보름달이 솔숲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솔잎과 풀잎 끝에 맺힌 주변의 모든 물방울들이 달빛에 반짝반짝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멀리 남원 위미 쪽 우리 동네에 아롱아롱 추석준비로 따뜻해진 불빛, 그리고 남녘바다 집어등 불빛, 소나기 그친 깨끗해진 밤하늘 한라산 정상에서 곱게곱게 빛나는 별들, 이처럼 물기 머금은 세상 전체가 빛과 시와 사랑의 노래로 꽉 차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운전대 서랍에 시첩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백금가루 넘쳐나는 광경을 받아 적는 데는 삼십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단시조라지만 30초에 시조 한 편을 쓰다니… 글 쓰는데 뜸 들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내가, 시속 일백팔십 킬로로 휘갈겨 버리다니! 이 광경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물영아리오름’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너무 마음 쓰지 마!” 하고 반말 투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조의 제목 찾기가 여간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어느 눈 펑펑 내리는 날에, 윤동주 시집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처럼 어려운데/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다니...”라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쓴 시」를 읽었습니다. 이 두 문장의 시를 읽고서야, 나도 고민을 멈추고, 그냥 「삼십초에 쓴 시」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러자 3장 6구 12음보 마흔다섯 글자가 일제히 “차라리 그게 좋은데요.”하며 저마다 제자리에서 반짝거렸습니다.

그리고 그 며칠 후 밤늦도록 청탁받은 원고에 몰입하다 창문을 연 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었습니다. 

바라만 보고서도 깊어질 수 있다 그랬지

눈물자국 말끔히 씻긴 장맛비 한 달 만에

불 끄자 사뿐히 건너와 머리맡에 웃는 달 

- 「그녀」 전문

「삼십초에 쓴 시」에 고마움의 표시로 창밖 달님이 예쁜 시 한 편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그 달님은 제목을 <달>이라 하지 말고 반드시 「그녀」로 정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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