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83) 듣기의 윤리, 김애령 지음, 봄날의 박씨, 2020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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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부터 의사 국가시험에는 기존의 필기시험 외에 실기시험이 도입되어 시행 중이다. 실기시험은 의사가 갖추어야 할 역량 중에서 객관식 문항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영역을 위한 것으로,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면담하고 신체 진찰을 하여 진단과 치료 계획을 세우는 능력과 응급처치나 상처 관리, 채혈 등의 기본진료술기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실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환자 역할을 할 사람과 모형이 필요한데, 살아 있는 환자 역할은 표준화 환자(standardized patient, SP)라고 불리는 훈련받은 연기자가 담당하며 이들이 직접 평가를 하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환자와 치료적 관계를 맺는 능력, 즉 환자와 좋은 유대 관계를 맺고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적절하게 질문하고 답을 끌어내는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인간적인 소통 능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인데, 이런 훈련이 덜 되어 있는 학생들을 위해 면담 기술을 속성으로 가르치는 연기 학원도 있다고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 연기하는 법까지 배워야 한다니…. 선배 의사들이 책이나 족보를 달달 외워서 시험을 치고 의사 면허를 취득했던 것에 비하면 요즘 젊은 의사들에게는 정말 다양한 역량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환자와 면담을 잘하는 법을 연기처럼 배우게 되면 정말 인간적인 의사가 되는 걸까? 분명 나처럼 의과대학 시절 그런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선배 의사에 비하면 훨씬 더 나은 의사소통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의사소통 능력이 속성으로 배우고 연습해서 갖추어야 할 하나의 기술로만 여겨진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인간적인 소통을 실현하는 데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궁금증을 품고 있을 때쯤 운 좋게도 이 책 ‘듣기의 윤리’를 만나게 되었다. 듣는다는 것, 그것도 ‘잘’ 듣는다는 것이야말로 의사가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는 첫걸음 아니겠는가? 더구나 현대 의료가 모종의 윤리 원칙에 따라 틀지어져 있다면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도 당연히 어떤 윤리적 특성이 담겨 있지 않을까?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삶을 살아낸다. 우리는 파편적인 경험을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로 엮어가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해 나가면서 통일성을 지닌 전체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또 이렇게 자신을 설명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삶의 특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이해를 통해 세계 안에서 소통하고 성찰할 수 있는 한 명의 행위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결국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말한다는 것은 즉자적이고 직접적인 소리로 자신을 표출하는 것을 넘어 특정한 사회적 질서 안에서 의미 있고 성숙한 언어로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는 정체성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현재에 대한 직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에 기반한 이야기는 분절되어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화 작용에 노출되어있는 만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 없다. 따라서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구성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통해서 형성되는 정체성, 즉 서사 정체성은 “말하는 사람의 자기 경험에 대한 해석이며, 우리가 자기 삶을 어떻게 주제화하는가를 보여주는 구성적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실증성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삶에 부여하는 의미이며, 우리에게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는 것 못지않게 그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참되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는 ‘진정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경험을 언어화하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언어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재현할 수 없으며, 이야기는 특정한 서사적 틀을 통해서만 경험을 재현할 수 있다. 더구나 어떤 경험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절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나치 수용소 경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또 자기 삶에 대해 진정성 있게 하는 말이라 해도 우리가 그것을 들을 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언어와 말하기를 통한 경험의 재현 불가능성과 번역 불가능성은 듣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두 번째는 자기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공적 공간에서 발화하는 행위 주체로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계급이나 카스트, 젠더 등에 의한 위계에 종속된 인도의 기층 민중, 즉 서발턴(subalter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권력에 의해 공적 공간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명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권력 문제를 해결하여 언어를 되찾게 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듣기의 윤리는 타인이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저 잘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선 듣기는 들리는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의 바깥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것, 말하지 못한 것,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침묵까지도 헤아려 들으면서 쉽게 예단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고 응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듣기는 ‘초대의 환대’가 아니라 ‘방문의 환대’가 되어야 한다. 

초대하는 것은 나의 영역에 타인이나 이방인을 들여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초대는 내 집의 주인인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를 ‘조건부 환대’라고 부른다. 이런 조건부 환대는 나의 영역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쉽게 혐오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또한 주인의 관습과 법률을 따르지 않거나 손님에게 부합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타인이나 이방인을 배척하게 된다. 결국, 초대는 주체 중심적이어서 원리상 자신을 배반할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반면에 방문의 환대는 전적으로 타자 중심적이다. 그것은 기대하지도 않고 예견하지도 않은 완전히 낯선 타인이나 이방인의 방문에도 조건 없이 열려 있는 환대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절대적 환대’라고 부른다. 절대적 환대는 “주체의 조건과 상황, 가능성의 영역에서 타자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의 도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절대적 환대가 실현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호적인 타자가 아닌 위험한 타자도 조건 없이 수용하는 것은 주체에게 커다란 위협이 된다. 내가 심하게 상처 입을 가능성을 무릅쓰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법적·제도적 측면에서도 쉽게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악한 이방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절대적 환대를 통해 극복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방인이 악으로 표상되는 체계이다. 이방인에 대해 주체가 내리는 선악 판단에는 이방인에게 이미 부여된 존재론적 특성이 개입하고 있다. 따라서 주체는 이방인에 대해 자신이 내리고 있는 판단이 정말 윤리적인지 절대적 환대의 이념에 따라서 계속 성찰해야 한다. 절대적 환대의 이념은 매 실천 속에서 “성찰적 지침이자 포기할 수 없는 원리”로 일관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절대적 환대는 실현되기 어렵다. 그것은 주체가 이방인을 환대하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 분명한 자기 거점을 마련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주장을 버려야만 하는 근본적인 난제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난제가 불러일으키는 긴장이 절대적 환대를 지속해서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며, 절대적 환대가 정의의 이념과 맞닿게 되는 지점이다.

현실에서 절대적 환대를 실현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은 정의를 요구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주체에 깃들어 있는 타자성 때문이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언어, 신체, 타인과 같은 여러 층위에서 나 아닌 타자성이 개입한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를 포함한 타인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생존하기 어렵고, 성장 과정에서 주체의 바깥에서 이미 확립된 언어 규범을 습득하지 못하면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취약한 존재인 인간은 삶의 여러 국면에서 타자의 개입에 의존하며 그런 개입은 주체 안에 다양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나 아닌 타자를 품에 안고 있는 불투명한 주체들은 서로의 취약성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돌봐야 할 책임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취약한 존재들 서로에게 요구되는 절대적 환대로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정치적 측면에서는 억압과 지배, 구조적 부정의가 목소리를 잃은 자들의 말을 왜곡하고,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말할 권리를 일종의 재화처럼 공정한 절차에 따라 배분하기만 하면 저절로 소외된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억압과 지배의 관행과 구조 속에서 그들은 이미 말할 능력을 상실했거나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환대의 듣기가 성립하려면 권리의 분배 못지않게 구조적으로 정의롭지 않은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공유하면서 서로 연대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절대적 환대가 정치적으로 정의와 연결되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의료 현장에서 아픈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통증을 언어화하는 환자 자신도 그 경험을 모두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을 듣는 이는 말할 것도 없다. 듣기의 윤리는 이야기로 발화되는 우리의 경험에 녹아 있는 타자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잘 헤아리면서 들으라고 가르친다. 또 의료인은 통증과 고통의 경험 주체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환자의 지위를 인정하고 환대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학적 선입견으로 환자의 이야기를 재단하여 왜곡하는 일을 피하려고 애써야 하며, 환자와 마찬가지로 의료인 자신도 자기 경험을 완전히 이야기할 수 없고 질병과 노쇠에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환자가 말할 수 없게 하는 현대 의료의 구조적 부정의가 존재하지는 않는지, 만약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책임감을 느끼면서 아픈 이들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단지 기술로서의 듣기가 아닌, 존재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진정한 듣기의 윤리일 것이다. 

아주 가끔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게 되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내게는 이 책 ‘듣기의 윤리’가 그런 종류의 책이다. 현대 철학의 굽이굽이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거나 여전히 남기고 있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책은 분명 머리로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책에 가깝다. 그런데 저자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뭉클해진다. ‘공적 공간에서 거주하고 말할 권리를 빼앗긴 타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잘 듣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사려 깊다. 그 과정에서 같이 질문하고 응답하는 경험을 통해 듣기에 담겨 있는 깊은 철학적, 윤리적 의미를 성찰해 보는 즐겁고도 무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덤으로, 의료인을 포함해서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있는 이들이라면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과 태도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 황임경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박사.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팬데믹,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공저),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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