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8) 추석날 대로변에–시조스토리텔링

 

추석날 대로변에 – 시조스토리텔링

암만해도 나의 가을은 바다에서 오는가 봐
구월 이십육일에야 ‘덥다’ 소리가 멎은 올해
뒤집힌 속을 보이며 바다 여기 왔구나

산에서 내려온 억새꽃의 하얀 물결
이호 바다 복판으로 떼를 지어 달리더니
북서풍 파도를 타고 내 가슴을 덮치네

폭염과 가뭄에다 꽃의 기회를 놓쳐버린
늦여름 호박순이 한길까지 뻗어 나와 
한가위 술에 취한 채 비틀대고 있었지

때마침 나도 그때 술기운이 오를 때라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소주병을 깠더란다
지나던 사람들 모두 부럽다고 하던 걸

호박줄 끌어다 앉혀 술 마시는 나를 보고
전깃줄 제비들이 자꾸 시비를 걸어와서 
“지지지 배배배배배” 생트집을 잡는 밤

“야 인마, 제비들아 니들 강남은 언제 가냐?”
“제주가 너무 더워 그냥 여기 눌러 살 거야!”
다문화 베트남 여성이 제집 주인이란다

두둥실 떠올라서 한복판을 밝히는  달
이야, 이 친구들 나도 함께 끼면 어때?
달님도 계급장 떼고 맞장 뜨고 앉았지

달아달아 밝은 달아 시인이랑 노는 달아
꽃 한 번 피우지 못한 이 설움을 사람이 알까?
어느새 호박 줄기는 목이 받혀 있었고

연휴가 너무 길어 술값이 거덜 났어!
카드 연체 걱정 끝에 아내 카드 훔쳐 왔다는 
또 하나 친구가 운다, 술에 약한 달맞이꽃

돌담 밑 귀뚜라미 저도 함께 자리 한다
귀뚤귀뚤 귀뚜라미 여태 짝도 못 구한 녀석
별소리 코맹맹이로 밤늦도록 울었지

순찰 중 폴리스 카가 홍 청 등 뱅뱅 돌리면서
우리 옆에 멈추고서 한참이나 살핀 끝에
달님이 내미는 잔을 주저 없이 받던 밤

그리고 딱 일 년 만에 추석은 또 다시 와서
행여 그 술친구들, 다시 왔나 들러본 거기엔
불그레 호박덩이만한 달이 익고 있었지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체험, 사유, 인식, 그리고 쓰기>라는 ‘고정국의 민들레 필법’에서는 다양한 체험과 그에 따른 새로운 발상 그리고 전혀 다른 접근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 만원은 일원짜리 엽전 일만 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조 1만 수 쓰기’ 과정에서 ‘一萬’이라는 수의 개념은 일원짜리 엽전 일만 개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 일만이라는 장성 쌓기에 필요한 ‘쓸거리’를 모색하다가 시조형식의 틀에다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을 끼웠던 것이 오늘 소개되는 이 작품입니다. 앞으로 종종 ‘이야기 시조’가 우리 독자 분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저마다 요즘처럼 힘든 세상을 살면서 그냥 픽 하고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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