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17) 35년 전의 기억처럼 한결같은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

고희영 누나.

대학 1학년 1986년에 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시를 잘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 입학하면 시 잘 쓰는 선배와 친해지면, 더불어 나도 시를 쓸 수 있으리라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시창작 동인 활동보다 훨씬 진도가 빠른 방법이 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문학과 선배 중에서 시를 잘 쓰는 사람을 은밀하게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물꽃의 전설’ 현순직 해녀와 고희영 감독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물꽃의 전설’ 현순직 해녀와 고희영 감독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시(詩)는 어느 날 불쑥 써지지 않아!

그 해 4월 초, 서귀포 돈내코 청소년 수련원에 MT를 갔습니다. 밤에 조별로 텐트 안에 빙 둘러 앉아 국문학과에 걸맞게 주제를 설정해서 소설을 이어나가는 놀이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 조에는 지금은 은퇴한 김병택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한 사람씩 차례가 넘어가면서 어느새 시인 지망생의 주제로 번져 있었고. 어느새 제 옆까지 왔어요. 까만 뿔테 안경에, 어깨를 덮는 단발머리를 한, 2학년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던 여자 선배의 차례가 되었어요. 그 선배는 시인 지망생의 마음을 담아 독백했습니다.

“시는 어느 날 불쑥 써지지 않아!” 

낮고 작고 감정의 파고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습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어요. 그때 교수님이 한 마디를 했습니다. 

“시는 불쑥 쓰이지 않는다? 역시 희영이네…”

그때 저는 드디어 시를 잘 쓰는 선배를 찾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 선배다!’ 맞습니다. 누나였습니다. 저는 그 날 누나를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시는 불쑥 쓰이지 않는다’는 누나의 독백과 ‘역시 희영이…’라는 교수님의 말 중, 어디에서 나의 목적을 떠올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한 누나와 역시라고 인정을 해 준 교수님의 말은 너무나 합리적으로 시를 잘 쓰는 선배라는 추측이 가능한 구도였으니까요. 

영화 ‘물숨’의 주인공 임화 해녀입니다. 출연자와 생활하며 자연스러움을 담는 것이 고희영 영화의 특징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영화 ‘물숨’의 주인공 임화 해녀입니다. 출연자와 생활하며 자연스러움을 담는 것이 고희영 영화의 특징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아 이 선배다!’라고 점 찍은(?) 후, 누나는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해에 누나는 우리 대학 문학상에 ‘고망다끄내’라는 시로 시 부문 당선을 했어요. 제주시 용담동을 흐르는 개천 ‘고망다끄내’가 시간이 흘러,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정경을 담담하게 써 낸 그 시에서 자기 부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와는 다른 시적(詩的) 시선을 그때 보았습니다. 

내가 고희영 누나와 친해지기를 멈춘 이유

제주시 칠성통 심지에서 우리 학과 시화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누나도 왔었습니다. 다행히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누나는 시를 한 편씩 찬찬히 읽다가 한 쪽 구석에 앉았습니다. 무슨 책인가를 읽고 있었고요.

“저 1학년 강충민입니다. 엠티때 같은 조였습니다.”

무턱대고 누나의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누나는 밝게 내 인사를 받아주었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드디어 제가 쓴 시를 보여줬습니다. 지금도 생각해도 부끄러운 ‘소섬 여자’와 ‘계란’이었습니다. 누나는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말을 했어요.

“음, 내가 시를 평할 위치는 절대 아니지만 ‘소섬 여자’는 첫 연은 좋아. 아쉬운 건 그 다음부터 머릿속으로만 썼다는 느낌이 들어버려. 굳이 우도가 아니어도 되는데 하는… 우도를 직접 가서 실제로 그들의 생활을 봤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계란’의 이 구절 ―나는 왕족의 자손이었다.― 라는 부분과 시상이 전개되는 구조가 전연옥의 ‘멸치’와 너무 닮았어. 표절이라고 할 정도로…. 습작을 할 때는 여러 시도를 해 보는게 좋지…. 이럴 땐 차라리 주를 달아서 전연옥의 ‘멸치’의 구조와 전개를 인용했다고 하는 것도 방법이야. 이 시를 정식으로 어디 투고할 거는 아니잖아. 습작 때는 여러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좋지.”

아. 전 누나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흡사 다 알고 있으면서, 꾸짖지 않고 토닥이는 선생님 앞에 선 아이처럼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나는 무슨 배짱으로 누나와 친해지려고 했으며 한치의 죄책감도 없이 그 시를 누나에게 보여줬는지 모르겠습니다. 

누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쓴 시는 누나 말처럼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전연옥의 ‘멸치’를 표절했습니다. 누나는 그럼에도 나를 배려하고 끝까지 감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단 한 마디 음성에도 잘난 척 없이요. 

나는 그 날 일기장에 딱 한 마디 썼습니다. “들켜 버렸다.” 

그날 솔직히 누나에게 고마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아무런 고민없이, 노력없이 현란한 수식어와 기술만 좇던 나는 누나를 만나 그 기교를 한층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한 제가 한심했습니다. 그 날 이후 누나와 친해지는 노력을 멈추었습니다. 누나의 치열한 노력과 진지하게 사물을 보는 시각은 나와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누나를 보면 표절한 시를 버젓이 보여주고, 들켜 낙인이 찍힌 나를 계속 떠올리는 걸 견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했습니다. 그렇게 누나와 친해지기는 끝이 났습니다. 시 쓰기도 접었습니다. 대신 연극으로 내 예술 창작(?)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연극도 참 좋았습니다. 군 입대 전까지 다섯 작품으로 무대에 올라 그 인물에 빠져 살기도 했으니까요.

영화 ‘물숨’ 포스터입니다. 고희영을 영화감독으로 이름 알린 첫 작품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영화 ‘물숨’ 포스터입니다. 고희영을 영화감독으로 이름 알린 첫 작품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영화 ‘물숨’ 제작현장입니다. 출연자가 앵글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술술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고희영 감독은 기다립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영화 ‘물숨’ 제작현장입니다. 출연자가 앵글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술술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고희영 감독은 기다립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물숨’으로 나타난 고희영 누나

대학 졸업 후, 주변에서 종종 누나의 근황을 들었습니다. SBS에서 메인 작가로 ‘그것이 알고 싶다’를 제작하고, 시쳇말로 잘 나간다는 말을 설핏 들었을 때도, 솔직히 누나의 치열한 노력을 짐작하기 보다는 표절한 나의 시를 들킨 과거가 동시에 떠올라 그 기억을 애써 도리질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작은 일에 행복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영화 잡지에서 누나를 보았습니다. 방송 작가로 활동하고, 영화를 배우러 북경에서 생활했던 이력과 더불어 우도에서 7년간 생활하며 제작했다는 영화 ‘물숨’이 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찬찬히 영화평과 인터뷰를 읽으며 ‘우도에서의 7년간’이라는 부분에서 대학 1학년 MT때 “시는 어느 날 불쑥 써지지 않아!” 했던 그 기억이 같이 떠올라 ‘고희영 누나 답다.’ 읊조렸습니다. (후에 고희영 누나는 제게 7년 우도 생활을 언급하며 “에이 7년을 매일 우도에서 산 건 아니야”라며 굳이 정정해줬습니다.)

‘물숨’을 촬영할 때 2년 동안은 이렇게 해녀들의 망사리를 들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물숨’을 촬영할 때 2년 동안은 이렇게 해녀들의 망사리를 들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고희영 누나.

누나가 자칫 ‘7년간 우도에서 생활했다’라고 곡해할까, 굳이 정정하지 않더라도, 나에겐 이미 그런 부분이 ‘누나답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단순히 끈기라는 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누나의 태생적 특성 그런거요. 

우도에 한 번 가보지 않고, ‘소섬여자’라는 시를 써서 한껏 기교를 부리던 저와는 완전히 다른 거였지요. 오롯이 그 생활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그들과 하나되어 우도 생활 처음 2년 동안은 해녀들의 망사리만 들었다는 누나. 하지만 억지 신파가 아닌. 지극히 담담하게 찍어낸 영상이 더욱 누나다웠던 거지요. 

영화 ‘시소’ 포스터입니다. 개그맨 이동우와 임재신님의 다규멘터리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영화 ‘시소’ 포스터입니다. 개그맨 이동우와 임재신님의 다규멘터리입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익숙한 풍경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기억 속으로만 존재한다는 시각장애인의 심정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시각장애인 엄마를 둔 나는 사실 누나의 영화 ‘시소’를 보기까지 적잖은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미리 슬픔의 심해에 빠져들어 버릴 나를 스스로 겁내고. 이입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과가 이미 나 있는 게임을 재방으로 본다는 느낌의 맥 빠진 영화일거라, 내 마음대로 평가절하를 하면서 말이지요.

“신파로 가는 건 쉬워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삼류가수는 나만 울고 관객은 울지 않는다. 이류는 나도 울고 관객도 운다. 일류는 나는 안 울고 관객은 운다. 저는 일류는 아니지만 제 영화에서는 이런 거리를 유지하는 제 나름의 작업 철학이에요.”

‘물꽃의 전설’ 관객과의 대화에서 누나가 한 말이에요. 

애써 ‘시소’를 보지 않으려 하다, 결국 보고 난 뒤 내 감정을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누나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 ‘시소’는 눈물만 쏙 빼는 신파가 아니었어요.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고, 두 발 다 슬픔에 담그지 않고, 한 발은 담담하게 희망으로 가고 있었어요.

고희영 감독은 자신의 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고희영 감독은 자신의 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35년 후 대학원 졸업 동기, 그리고 ‘물꽃의 전설’

누나. 

내가 대학교 1학년 1986년에 의도적으로 누나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다 포기한 뒤, 3학년에 군대를 가고 그 후로, 누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 누나의 근황을 주변에서 듣거나 영화 잡지에서 간간이 보는 게 다였지요. 아, 우리 학과에서 졸업한 선배와의 대화에 누나가 초청돼 나왔었다는 얘기는 후배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공통분모의 관계가 없기에 어쩌면 만남 자체에 큰 의미를 둔다거나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나가 제작한 영화를 통해, ‘아 누나답다’라는 내 생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간접 만남이면 그럴 수 있겠습니다.

고희영(맨 왼쪽에서 두 번째) 감독과 올해 2월에 대학원 학위를 같이 받았습니다. 같이 학위받은 선생님들과 지도교수님과 같이 찍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고희영(맨 왼쪽에서 두 번째) 감독과 올해 2월에 대학원 학위를 같이 받았습니다. 같이 학위받은 선생님들과 지도교수님과 같이 찍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석사를 수료하고 논문 쓰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에, 지도교수이신 허남춘 교수님을 통해서 누나의 근황을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누나는 내 근처에 와 있더군요.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대학원에 들어왔다고요. 같은 교수님의 지도를 받는 교집합에도, 기껏해야 인사 한 번 나누는 정도 되지 않겠나 했었습니다. 나는 교수님에게 누나를 잘 안다고 했습니다. 나만 잘 안다고요. 당연히 고희영 누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덧붙여서요. 

35년전과 달리 이번에는 누나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35년 전 나는 누나의 시적재능(詩的才能)을 동경해서, 친해지면 나도 시를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의도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나의 SNS 친구 요청, 그리고 누나의 수락, 이 과정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충민씨 오랜만이어요…, 저를 기억할지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누나의 메신저에 나는 1학년 MT 돈내코 야영장의 같은 조였다는, 누나의 당선작 ‘고망다끄내’의 기억을 짧게 회신했습니다. 아, 그러네요. 티비에 나온 누나를 보고 과 선배라고 우리 각시에게 한참 자랑했다는 얘기도 했네요. 

누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늘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학보사 기자로 치열하게 사느라 날카로웠던 눈매가, 세월의 흐름에 깊이가 있어 부드러워져 있어 따뜻해 보였습니다. 

‘물꽃의 전설’이 제주에서 상영될 때, 영화관에서 고희영 감독과 같이 찍었습니다. 최대한 익살스럽게 찍자 했는데 용케 응해주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br>
‘물꽃의 전설’이 제주에서 상영될 때, 영화관에서 고희영 감독과 같이 찍었습니다. 최대한 익살스럽게 찍자 했는데 용케 응해주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누나. 

그 후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니었으나 만남 속에, 누나의 말을 다 기억합니다. 흡사 인출하지 못하는 통장처럼, 이제 또 내 병적인 기억이 수집되는 것 같습니다. 방송 작가로, 영화 감독으로 그 힘과 결과는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내 물음에 누나는 이렇게 답했어요. 결코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으로요.

“난 내 머리 대신 내 발을 믿어. 처음 방송국에 들어가서 출연자를 섭외할 때, 전화보다 직접 찾아가 진정으로 마음을 보여드렸어. 내 스타일은 가장 고전적으로 그냥 발품을 판거야. 영화작업 할 때도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아. 그래서 난 내 발이 좋아.” 

‘누나답다.’ 그 말은 누나를 정의하는 질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86년 처음 돈내코 야영장 텐트안에서 “시는 어느 날 불쑥 써지지 않아”라고 했던 한결같음을 다시금 환기했어요. 누나의 그 말에서 말입니다. 

이제 누나의 영화 ‘물꽃의 전설’이 개봉했어요. 상영관을 잡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속에서도 “음, 난 괜찮아. 독립영화가 처한 이런 현실에 하도 익숙해서 그러려니 해”라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오죽 속이 타들어 갔을까요. 다행히 조금씩 간헐적으로 상영 횟수가 늘기는 하지만 정말 턱도 없는 수치이지요. 

‘물꽃의 전설’ 포스터입니다. 상영소식이 들리면 많이많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물꽃의 전설’ 포스터입니다. 상영소식이 들리면 많이많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최고령 현순직 해녀와 채지애 막내 해녀, 그리고 물꽃... 

아, ‘물꽃의 전설’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누나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이미 다른 분들에게도 읽혀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에게 착실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맥이 빠지는 일이 될 터이니까요. 

‘물꽃의 전설’ 관객과의 대화 후입니다. 안현모, 에바 알머슨 님이 함께 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물꽃의 전설’ 관객과의 대화 후입니다. 안현모, 에바 알머슨 님이 함께 했습니다. / 사진=영화사 숨비

전 염치없이 누나가 사비로 구입하고 보내준 티켓으로 ‘물꽃의 전설’을 보았습니다. 누나 자신이 그토록 믿는 발품으로 만든 영화를 내가 턱하니 받아 호사스럽게 감상을 해도 되는지 참 미안했습니다. 

누나.

적절한 거리두기는 사람의 관계를 오히려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미주알고주알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누나의 영화를 보고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참 좋겠어요. 그리고 나 스스로 많은 반성을 합니다. 이제 공짜 영화는 보지 않으렵니다. 제가 예약하고 보겠습니다. 누나의 티켓, 한 번으로 족해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일부러 누나를 멀리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이제 다른 작품 ‘사월, 초사흘’을 준비하고. 일본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생을 다룬 영화를 준비하니, 누나가 철썩 같이 믿는 누나의 발이 또 다시 저력을 발휘하겠지요. 

젊은 날, 수평선 너머를 동경하다. 비로소 고향 제주에서 파랑새를 찾았다는 누나. 앞으로의 누나를 진정으로 응원합니다. 누나의 발을 응원합니다. 나는 늘 누나 영화의 관객이 되겠습니다.

2023년 9월 20일 강충민 

 

덧붙여 : 표절했던 내 35년 전의 과거 고백에 “아 기이? 전혀 기억 안나멘…. 나도 몰르멍 잘난척 해신게이…”(아 그래? 전혀 기억이 안나는데…. 나도 모르면서 잘 난척 했구나….)라고 웃어주었던 그 날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이 편지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에게도 고희영 감독의 ‘물꽃의 전설’ 많은 관심과 함께 꼭 영화 보기를 부탁드립니다. 


#강충민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국문학, 제주신화(설문대 할망)를 공부했습니다. 
글 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좋은 사람과 얘기나누고, 제주의 자연을 좋아합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 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등 하고 싶은, 좋아하는 다양한 직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최근까지 독서논술교실을 재운영하다가 지금은 서귀포 효돈에서 귤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 문화관광해설사로 재미나게 살려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새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 의미있는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으며 소소한 일에도 행복을 찾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필요한 곳이면 어느 곳이든 갈 생각입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www.jejungo.net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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