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9) 가위손의 가을

 

 

가위손의 가을

아직 우리 언약은 이 땅 위에 살아 있다며
무념의 가지를 자르던 가윗날의 차가움처럼
누군가 성그는 숲에서 호출  신호를 띄우고 있다

격일제 물 한 컵에 과즙 같은 정을 나누며
각서 없이 믿을 거라곤 하늘 오직 그 뿐이라며
가문 땅 햇귤을 건네며 목축이던 귤나무야

오고 있다, 은혜로운 백발성성 흩날리며
올 한 해 수고로운 초목들을 타이르시며
전능의 배낭을 메고 저기 시월이 오고 있다

지금은 농부 가슴에 축등 하나씩 준비할 때
수그린 가지가지 열매 아래 맨발로 서서
먼 통촉 물드는 하늘로 가위손을 접는다.

/ 1998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진실의 비밀금고, 내면의 상형문자, 인류문명의 위대한 고전 등등, 글을 쓰고자 한다면 먼저, 자연 읽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농사일에서 배웁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바짝 다가가서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를 전해 듣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 즉 농사를 통한 자연과의 개인적 교류로 시력과 어휘력, 상상력을 키워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라고 말하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강은 ‘강’이라는 말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만물은 그 본질이 객관적인 사물, 즉 명사로서 정지 돼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행 과정인 동사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역시 농사에서 배웁니다. 추수 직전의 농작물들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이때 농부들 역시 저들 농작물들을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농작물과 농부가 서로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 계절이 시월입니다. 이때, 백발성성 전능의 배낭을 메고 시월이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역경의 긴 터널을 경유해온 사람들의 뒷모습이야말로 음악이며 그림이며 한 편의 시라는 것을 시월에 들어서야 절감하기에 이릅니다. 

고요와 노을 그리고 약간 지친 육체에서 여과된 사색이 동시에 조우하면서 해질녘의 노동은 삶을 감미롭게 합니다. 이와 때를 맞춰 마을 절간에서 들려오는 예불 종소리는 내 노동의 시간을 경건하게 합니다. 노동 그 자체가 삶의 파종이며 추수라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입니다. 

흙이 베푸는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농부들은 압니다. 때문에 이들에 바치는 노동의 공물貢物은 신앙에 가까운 것입니다. 따라서 내 생의 배낭에 채워지는 한편 한편의 시편들이야말로 땀보다도 피보다도 더 그윽한 사유의 결정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행복한 죽음으로 향도할 존재가 바로 흙 또는 자연이라 믿고 싶습니다. 

하늘님이 오늘은 비를 내리셔서, 지친 내 육신을 휴식의 담요 위에 누이십니다. 네 노동이 수고로운 만치 너의 휴식도 감미로우리니.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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