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① 돌담 장인 안기남(1931년생, 구좌읍 행원리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안기남(1931년생, 구좌읍 행원리 거주) / 사진=조환진
안기남(1931년생, 구좌읍 행원리 거주) / 사진=조환진

동네 사람들이 믿고 자꾸 일을 맡겨가니 소문이 나고

Q. 돌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집에 밭담 쌓은 거 보고 동네 사람들이 ‘무사 경 잘 쌓암시니’ 허멍, 이것저것 해달라고 부탁이 들어와. 여기로 가서 하고 저기로 가서도 하고. 허단 보난 돌일 헌거 보면서 동네사람들이 믿고 울타리로 다와도라, 축담도 다와도라 허연. 해부난 아니 가지도 못허고 허기 시작한 거지.

소문이 함덕으로 어디로 소문이 다 나부난. 함덕 임성현이라고 석수였는데 그 집에서 한 3개월 살면서 바다에 투석 작업이라고 바당에 돌 들이치는 거 했고, 행원리 방파제 투석 작업하고. 의귀리 미깡밭에서도 오래 일하고, 서귀포에도 미깡밭 하는 사람 곽찬배네 미깡밭에 담다와도랜 허연 월정리 박태관이라는 사람허고 벗허영 서귀포에서도 3~4개월 살면서 일했고. 행원리에서는 산담허고 울타리담, 축담하고 주로 했지. 저 표선리에서도 한 달 살앙 오고, 한경면도 갔다 와서. 안 갔다온 데가 엇어. 소문나부난.

돌챙이 안기남이 쌓은 돌담. / 사진=조환진
돌챙이 안기남이 쌓은 돌담. / 사진=조환진
돌챙이 안기남이 쌓은 돌담. / 사진=조환진
돌챙이 안기남이 쌓은 돌담. / 사진=조환진

4.3때 오름 소개(疏開, 공습 화재 등이 발생했을 시 한곳에 모여 있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람과 물자를 분산시키는 것)로 내려와 버리니까 취락 구조 그거 복구허레 함덕 석공허고 돌 뽀개영 그거 식거당 덕천 가서 몇 달 동안 축담이영 다 쌓고. 안 갔다온 데가 엇어. 와서 해도랜 허민 안 가지도 못허고, 그자 허허허, 그럭저럭 허단 보니까. 고광민이라고 서귀포 중문에 와서 일해 달라고 해서 거기서도 3~4개월 살면서도 허고. 모슬포 녹차 밭 오설록에도 가서 서넉 달 살면서 갔다오고. 모슬포 축산단지에도 갔다오고 구석구석 다 다녔지.

월정사람인디 남영호 선장 곽희신이라고 서귀포에서 살면서 미깡밭이영 해부난 거기서 돌 뽀개고 그 돌로 서이서 방풍담 쌓고, 우리집에 할망 돌아간 후에는 며칠 안 갔다오고. 동네 사람들이 “고만히 집에만 이시면 무신거 허쿠강?” 허연, “바람도 쏘일 겸 같이 왕이네 벗헙서” 허면은 안 가지도 못허고 80세까지는 작업을 한 셈이지.

산담 축조 후 기념촬영. (앞줄 맨 왼쪽이 안기남) ⓒ제주의소리
산담 축조 후 기념촬영. (앞줄 맨 왼쪽이 안기남) ⓒ제주의소리
산담 축조 후 기념촬영. (앞줄 맨 왼쪽이 안기남) ⓒ제주의소리
산담 축조 후 기념촬영. (앞줄 맨 왼쪽이 안기남) ⓒ제주의소리

Q. 돌일은 몇 사람이 하러 다녔습니까?

다른 동네에 가서 할 때는 월정리 박태환이 하고 세 사람 정도 가고 행원에서 산담이나 축담할 때는 협심회라고 해서 행원사람 여덟 사람 같이 했지.

Q. 돌 연장은 어디서 마련하셨는지요?

오겐노(큰메)하고 하겐노(둥근날메)하고 다 제주시 다리 밑에 불미하는 데가 이서서. 우리 협심회 회원들이 여덟 사람이지마는 다 일할 수 있도록 벤줄레(지렛대) 영 하겐노, 물메 허곡 다 여유있게 만들어 줬주게. 우리집이 연장 다 준비해놓고 사람들은 몸만 오는 거지.

제주 돌챙이 모임 협심회 사진. ⓒ제주의소리
제주 돌챙이 모임 협심회 사진. ⓒ제주의소리
제주 돌챙이 모임 협심회 사진. ⓒ제주의소리
제주 돌챙이 모임 협심회 사진. ⓒ제주의소리

돌은 빌레에서 캐어서 몰구루마 쇠구루마에 실어왔지

Q. 돌은 어디서 구했습니까?

세 군데 이신디 생은이빌레, 정들머들, 상관이빌레. 이디서 돌 캐영 몰구루마, 쇠구루마에 실고 왔지.

Q. 돌담 잘 쌓는 비법을 말해주신다면요?

하겐노로 쌓게끔 만들어야주게. 덮어놓고 밭담이 아니고 울타리담은 돌의 모양을 만들어야 해요. 일자담이 있고 잡석담이 있주게. 일자담은 코칭코칭허게시리 만들어서 한 줄로 쌓는 담이고 잡석담은 덮어 놓고 한 면만 보면서 가운데는 잡석으로 채와 넣는 담이라.

산담 할 적에 행원은 잡석담이고, 저 김녕 입산봉 마을공동묘지는 땅이 아주 좁으니까 거기는 전부 다 일자담. 일자담은 돌을 네귀 반듯허게 만들엉이네 코찡하게 다우는 담이고.

겐노를 어떻게 잘 쓰느냐가 문제주게. 돌 쌓는 건 돌의 형태 봐가멍 쌓으민 되고. 산담돌은 웬만허민 다 허고, 축담돌은 안팎으로 보기 좋아야 허난 한 자민 한 자 넓이로 쭉 허게 쌓아야. 

Q. 일하다 다친 적은 없었습니까?

표선에 가서 일하다가 야가 탁 튀어서 다쳐그낸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치료해 나서. 야 튀는 경우가 많아서 메질 할 때 바로 서서 하지 않고 약간 옆으로 빗성이네 메질 해야. 야가 곧바로 튀기 때문에.

Q. 돌일 할 때 노래 부르면서 일하셨나요?

노래 좋아라 허주게. ‘돈아돈아 일름 모를 돈아~’ 허멍 망치질 했주. 허허.

좋아했던 건 ‘꿈에 본 내 고향’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 허고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그런 거 좋아라 해신디. 행원리 영장나민 내가 다 불렀어. 영장소리 선소리 내가 허민 후소리는 딴 사람들이 허고 봉분 맨드는 소리도 내가 허고.

어허렁창 어허렁창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나 진다고 서러워마라
명년 이철 춘삼월 나민
꽃도 피고 님도 본다
어허렁창 어허렁창

행원리 양식장하고 산에 가서 토신제 할 때 내가 축을 많이 고했지. 어릴 때 이웃집 할아버지한테 한문도 배우고 허난 한문은 좀 알아났주게. 경허난 토신제고 뭐고 축 고하는 거는 나신드레만 많이 와나서. 

산담 다울 때 부르는 노래가 있나? 엇어. 일하면서는 보통은 유행가 불렀지. 

‘꿈에 본 내 고향’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보고 싶어라
몸부림 치며 울며 불며
떠나간 사람 
저 달이 밝혀주는~

아는 유행가는 한 50곡이나 될 거라.

일 끝나서 돈 받을 때가 제일 기분 좋은 거지

Q. 돌일이 재미있었나요?

돌일 헐 때 산담이라도 마쳐서 돈 받을 때나 서귀포 미깡밭에 강 일 헐 때가 기분 좋지게. 월급 타는 식이나 마찬가지라. 일 끝나서 돈 받을 때가 제일 기분 좋은 거지. 돌일 허멍 술도 하영 먹엇주. 술 좋아라해져. 많이 먹으민 한이 엇주마는 꼭 아침 저녁 밥 먹을 때마다 두 잔씩 고정적으로 먹어. 게민 좋주게.

안기남 씨가 동료들과 촬영한 사진. ⓒ제주의소리
안기남 씨가 동료들과 촬영한 사진. ⓒ제주의소리

행원에 오면은 산담들 해도랜 해그네 늑신네들이 다 나신드레만 와. 참 일은 많이 해서. 동네 하르방들이 와서 나 일하는 거 보멍, “니는 감중이(갈중이) 벗을 날이 엇구나게. 부지런헌 부자는 하늘님도 막지 못헌다” 허면서 솔직히 갈중이 벗을 날 엇이 일을 해서. 행원리에 협심회라고 내가 돌일하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하르방이고 누구고다 나신드래만 오니까 돈 모아서 팔월 추석이영 명절이영 같이 해서 먹곡 해서.

Q. 돈 번 거 다 어떻게 하셨어요?

이제 나이가 92인데 이제는 어디 나가고 싶지도 않고. 한 푼 두 푼 다 모은거 육칠천 있는데 할망도 돌아가고 나도 정신이 이상해 가고 안되겠다고 해서, 통장 두 개나 만들었었는데, 정리해야겠다고 해서 자식들 6남매 천만 원 씩 해주고 손주도 열너이 100만원 씩 다 해주고 통장 정리하니까 지금은 천만 원 밖에 없을거라. 제주시 대학병원에 약도 우리 딸이 강으네 지어서 타오고 허허.

안기남의 작업 일지. ⓒ제주의소리
안기남의 작업 일지. ⓒ제주의소리
안기남의 작업 일지. ⓒ제주의소리
안기남의 작업 일지. ⓒ제주의소리

Q. 살아온 인생이 생각나시겠네요?

내가 30대부터 80살까지 돌일하러 다녔으니까. 아버지는 정미소를 해부난 아버지 대신 정뜨르도 강으네 15일 일허고, 진드르도 아버지 대신 가서 15일간 일허고.

15살에 학교 졸업허영 정뜨르 진드르 다 가와서. 왜정 때 정뜨르에서 강냉이밥 먹으면서. 그만큼 일을 다녀나니까. 습관이 뒈연 일이랜 허민 가민히 했지. 일허는 데는 몸 아끼지 말앙 해사주게. 내가 여기저기로 일 가버리믄 협심회 회원들은 나만 어디 못가게 허는 거라. 나 어디 가버리면은 일이 없으니까.

4.3에 아버지 잃고 형님 잃고 누님 잃고 다 일러서. 우리 큰누님이 4.3 때 집에 불 붙어 가니까 딴 사람들은 저 뒤에 가서 다 곱고 우리 큰 누님은 불끄젠 허니까 총에 맞아신디 목숨은 살안 한 석달 동안 나가 치료허여서. 그때는 병원에도 못 갔주. 여기는 차도 없었고. 나냥으로 저기 한백당 꺼풀 해당 치료허당. 배속에서는 아기가 배여내 틀먹틀먹 허지. 아이고, 나가 그때 제일 고생 많이 해부난 그때가 자꾸 생각나. 큰누님 생각 밖에 안 나져. 한두 달 있다가 돌아가셔서 한 석 달 동안 담뿍 고생을, 고생을 해서, 살다 보난….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돌담을 답듯이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온 자랑스런 아버지
차남 안우진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 현장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게 부친이 아니었나 싶다. 그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 하에서도 동네 복습방에서 몰래 숨어 한글과 한문을 수학했고, 6.25전쟁 당시 군에 가서는 총명함이 뛰어나 미군과 생활하면서 영어를 익혔다.

제주4.3에 부형과 누나를 잃고,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만신창이가 된 집안에서 풀뿌리로 끼니를 때우던 중 6.25전쟁이 발발해 1950년 8월 27일부터 1956년 8월 26일까지 만 6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제주4.3 당시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산으로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구했고, 6.25전쟁터에서 인천상륙작전, 도솔산전투 등에 참여하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러한 죽음의 현장에서도 정신만은 잃지 말자는 집념 하나로 그 어려운 순간을 버텨온 것 같다.

전역 후 집안은 엉망이었다. 생전에 부친께서 행원리와 월정리에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진 빚과 고기를 잡아 시장에 팔기 위해 어선을 구입하는데 들어간 비용이 고스란히 채무로 남아있었다. 전역해 돌아오자마자 반가움은 잠시, 사람들마다 생전에 부친이 진 빚을 갚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갖고 있는 재산은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신체 뿐이었다. 채무자들에게 내가 돈으로는 갚을 길이 없고, 몸이 건강하니 집안에 소일하면서 갚겠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날부터 채무자 집안에 가서 소일을 하는데 헝클어진 집담을 다우는 것, 밭의 경계를 정하는 데 필요한 밭담을 답는 것이 전부였다.

돌담을 다우면서 부친은 실력이 나날이 향상되고, 마을 곳곳에서 밭담을 다와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밭담을 답기 시작하면서 명성이 두드러졌고, 혼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하에 ‘협심회(協心會)’라는 친목 단체를 조직해 밭담은 물론이고, 산담까지 전담해 답기 시작했다. 동생과 저는 아버지를 따라 돌담을 다우러 다니기 시작했고, 집안에 있는 정, 야, 망치, 지렛대 등을 챙기는 것은 아들들의 역할이었다.

서귀포 중문에 있는 관광단지 토담집, 오설록 경계담은 부친이 전담해 쌓은 것이며, 마을 곳곳에 부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은 돌챙이었고, 나는 아버지가 돌챙이라는 걸 부끄러워했다. 마을에서 상이 났을 때 상여소리 전담은 아버지였고, 마을 또는 주민들의 토신제, 산신제의 제관, 축을 읽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밭담을 다우면서 길러진 체력과 근력으로 지금까지 정정하게 삶을 영위해 오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관됐던 돌챙이 장비들이 다 없어지고, 당시에 추진했던 것들이 사진으로나 글로나 남겨둔 것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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