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0) 연못 속에 야위는 달

 

연못 속에 야위는 달

오늘밤 연화지에 노란 달을 따러 가자
열이레 낙과 직전의 홍시처럼 잘 익은 달
가만히 연잎을 헤쳐 물속 달을 건지자

불과 하루 만에 핼쑥하게 야윈 저 달
구름에 숨었다가 연잎 뒤에 숨었다가
절반쯤 마음이 들킨 그대 마음이리니

연못에 돌을 던져 파문 짓는 여심처럼
살짝 흔들릴 때 눈매 고운 여심처럼
보얗게 분칠을 하고 내 앞에서 흔드네 

만추의 연못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달
달도 이 계절엔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
열길 속 이심전심이 수면 위에 떠올라

더 늦기 전에 그믐밤이 가기 전에 
반쯤 부서지고 반쯤 녹아내리자고
하늘땅 그만큼에서 야위고만 있었지

/ 2014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연꽃은 이미 다 시들었는데도 여기저기 그 연못의 연꽃을 보러오는 여인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마침 <시조 일만 계단 내려 걷기> 작업 중일 때여서 곧바로 「가을다큐」 한 컷을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연밥을 부둥켜안고
연못 속에 익는 가을

여인은 핸드폰으로
그 가을을 찍는가 하면

그 건너 눈물 흘리는
긴 통화도
있었네

-「가을다큐 43」 

한 여인은 핸드폰으로 연밥을 찍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으로 무언가 모를 슬픔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일행 중에도 이처럼 판이한 입장과 내면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눈에 비친 또 하나 ‘가을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사실 이곳 애월읍 하가리 연못은 나에게 시와 사진 등의 작품을 많이 제공해준 주요 관찰 ‘포인트’였습니다. 

그해 가을이 거의 지나갈 무렵, 이번엔 연못 속에 내려온 달을 만나러 갔습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그날도 여인 둘이서 그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달밤의 이심전심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걸 보면, 달님 역시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은가 봅니다. 
이때 한 여인이 달빛 고요히 내린 연못을 향해 “퐁당”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돌멩이는 여인이 던졌는데, 시는 내가 건졌습니다. 

서쪽으로 살짝 ‘기운’ 하현달을 그린 이 시조 한 편이 천자문 열두 번째 ‘기울 측昃’의 시첩 한 칸을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야말로 우주 전체 모든 위성들이 내가 사는 초록별을 위해 존재하면서 나의 <시조 일 만 계단 내려 걷기>의 대장정 한 계단 한 계단을 함께 내려걷고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