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② 원담 장인 이방익(1934년생, 한림읍 금능리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원담 장인 이방익(1934년생, 한림읍 금능리 거주) / 사진=조환진
원담 장인 이방익(1934년생, 한림읍 금능리 거주) / 사진=조환진

군대 다녀와 보니 원담이 다 흩어져 잇어
옛날 하르방들 다운대로 그대로 다왓어

Q. 원담은 언제부터 관리하셨습니까?

우리 동네 김씨 할아버지가 하다가 내가 군에서 제대한 다음 해엔가 돌아가시니까 이젠 원담이 거진 무너져서 내버리게 됐거든. 에이, 헐 일도 엇고 이거라도 취미삼아 해보자 해서 나 혼자 보수하기 시작했지.

이쪽은 김씨 하르방 원담, 저쪽 원담은 윤씨 하르방. 저쪽 돌하르방 세운디 원담은 양씨 하르방이 관리해신디 군대 갔다 와 보난 다 돌아가시고 원담고 태풍에 파도에 다 흩어져 있었는데 굽돌은 모래에 박혀서 그대로 있어서.

원담을 살피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원담을 살피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원담을 살피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원담을 살피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흩어져 버린 원담. / 사진=조환진

옛날 하르방들이 다운대로 그대로 눈치껏 쌓아신디 한두달로 안 되고 하루에 요만큼씩 멧 달 동안 다운거.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지는 안 했어. 

저쪽 해수욕장 쪽에 쪼짝허게 튀어난 돌이 이섯는 디, 돌 꼭대기에 힘센 갈매기는 앉고 약한 놈은 못 앉는 돌이 있었는데 우리 마을 사람들도 모르게 누가 장비로 가져가 버렸어. 그 자리에 내가 물고기 안고 있는 모습을 돌로 조각한 것을 제주도에서 세워줬어.

원담에 세운 조각. / 사진=조환진
원담에 세운 조각. / 사진=조환진

Q. 원담 쌓을 때 튼튼하게 쌓는 원리가 있습니까?

나는 잘 다우젠도 않고 옛날 하르방들 다운대로 그대로 길쭉하게 다 왓어. 도청에서 공무원들이 와서 물어보곤 했주. 

“누가 이렇게 쌓으라고 가르쳐 줍디가?”
“누가 고리쳐 줘? 나 눈치로 그대로 했지. 아무렇게나 쌓으민 파도가 쎌 때는 돌을 천리만리 던져부러.”

옛날 하르방들이 머리를 쓰면서 했지. 바당 쪽으로는 점점 낮게 경사지게 쌓아야 파도가 쳐도 돌이 잘 안무너지고 고기들도 자연스럽게 올라와. 원담 안쪽은 수직으로 세왕 쌓아서 물이 빠지민 물고기들이 갇혀서 못 나가는 함정이 돼버리는 거라.

원담. / 사진=조환진
원담. / 사진=조환진
원담의 구조. / 사진=조환진
원담의 구조. / 사진=조환진

Q. 원담 안쪽 높이는 얼마나 됩니까?

높이는 1m가 넘고, 바닥 지형마다 조금씩 달라. 바닷물이 들어올 때 보민 원담 수평이 잘 맞았는지 보여. 어느 한쪽이 낮으민 멜들이 다 그리로 나가 버리거든. 올래에 앉아서 딱 보민 어디가 높고 낮은지 보여. 너무 높게 다우면 파도에 노실앙 안 돼. 멜도 안 들어오고 고기도 안 들어와.

원담. / 사진=조환진
원담. / 사진=조환진

돌을 꽉 물리게끔 다와야지
그냥 던져불민 안되주게

Q. 태풍이 불면 원담이 많이 무너집니까?

나가 다운 디는 한 두 덩어리 떨어지지 많이 머러지지는 안 허여. 돌을 꽉 물리게끔 다와야지. 그냥 던져 불민 안 되주게. 탁탁 맞게끔 다와야지, 틈이 있으면 안 돼. 장갑도 안 쪙 손으로 그쟈 도닥도닥 허당 농사 지으레 밭에도 가고.

누구 말대로 원담 호랑이 됐지. 관광객들이 깅이 잡는다고들 돌알 다 일리멍 헤싸버리거든. 올래에서 쌍안경으로 딱 보당, 원담으로 관광객들이 내려가민 호르라길 가졍 후닥닥 나가서 몇 번 불면서 경고허민 그담부턴 이쪽으로 잘 오질 안 허여.

옛날에 집도 없고 해서 남의 집 빌어서 살 땐데, 물이 싹 싸고 허니까 원에나 한 번 가봐야겠다 허영 원에를 강 가보니까 큰 가오리가 물 마르니까 물에 업더졍 이서. 꽁지에 침 돋고 헌 거. 끌고 오지 못헐 정도로 큰 건디 동네사람들신디 먹을 사람 썰어당 먹으랜 허곡 해나서.

한 번은 큰거북이가 원에 들어서. 뭐라고 말을 하니 쭈그리고서 막 울고 눈물 흘리는데 그 거북이를 건드릴 수가 엇어. 아이고, 무사히 떠나라도, 멜이나 몰아다 달라고, 고기나 몰아다 달라고 하면서 바다에 놔주멍 해나서. 사람 같이 눈물을 두룩두룩 흘쳐. 아이구, 겁나더라고. 그때는 살기 어려울 때니까, “보내주크메 이 원담 안에 멜을 몰아오라, 고기를 담아노라” 말했는데 다음 날 멜 많이 들어왔는데 그 거북이가 몰아다 줘신가?

원에 든 고기 잡아서 팔 정도는 안되고
반찬은 사먹지 않을 정도

Q. 원에서 고기 잡아서 돈 많이 벌었습니까?

원에 든 고기 잡아서 팔 정도는 안되고 반찬은 사먹지 안 했주게. 고기 잡아당 먹고. 팔 때는 멜 많이 들 때, 마을사람들과 같이 공동으로 할 때 그때나 팔지.

지금은 시계가 이선 물 빠지는 시간을 알주만, 예전에는 시간을 몰르니까 달 보면서 시간을 짐작해서.

일어낭 강 보민 물들어 불민 고기가 들어도 못 심어 놔버릴 때도 싯곡. 밤이고 낮이고 하루 두 번, 물 싸면 원에 내려갔지.

이방익 어르신의 발. / 사진=조환진
이방익 어르신의 발. / 사진=조환진

Q. 원을 몇 개 관리하셨습니까?

주충원, 활대원, 족은원이 저 동으로 셔 나서. 지금 남은 것은 소원, 모른원, 모살원은 남아있고 전에는 세 개가 더 있었지.

활대원은 양씨 하르방이 다와났고. 가운데 이만큼은 윤창원이라고 윤씨 하르방이 다와났고. 저 쪽은 양씨 하르방인디 일름을 잘 몰라. 키도 조그마한 하르방인디 우리 어릴 때 강 보민 우리 보고, “아이고 이거 몇 덩어리만 놔도라, 놔도라” 부탁하시던 얼굴이 생각나져. 군대 갔다 와 보니까 관리하시던 하르방덜이 다 돌아가시니까 관리가 안돼서 원담의 돌들이 흩어져 버렸지. 내가 전부 관리하기도 힘들고.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그땐 헐 일이 엇이난
맨날 바당에 강 앉앙 물 쌀 때만 기다렸주

Q. 원담을 관리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 때는 아이들도 낳지 않을 때고 조상들이 가난해보니 밭도 하나 안 주고 해노니까 헐 일이 없거든. 그자 보리철 나민 남의 집에 가서 보리 홀트는 거나 해주고 헐 일이 엇어. 나는 맨날 바당 아래 앉아서 물 쌀 때만 기다리는 거여. 바당에 가민 고기라도 잡아서 반찬이라도 해먹지. 내가 기가 막히게 자란 사람이라.

돌담을 살펴보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돌담을 살펴보는 이방익 어르신. / 사진=조환진

Q. 원담 쌓을 때 무슨 기구를 사용하셨습니까?

그전에는 기구가 없었거든. 그자 손으로만 독닥독각 허멍 했지.

Q. 이 집에는 얼마나 살았습니까?

이 집이 초가집이라났주게. 사라호 태풍 때 저 집도 망가지고 이 집고 망가져 버렸지. 금능에서 1번으로 수리헌 거라. 군대에서 받은 상장을 여기 붙여 놨었는데 태풍에 물우떠가지고 민작민작 막 썩어부런. 우리 할망, 우리 하르방이 공부도 학교도 못헌 사람이 이런 큰 상장 타왔다고 허멍 상장을 걸머지고 길가에서 막 춤 춰났주게.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아버지에게 바다와 원담은 평생을 바친 터전이며, 삶
아들 이상수

원담은 밀물 때 밀려 들어왔던 고기떼가 빠른 썰물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돌담에 갇히는 원리로 일종의 돌로 만든 그물이라 할 수 있다. 제주섬에서 원담은 그 원리가 원시적이면서도 보존이 잘 돼 있는 전통 어획 수단으로 그 보존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금능원담은 본래 5개의 원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 제대 후 금능 원담은 관리자의 부재로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군 제대 후 27세의 젊은 나이에 허물어진 원담을 혼자 2년여 동안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돌을 쌓으며 일구다보니 원담 5개였던 것을 모두 복원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담에 쌓인 돌은 파도에 의해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60여년 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가 좋지 않아도 원담을 유지보수하시며 간조 때 마다 항상 원담에 나가시곤 하셨다.

심지어 아버지가 맹장수술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도 “원담 보러 가라, 원담 보러 가라”라고 하실 만큼 당신의 건강보다 원담을 먼저 생각하시곤 했다. 자식들보다 먼저, 본인의 건강보다 원담을 더 생각하시는 아버지의 원담 사랑에 한때는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버지는 오로지 원담에 대한 걱정뿐이셨고, 아버지에게 바다와 원담은 평생을 바친 터전이며 삶이었다.

원담은 기상이 나쁠 때, 태풍, 계절풍 등이 올 때 방파제 역할을 해줌으로써, 해풍으로부터 해안가 주택을 지켜분다. 또 가끔은 원담에 멜(멸치)이 드는데, 멜이 들 때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서로 멜을 거리며(뜨면서) 잔치 분위기를 낸다. 마을 사람들은 멜을 잡아 젓갈을 담그기도 하며 동네 사람들과 나누기도 했다.

아버지는 원담에 나가 멸치가 들면 멸치를 잡고, 낮에는 배를 타고 나가 자리돔, 옥돔을 잡으며 우리 5형제를 키우셨다. 원담만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한 때는 원망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가족을 굶기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됐다. 파도에 무너지는 원담을 지키기 위해 무너지면 쌓고 무너지면 다시 쌓기를 60여년. 누구 도움 없이 혼자 원담을 지키며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 그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방익 어르신의 손. / 사진=조환진
이방익 어르신의 손. / 사진=조환진

이렇게 힘들게 지켜온 원담은 지금에 이르러 금능을 알리고 금능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됐다. 금능원담은 현재 3개의 원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매년 원담을 주제로 한 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하며 마을을 알리고 있다. 아버지의 원담이 제주에서 가장 크고, 관리가 가장 잘 됐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들었다.

어느새 아버지 연세가 90세가 넘다 보니, 원담에 나가시기 위험해 이제는 대를 이어받아 내가 원담을 보수 관리하며 아버지의 평생 터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통 방법 그대로 금능원담을 직접 유지보수관리를 해보니,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높은 파도에 무너진 돌을 일일이 쌓아올리는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됐다. 이러한 고된 작업을 아버지께서는 60여 년간 묵묵히 해오심에 대단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아 나는 사라져가는 원시적인 전통어로방법인 원담을 잘 관리하며 보전하고 싶다.

지금 고령의 연세인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걱정이 된다. 작년에만 하더라도 원담을 거닐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건강으로 인해 그저 원담만 바라보는 모습이 안쓰럽다. 나 혼자 원담을 갈 때마다 아버지와 같이 원담을 관리하던 그때가 가끔 그리움에 생각이 난다.

이방익 어르신과 자녀 이상수 씨. / 사진=조환진
이방익 어르신과 자녀 이상수 씨. / 사진=조환진

파도에 무너지는 원담, 그저 원담만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금능의 보물이자 자랑거리인 원담을 관광객들이 와서 좋아해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지만, 또한 관광객에 의해 훼손되는 원담을 보면 마음에 아쉬움이 크기도 하다. 바람이지만, 원담을 소중히 생각하고 가급적이면 아름다운 원담을 눈에 담아가되, 훼손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돌담은 제주도민의 지혜가 담긴 제주도의 상징이자 소중한 제주도 해양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제주도 원담의 상당수가 관리되지 않아 방치돼 있거나 훼손이 심해 그 기능을 잃은 반면, 금능원담은 65년간 꾸준한 보수를 통해 현재까지도 훌륭한 어로 수단으로써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원담의 가치를 계속 이어가면서, 아버지의 삶과 터전이었던 원담을 제주도 으뜸가는 ‘으뜸원담’으로 지키고 싶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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