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③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송종원(1937년생, 아라동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송종원(1937년생, 아라동 거주) / 사진=조환진<br>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송종원(1937년생, 아라동 거주) / 사진=조환진

세상에 변치 않는 게 어디 이서?

Q. 돌 조각을 하게 되신 계기가 있습니까?

내 고향은 제주시 오라2동인데 고등학교를 어렵게 다니면서 졸업하고 제주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갔습니다. 교직과 나와서 교사자격증까지 받고 졸업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까. 발성이 안 되는 거야.

목소리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그때는 아는 어르신이 지나가면 “안녕하십니까?” 하고 제대로 인사를 해도 나는 인사를 했는데, “저 놈 거만하게 인사도 안 한다”고 오해받는 거야. 지금도 좀 거칠고 좀 막힐 때도 있고, 그래서 아쉽지만 다른 과목이었으면 버텼을 건데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기 그지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선생님의 길을 포기하고 나니까 막막한 거라. 어머니가 말하기를 형들은 대학에 못 가봤는데 너 대학 공부시키려고 하나 있던 밭도 팔아신디…. 그때 내가 돌을 만져가니까 그 말을 하는 거라. 밭까지 팔면서 했는데 너 하는 것이 뭐냐. 당장 집어치우고 공무원 시험 볼 준비허라. 참 막막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주. 짐 운반해주는 지게꾼이라도 해야 될 텐데.

경허다가 돌로 인연이 맺어질려고 했는지 고등학교 때 배운 고시조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 셋째 수에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푸르는듯 누르나니 아파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어디 이서? 다 변하긴 하지만은 그래도 돌은 변치 않는다는 그 구절이 문뜩 떠오르는 거라. 모르는 사이에 돌하고 인연이 될려고 아마 그것이 계시가 되었는지. 그 다음에 생각하니 내가 이제 돌과 벗 삼앙 돌과 같이 살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갖게 된 거라.

가만히 생각해 볼 적에 돌의 심성, 뭔가 시키면은 자기 몫을 다해낸다는 돌의 심성, 돌을 가지고 돌담을 쌓으면은 목적이 있는 거 아니라. 집 울타리는 집을 가려 주고 막아 주고, 밭담 경계되고 우마 막아주고. 사람이 밭담을 쌓을 적에는 그 돌담에 임무를 부여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 예를 들어 돌하르방을 만든다 하면 딱 세웠을 적에 너는 여기서 지키면서 무언가 침범하는 것을 막아주는 직무를 부여해주는 거나 마찬가지.

그러면 돌은 묵묵히 그 자체를 지킨다는 거야. 예를 들어 도로포장 할 적에 골재로 까는 자갈, 길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거거든. 집에 축담들도, 자갈을 시멘트에 섞어서 포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돌을 활용하는 대로 사람이 임무를 부여해 주는 거라. 돌은 그걸 묵묵히 받아들여서 끝내 지킨다라는 거. 그런 저런 걸 생각해 볼 적에 돌의 심성, 다 버리고 돌을 벗 삼앙 돌과 같이 살고 싶다. 경해서 배운 거 다 팽개쳐 버리고 돌을 잡았지. 이제는 알파벳도 다 잊어부러서.

군대 가기 전에 나는 돌을 붙잡겠다
결심을 한 거야

Q. 그 때가 언제쯤입니까?

내가 1960년 3월 7일날 졸업하고 그해 8월 5일 날 군대 가서 3년 살았는데 군대 가기 전에 돌을 붙잡겠다 결심을 한 거야. 한 스물 다섯 살. 

군대 가서 내가 산에서 반월 같이 생긴 하얀 돌을 주웠는데 그걸 내가 놓치고 못 가져왔다는 게 아쉬워서 지금도 그 생각이 안 잊혀져. 그냥 돌이 아닌 건데. 산에서 그 돌을 본 것도 군대 가기 전에 ‘나는 돌 잡겠다’ 하는 생각을 굳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1963년 7월 13일 육군에서 제대해서. 집에서 어머니나 형네들이 생각하기에 이제는 군대도 갔당오고 해시난 어디 직장이나 들어강 회전 의자에 앚앙 일허는 꿈을 꾸었겠지.

나는 제대하고 잠깐 쉬고 10월 달에 바로 민오름 동쪽에 부드러운 속돌(송이)이 많이 이서서. 배낭 매어가지고 놀러간추룩 허영 간 속돌을 배낭에 담앙 완. 그때에 돌을 보명 뭘 만들까 생각했는데 그때 나는 제주시내 시민회관 바로 서쪽 중앙로 길 붙은 서쪽에 살아서. 거기 조그마한 초가집이었는데 내가 군대 간 사이에 형님네가 집을 고쳤는데, 그 당시는 지금 칼호텔 앞에 제주여자중고등학교 있었주.

삼성혈 입구에 있는 돌하르방 중에 큰 돌하르방이 그 자리에 있질 않고 여자 중고등학교 정문 앞에 묵은 길이 이렇게 나 있었는데, 그 길 비탈진 데 딱 세워져 있어가지고 정말 큰바람 불민 넘어질 듯 세워져 이서신디. 그걸 자주 봐났기 때문에 저거 한 번 만들어 보자. 집에 와서 한 삼일쯤 걸렸는가. 그게 이제 모조 생산 1호가 되는 거라. 돌하르방을 만들어 보니 되더라 이거야.

어느날 미국 관광객이 이 돌하르방을 꼭 사고 싶다해서 팔아버리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1호 돌하르방을 잘 보관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남았지.

결국 이를 시작으로 돌하르방이 관광 기념품으로 탄생하게 된거지. 시간이 좀 지나 제주의 문화에 관련된 작품을 만들어보자 해서 물허벽상, 애기 업은 물허벅상 해녀상 등을 1968~69년도 쯤에 창작을 하게 되었지.

송종원의 1960년대 후반 작품.
송종원의 1960년대 후반 작품.

난 아무생각 없이 돌하고 씨름을 하는데 집에서 가족들이 완강히 반대를 하는 거라. 정신 돈 사람 아니면은 그 시절에 대학이나 나왔다는 작자가 규모를 갖춰서 하는 것도 아니고 돌멩이 하다 주워당 외못 때려서 납작하게 펴서 끌 만들고 그길로 돌하르방 만드는 거 보면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머리 돈 사람 아니면은 저런 행동을 수 있겠느냐.

접에서 어머니나 형님들이 대발노발 하는 거지. 형님이 말하기를, “한 며칠만이라도 직장생활 해봐라.” 해서 잠깐 동안 제주시청 발간실에도 있어 봤고, 보건소에도 잠깐 있어 봤고. 내가 의지를 굽힌 것은 아니고 하도 권하니까. 그러던 중에 친한 친구 하나가 초등학교 교사자격종 주는 보수교육 받으러 가는데 혼자 가기는 뭐하다고 벗해서 같이 가달라는 거야. 나는 그때 직장 없이 우야무야 할 때고 하도 부탁하니까 나도 교육받고서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 받아서.

집에서는 하도 돌 만지는 일을 못하게 하니까 잠깐 동안 머리 식히고 올려고 생각했지. 스승으로서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 건데 초등학교는 그런대로 그렇게 힘들지 않게 가르칠 수 있으니까 만약 된다면 부산에는 공장들이 많으니까 토요일 일요일에 공장 돌아다니멍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볼 생각으로 부산으로 지망을 했더니 신청 인원이 많아서 반려되었어. 다시 경북 지역으로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시청 발간실에 일하고 있었는데 12월 15일에 엽서 한 장이 날아왔는데 12월 1일자로 발령났다는 엽서가 왔어.

육지 가서 길면 3년 정도 있다가 돌아와서 다시 돌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딱 1년 반 만에 교장선생님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선생님 혹시 고향에 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언젠가는 고향에 가야되죠.” 노란봉투를 쑥 내미는데 보니까 전출의뢰서라. 알아보니 집에서 형님네가 낸 것도 아니고 제3자가 낸 거라. “기왕 왔으니까 보내 주십시오.”

그 교장 선생님은 건장한 체구에 아주 깐깐한 사람인데 나랑 40분간 입씨름도 했었는데 막상 제주도 올 적에는 “행정 절차상 사직서는 받습니다만 군대에서도 삼진을 친다고 하는데 인생 사회에서도 삼진이 필요합니다. 3개월을 기다릴 테니 가서 뜻대로 안 되면 몸이 못 와도 엽서 한 장만 보내주면은 복직 시키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말 안 하고 실컷 놀게 해주고서 이임 편지를 써서 학생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서 내려왔지.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제주MBC 사옥 부조

Q.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제주MBC 사옥 부조.

내가 사실은 그 작업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때까지만 해도 돌하르방, 물허벽 여인상을 만들긴 했지마는 그것들은 사진 보멍 만든 소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다뤘는데. 한 번은 문기선 교수님이 찾아와서. “MBC문화방송 신축 건물 외벽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디 부탁할 데가 없으니까 이걸 좀 맡아줘야 되크라.”

“아니 알다시피 나는 조각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취미로 돌하르방 만드는 정도밖에 능력이 능력이 안 되는데 이런 조각을 제가 맡아서 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 데도 부탁할 데가 어서. 송선생이믄 충분히 해낼 수 이서.”
“아니 못합니다. 내가 이런 걸 해본 경험이 있으면 하지만은 못합니다. 딴 데 부탁헙서.”

완강히 거절했는데 끝내,
“다른데 부탁할 데 없으니까 여하튼 송 선생이 맡아줘야 되어.”
“그럼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이 없으니까 작업 시작되면은 매일 아침 출근 하다시피 해가지고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애기해주시면 돌 깎는 심부름은 하겠습니다.”

조건을 그렇게 걸어가지고 작업할 걸로 해신디. 조각 할려면은 비석 만드는 기공이 없는 돌이라든가, 기공이 크지 않은 치밀한 돌을 구해야해. 오라동 정실 위에 비석돌 캐던 조그만한 석산이 있는 걸 알아. 오라리 사람에게 소주 한 되 들엉 찾아가서 부득이 돌이 필요하니 비석돌 캐어난 자리에서 돌을 캐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사정을 하니까, “경허게.” 구두로 허락을 받았어.

내가 돌을 깨지는 못허니까 정실에 젊은 석공 찾아가지고 정실에 돌 깨는 허락은 받았으니까, 가서 25cm 두께로 30에서 44cm 크기로 돌을 캐달라. 크기가 10m에 6m니까 계산하면 500덩이 정도가 돼. 그걸 캐어 와서 그걸 손으로 깎아서 조립할 수가 이서.

송종원이 사용했던 도구들. / 사진=조환진
송종원이 사용했던 도구들. / 사진=조환진

마침 서울석재에 돌 절단하는 기계가 있었고 도남에 조그마하게 테라조 만드는 공장이 하나가 이서신디 기기 조그마한 절단기가 있었어. 도남에 찾아가서 사정사정 부탁허니까 사정은 알겠지만 도저히 일이 밀려서 잘라줄 수가 없습니다. 방법이 있나. 할 수 엇이 절단기를 만들어야 되겠다. 톱날은 사면 되니 톱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협창공업사 차 수리하는 데에 6촌 동생이 거기서 판금을 했는데, 차에 대해서 잘 아니까 그 동생에게 부탁해서 폐차장에서 자동차 엔진하고 자동차 틀을 구입해서 이동식 돌 자르는 기계를 만들었어. 그거 만드는 데 그때 돈으로 240만 원인가 들었어.

그걸로 내가 돌을 잘랐어. 나대로 돌을 잘라가지고 평상을 크게 만들었는데 그때까지 문 교수가 와서 한마디 말이 없었어. 절단기 만드는 것도 내가 만들고 그렇다고 인부 빌어서 하려면 인건비 지출 때문에 못하고. 작업 마무리되어 갈 때 서울에서 유리조각 하던 친구가 내려와서
돌조각 하는 거 배우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 밥 먹으면서 MBC 사옥 부조작업 마무리할 무렵에 심부름 좀 해줬지.

한꺼번에 그 면적을 다 못하니까 평상 위에 돌을 한 부분씩 차북차북 조립해 놓고 그 그림 보면서 볼륨에 따라 두꺼운 돌 얇은 돌을 조립하고 나니까 그 때는 내가 한숨을 쉬면서, “야, 이렇게 하면 되는거구나!” 생각해가지고 이젠 한번 쪼아봐야 되겠다. 진짜 건방지게 덤빈 거지. 이거 거짓말 같애. 이젠 되겠다. 야, 영허민 되는 걸 해가지고 돌에 그림다. 그리고 정 망치 가지고 딱 때리니까 돌이 받아주질 안 해. 그 돌이 그렇게 쎈돌도 아닌데 팅팅, 그자 받아치는 거라. 이상하다. 그걸 몇 차례 해봐도 안 받아줘. 완전히 거짓말 같은 얘기지.

그 당시 4인치 그라인다 쓸 땐데 그라인다를 대도 탁탁 차는 거라. 살짝 갖다 대어도 툭 대서 튕기는 식으로 받아주질 안 해. 이제 고민이 생긴 거라. 이젠 깎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신디 기구를 안 받아 주는데 어떵해. 그 기간이 5일이나 걸렸어. 아, 누가 이 작업을 맡아줄 사람이 이시민 통째 물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어.

아는 석재사도 엇고 어디 넘겨줄 사람이 없어. 고민고민하다가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는 거지. 내가 너무 경솔해졌구나. 아무 경험도 없는 내가, 조각이란 거 해보지도 않은 내가 이런 대작을 맡는다는 게 너무 경솔했다. 경허고 제주도에서는 처음 이루어지는 대형 작품임과 동시에 작품 내용이 삼성신화가 아니냐. 이건 일반 작품이 아니라 삼성신화 작품이다. 내가 너무 경솔한 태도로 임하게 됐다. 그걸 스스로 반성을 하고 어차피 내가 약속을 했고 넘겨줄 사람도 없으니 여하튼 이걸 해내야 된다. 평상시 듣던 얘기가 ‘정신일도 하사불성’ 내가 꼭 해내고 말겠다.

정말 이를 딱 물면서 결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 망치를 딱 대니

정말 이를 딱 물면서 결심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가지고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 망치를 딱 대니까, 그때 기적같이 정 망치를 받아주고 그라인더도 받아주는 거라. 경허연 그 작업이 진행이 되었는데, 그 생각하면은 정말 그때에 아찔해 났다고. 그렇게 해서 그 작업을 거의 다 하는 동안에 문 교수 가끔 들려도 지적하는 거 하나 엇고, 거의 다 됐을 때에 사람이 땅에 발을 디딘 곳에 그라인더로 선이 일자로 그어진 게 있었어. “이 선은 엇어시믄 좋으켜.” 그거 하나를 지적하는데, “예, 맞수다.” 허멍 그거 하나 지적 받아봤고.

다 만든 다음에 이제는 붙여야 하는데 내가 언제 붙여봤어. 수소문하니까 젊은 사람 두 사람이 왔어. 이 조각을 MBC외벽에 붙일 거니까 맡아주시오, 하니까 아, 걱정맙서. 소주 한 잔 사주멍 허난. 걱정맙서, 운반만 해다 주면은 어느날 왕 붙이랜 허민 붙이쿠다.

그때에 선금으로 6만 원인가 7만 원 달라고 해서 계약금으로 줬어. 돌 다 운반했으니 와서 붙여 주시오, 하니까 당장 하는 얘기가 돈을 더 요구하는 거라. 기억은 안 나는데 계약금 이상 더 돈을 달라고 하니까 내가 화가 나진 것 같아. 10만 원인가 더 달라고 하니까, “당신 그만 두쇼.” 해가지고 전화 딱 끊어 버렸어. 할 수 엇이 내가 스스로 습식으로 붙였다고. 그거 붙일 적에 MBC 박 사장님이,

“어, 송선생. 내려와서 쉬면서 해요. 이 건물이 총 얼마 공사인데 여기 생명이 바로 저 조각품인데 쉬면서 작업하세요.”

그때는 삼나무로 아시바(비계)를 했는데 공사가 거의 마무리 돼가니까 다른 쪽 아시바는 풀고 건물 앞쪽만 아시바를 매였는데 단단하지 않고 흔들흔들해. 그 위에 돌을 올리고, 물 날르고, 시멘트 비비고 하는 거를 서울에서 온 친구가 심부름을 했는데. 나는 그라인더 하나 가지고 올라가서 돌 하나하나 맞춰 가면서 그걸 붙인 거거든.

경해도 그걸 성공한 거야. 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많은 무게를 견디게 할려면 어떤 방법이 있느냐 말해줄 사람도 없고 의논도 안 해봤는데 그래도 그걸 해냈어. 제일 밑에는 앙카를 박아가지고 돌을 붙인 다음에 그것이 딱 접착이 된 다음에 올리면 그냥 올린 것 같지 않으니까 힘을 덜 받아.

제주MBC 사옥 외부 벽면에 설치된 송종원의 삼성신화 작품. / 사진=조환진
제주MBC 사옥 외부 벽면에 설치된 송종원의 삼성신화 작품. / 사진=조환진

돈 얼마에 하기로 계약한지 기억도 엇고 문 교수 작품 여러 개를 했는데, “얼마 드릴테니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면은 그 금액에 된다 안된다를 모르니까 실지 내 작업량이 얼마 되고 며칠 걸려서 저걸 만들어질 거니까 일당을 따져 가지고 얼마라야 될 건데, “그걸로선 안 되겠수다.” 한다든가, 난 그 작업량을 따져 보질 못허연. 지금까지 공사 맡으멍도 그 금액 따져보질 안 했어. 그 안에 재료값은 여하튼 되는 거고 노력은 내가 스스로 하는 거니까 내가 좀 손해 보면 되는 거고 좀 많이 준다고 하면 이익 되는 거고 이런 생각이지. “그거 이 돈으론 안 됩니다.”라고 한 번 안 해봤어. 모자라면 봉사한 거 되고 그 사람 도와 준 거 되고, 많았으면은 내가 덕 봤다 이렇게 생각되는 거고. MBC 거는 얼마 받아졌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거 하면서 공부가 많이 되었어. 그래도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으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허여.

작업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려서. 1979년 7월부터 1980년 3월까지 9개월. 그런 작품은 처음이거든 어디서 교육 받은 것도 아닌디. 1m에 60cm 짜리 모형을 보멍 그것에 10배 확대. 확대하는 방법도 뭐 아나. 연구, 연구한 것이 다루끼로 딱 짜가지고 1cm 간격으로 잔못 쭉 박아가지고 그것에 실로 버리줄을 매였어. 1cm 간격을 10cm로 확대해서 나대로 돌에 분필로 그림 그린 거라.

한편 생각허민 그걸 완성했으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되고 그때여 무슨 용기가 있어가지고 내가 그렇게 그걸 밀어내었는지. 그 다음에 그 기계가 쪼금 도는 게 힘이 약해가지고 그 당시 신제주에 농촌진흥훈련소라고 있어신디 그후에 폴리텍대학이 된 거라. 여기서 석공예 강사를 1년 동안 했는데 여기서는 자동차 관련 교사들이 있어서 거기에 절단기 끗어다가 손보면서 해나서. 지금도 부품 일부는 남아 이신디. 참, 그래도 지금은 도저히 못할 것 같은데 그때는 무슨 용기가 있어 가지고 나이도 어린 땐데 그걸 그렇게 밀어 나가졌느냐. 아마 그때는 젊어서 같아.

제주MBC 사옥에 설치된 송종원의 삼성신화 작품. / 사진=조환진<br>
제주MBC 사옥에 설치된 송종원의 삼성신화 작품. / 사진=조환진

화강석으로 해녀 군상을 만들다

Q. 해녀군상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해녀군상은 1981년도에 문기선 교수가 의뢰해서 만든 건디. 지금은 자연사박물관에 있어. 돌이 좋았으면은 더 깨끗하게 보일 텐데 돌이 조각하는 돌이 아니라. 나는 화강석에 대해서는 모르난 화강석 석산 하면서 수출업도 한다는 사람이 찾아 왔길래 조각할 만한 화강석을 좀 구입해 달라고 했더니 목포에서 도라지호 화물칸에 실엉 보내왔어.

아침 9시에 하역해야 한다고 해서 8톤 덤프 대절하고 갔지. 부두에 하역하는 크레인이 25톤짜리인데 들러내질 못허는 거라. 그걸 퍼내야 다른 짐 신고 5시에 출항해야 하는데 난리가 난 거라. 별 방법을 다 써도 안 돼서. 오후 되어야 부두공사하는 태창기업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작업은 안하고 쉬는데 가서 사정 애기하면서 도와 달라고 하니까 얼마 후에 크레인 기사가 와신디 시동 걸고 출발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30만원을 달랜 허는 거라. 하지만 돈 따질 형편이 안 되서 무조건 꺼내달라고 하고 사정사정해서 17만원 주고 꺼냈어.

송종원이 1981년 해녀군상을 제작하고 있다.&nbsp;&nbsp;
송종원이 1981년 해녀군상을 제작하고 있다.  
송종원이 자신의 해녀군상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nbsp;
송종원이 자신의 해녀군상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는 8톤 덤프가 제일 큰 트럭이었는데 17톤 되는 돌 한 덩어리를 실었는데 차가 안 맬라져서 다행이라.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도남에 가내공업센타에 가서 협창공업사에 새로 들어온 10톤 크레인으로 내렸어. 12톤짜리 돌을 주문했는데 17톤짜리 돌이 와분 거라. 크레인을 바짝 붙여서 들거니까 꿍하는 소리만 나민 무조건 얼른 차를 빼라고 해서 뭐가 잘 맞았는지 겨우 내렸지. 문기선 교수가 작은 샘플을 만들어 주었는데 화강암은 처음 다뤄보는 거난 광주에서 조각 기술자 두 명을 불렀는데 샘플을 보더니 못하겠다고.

왜 못하냐면 그런 작업을 안 해 본 거지. 해녀 군상 인체가 복잡하거든. 한 명은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가버리고, 한 명은 붙들어서 돌이 너무 크니까 적당하게 할석만 해달라고 했지. 그때 할석한 돌이 여기에 이서. 입자가 고운 흰색 화강석을 보내와야 되는데 돌을 잘못 보내왔어. 지금 자연사박물관에 있는데 좋 거무티티허여. 세밀하게 조각한 수 있는 돌이 아니라. 제작 기간은 상당히 오래 결렸지. 1981년 9월부터 1982년 2월까지 6개월 걸렸어.

현재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해녀군상 작품. / 사진=조환진
현재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해녀군상 작품. / 사진=조환진
해녀군상 속 해녀의 모습. / 사진=조환진
해녀군상 속 해녀의 모습. / 사진=조환진

돌이기 때문에 벌을 못해서 의사소통은 못하지만
나는 돌마다 자기 임무가 있다고 생각해

Q. 제주도 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돌을 활용하는 지혜도 좋은 거지마는 돌이 없었으면 어떤 방법으로 생활했을까? 돌이 인간 사회생활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이 되여. 역시 제주도에도 사람이 석기시대부터 돌과 더불어 살아오는데 중간에는 돌이 애물단지로 취급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이용하면서 살아왔거든. 이용을 하면서도 돌이 우리 생활에 이렇게 많이 기여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 돌은 그저 돌이고 내가 필요하니까. 돌멩이 주워다가 밭에 우마 방지하기 위해서 돌담이 필요하니까 쌓아서 활용한다는 정도는 생각하지마는 그게 있음으로서 그렇게 고맙다고는 생각을 잘 안 해.

돌 하나하나를 어떤 생명체로 생각을 안 했었지마는 본연의 꿋꿋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성질과 흔들리지 않고 자기 본분을 지킨다는 것은 알아. 밭담을 쌓을 적에는 쌓는 사람이 임무를 부여해 주는 거여.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고, 농사짓는 밭 같으면 바람도 좀 막아주고 그런 임무를 부여해가지고 담이 축조가 되었다는 거지.

돌담보다 더 큰 힘이 왔을 때는 넘어져서 자기 돌담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지마는 그건 자연의 섭리도 마찬가지. 인간도 일생 살다가 돌아가고. 돌을 깎아서 세웠다고 하면 거기에는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비록 돌이기 때문에 말을 못해서 의사소통은 안 되지만. 돌하르방을 성 앞에 세워 성을 지킨다는 임무가 부여되었을 적에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좋은 일하는 사람, 나쁜 일 하는 사람, 착한 사람, 안 좋은 사람들이 별별 걸 다 말하는 걸 듣고 보고 스스로 판단은 되겠지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중용을 지키는 거나 마찬가지.

난 돌을 다루면서 그런 생각을 해. 큰 돌을 만약 뿌술롸서 자갈이 되도 그 안에는 돌 성질이 그대로 있거든. 골재로 포장을 하면 포장하는 대로 기여를 하고 필요한 대로 다 쓸모가 있는 게 돌이고. 그러기 때문에 소홀히 에이, 뭐 아무렇게나 다룬다는 건 조금 생각을 해야 될 게 아니라. 다룰 적에는 신중을 기해야 된다. 돌은 많고 흙이 없으니까 농사 지영 살려니까 돌을 땅 파서 묻는 것은 흙을 그 위로 내앉혀주기 위해 가지고 밑에 숨어서 밭을 만들어주는 셈이 되거든.

송종원의 석공예 작품. / 사진=조환진
송종원의 석공예 작품. / 사진=조환진
송종원의 석공예 작품. / 사진=조환진
송종원의 석공예 작품. / 사진=조환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도로 포장하기 위허영 드르에 있는 잡석들 막 식거다가 처음에 깔았잖아이. 골재로 실어온 돌 중에서 돌 하나를 잘라가지고 지금도 가져있는 것이 있어. 골재로 깔아 버리는 돌 중에는 좋은 수석감들이 많이 이서신디 공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미처 생각 못허난 무조건 해다가 막 부술루고 해신디.

1970년대 1980년대는 제주도에서 수석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었거든. 70년대에는 다마리라고 해가지고 물 고이는 조그만한 호수석도 정말 귀한 건디 현무암이 아니고 먹돌 호수석. 그 돌을 보진 못하고 말만 들어신디. 저 신산공원 자연사박물관 앞에 사는 사람이 1971년도에 그때 오토바이면 지금 자가용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그 호수석 하고 자기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하고 바꿨다 이거야.

그 당시 탑동에 먹돌이라는 건 다른 곳에서 난 그런 돌 구경 못해봤는데 많이 돌아다니지도 안 했지마는. 새까만 돌. 마구로, 마구로 허멍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하던데. 그 돌 채집해서 구루마로 실어간 사람도 있어. 그 때는 누구도 말 안 할 때니까. 이젠 구하지도 못하고 힘들지.

제주도에도 그전에는 돌에 관심 갖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마을마다 필요한 대로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발담도 답고, 산담도 답고, 그렇게 했었는데 제주도에 석예사하는 사람들이 원래 토백이들은 없거든. 전부 육지에서 들어와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1970년대 초에 들어온 게 여기 충남석재, 그 다음이 호남석재, 지금은 제주도 각 지역에 많지.

제주 1호 명장 탄생

Q.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은 어떻게 받게 되신 건지요?

1991년도 8월인가 9월인가 도에서 갑자기 노란봉투를 들고 찾아 완 잠깐 말씀드리쿠다 하는 거라.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력과 능력 사회의 공헌도가 뛰어난 분들을 나라에서 명장 칭호를 준다는 내용인데 지금 각 도에서 하고 있는데 제주에서는 올릴 수 있을 만한 분은 몇 분 없어서 선생님을 찾아뵀다고.

“나는 그냥 좋아서 작업하는 사람이지 명장 제도도 모르고 굳이 신청하고 싶지 않다” 했는데 “제주도의 위상이 달린 문젭니다. 가지고 계신 자료만 주시면 제가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게 된거지.

송종원은 1991년 10월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제주 지역 첫 명장이다. / 사진=조환진
송종원은 1991년 10월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제주 지역 첫 명장이다. / 사진=조환진
제주 첫 명장 선정 소식을 전하는 보도.
제주 첫 명장 선정 소식을 전하는 보도.

정리된 자료도 별로 없는데 노동부에 근무하는 분이 와서 자료 제출을 독촉하게 되고 묻는 대로 대답하면 바로 받아 적고, 수상 내용도 다 정리하고 직원분이 정서해서 제출을 했지.

면접 심사로 서울에 올라가 보니 장공익 씨도 있었고, 제주는 제일 마지막 심사였는데 작업할 때 전동 공구 사용하느냐는 질문 하나만 했지. 그렇게 91년 10월에 41명 대한민국 명장 선출되고 그 때 나도 석공예직종 명장을 받게 된거지.

그때는 제주에 명장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그후 장공익 씨도 93년도에 명장을 받게 되고, 그 후로 항상 명장이란 칭호 때문에 더 부담이 되고 더 열심히 했어야 했지.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신 자랑스런 아버지
아들 송창훈

내가 어릴 적 아버지의 뒷모습은 항상 든든함이었다.

어린 아들에게는 무엇이든 뚝딱하고 다 만들어내시는 대단한 분이셨고, 우리 삼형제에게 언성을 한번 높이신 적이 없는 다정한 아빠셨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작업만 하셨다.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이 되셨고 인정받는 분이 되셨지만 책임감으로 더 일만 하시고 자신의 삶을 즐기지 못하고 연세가 드신 것 같아 항상 안쓰러운 마음이 크다.

석공예 명장 송종원. / 사진=조환진
석공예 명장 송종원. / 사진=조환진

올해 돌문화공원에서 돌하르방 제작 시연을 하실 때 딱 한번 도와드린 게 고작이었다. 분명 아버지 어머니는 많이 힘 드셨을 텐데 내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들 걱정을 하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다 아버지의 작업을 도와 달라는 말씀에 취업은 조금 미루고 일단 돕기로 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도 5~6m 높이에서 하루 종일 정질을 했다. 몇 달 간의 작업 중 너무 힘들어서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이 마무리되고 작품이 환성되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큰 희열을 느꼈다. 제주교육대학 정문 조형물이었다.

그 후 내가 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듬해 바로 미술학과에 편입을 했다. 아버지와는 조금은 다른 조각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작품을 하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작업을 하셨는지 더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편안한 여생 대신 고난의 길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신 자랑스러운 아버님께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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