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④ 비석돌 장인 조이전(1937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비석돌 장인 조이전(1937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 사진=조환진
비석돌 장인 조이전(1937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 사진=조환진

군대 갔다와서 부친과 형님 따라 다니며
일을 배워

Q. 비석 만드는 일을 시작하셨을 때가 언제쯤이신지요?

내 36년생인디 1962년도에 군 제대하고 즉시 시작했습니다. 스물세살에 비석 일을 시작했습니다. 1962년도쯤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생기니까 조상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겁주. 그 전에는 조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도 흉년이 들어갖고, 제가 군대 가기 이전에는 보리밥도 못 먹고 풀 뜯어먹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들에 나가서 풀 뜯어다가 그거 끓여가지고 먹다시피 했습니다. 바다에 가서 톳 해갖고 톳 데우쳐서 먹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조상님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조상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됐습니다.

Q. 어떻게 해서 비석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부친이 먼저 비석일을 했습니다. 형도 군대 갔다 와서 부친과 비석 일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목공일을 좀 하다가 군대 갔다 와서 부친하고 형이 비석 일을 하는 걸 보면서 같이 따라다니면서 하다가 부친이 돌아가셔 버리니까 형하고 같이 비석 일을 했습니다.

저는 6.25전쟁 끝나고 군대를 갔고, 형은 나보나 7살 많은데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6.25 인천상륙작전 갔다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서 부친 따라서 먼저 비석일을 했습니다. 제가 비석일을 시작할 때는 아버지 연세가 많아서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셨고 해서 형이랑 같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Q. 형님과 비석 일을 하실 때 일하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까?

마을에는 형님 말고 한 사람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비석 일을 해도 기술적으로 능숙하지 못하니까 남이랑 같이 따라다니면서 했습니다. 비석 일은 안성리하고, 사계리 사람 하나 하고, 덕수 사람 하나 하고 셋이서 각각 따로 비석일을 시작했습니다. 인성 사람도 조금 젊은 사람이 하나 비석일 하고, 그랬습니다. 사계리하고 아버지하고 덕수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젊을 때부터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가니
조상에 대한 비석 세우는 일이 많아져

Q. 비석 주문이 늘어났나요?

그 당시에는 조상에 대한 관심이 좀 적었는데 제가 하기 시작하면서 조상에 대한 비석 세우는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 각 읍면 별로 비문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전부 사귀어 갖고 그 사람들이 전부 저한테로 와서 비석을 가져가고 그랬습니다.

Q. 비석 만드는 돌은 어디서 구했는지요?

산방산. 제주도에는 비석하는 돌이 산방산에 있고, 저 동쪽으로 가면은 남원읍에 조그만 산에 저런 돌 나고, 대정읍 서쪽에 가면은 조금 나고 그랬습니다. 대정읍에는 지금도 있는데 석질이 산방산만이 못하니까 사용하지 안했습니다. 대정읍 거기도 오름, 쪼그마한 오름. 영락리에 있는 오름인데, 오름 이름을 잊어버렸네.

조이전 장인이 사용했던 도구. / 사진=조환진
조이전 장인이 사용했던 도구. / 사진=조환진

Q. 산방산에 가서 돌을 캐면 운반을 어떻게 했나요?

초창기에는 우마차. 자기 집에서 사용하는 우마차를 사용해서 돌을 싣고 왔지. 소를 많이 사용했고 말은 거의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Q. 산방산에서 비석으로 사용되는 돌을 어떻게 찾나요?

산에 가서 찾는데 저보다 앞에 다닌 사람들은 돌에 대한 내용을 잘 몰랐습니다. 제가 다니면서 돌 내용을 파악해 가지고, 아 요건 강한 돌이다, 아 요건 약한 돌이다, 요건 욜로 짜개면 짜갤 수 있다, 욜로 짜개면 짜갤 수 없고, 욜로 짜개야 한다. 그런 걸 전부 저가 인식해 갖고 후배들에게 전부 아르켜 주면서 돌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돌을 보는 눈이 있고
어디를 어떻게 캐면 된다는 걸 파악해

Q. 돌을 보는 눈은 아버지나 형님에게 배운 겁니까?

형님네는 대략적인 거 밖에 몰랐습니다. 이 돌은 어떵 짜갠다는 거. 왜냐하면은 돌이 처음 칭칭 다져서 돌이 되는 과정을 대략적으로밖에 모르고, 제가 전부 돌의 과정을 파악해서 아 요건 욜로 짜개면 쉽게 짜개지고, 요건 어떤 돌이라는 걸 전부 파악하게 됐습니다.

Q. 돌을 고르고 나면 캐는 과정은요?

돌을 캐는 과정은 돌 크기에 따라서 한 뽐 사이에 징 하나씩 박습니다. 징을 메로 내리치면은 징이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돌이 짜개지기 시작합니다. 돌은 땅 위로 노출된 것도 하고, 땅 밑에 묻힌 것도 캐고 그랬습니다. 땅에 묻힌 건 옆에 한쪽만 파면은 아 요건 욜로 짜개면은 쉽게 짜개지겠다 하면은, 그 쪽만 짜개면서 그쪽으로 전부 넘기면 전부 짜갤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짜갰습니다.

Q. 돌 캐는 곳은 개인 사유지에서 했습니까?

예. 주로 개인 사유지에서 했습니다. 주인 보고 이거 돌 캐고 냉중에 마무리 잘 해드릴 테니까 요거 캐게 해 주십시오 허여가지고. 주인 찾아가지고 가서 얘기하면은 아, 그거 캐어 가라고 하면은 캐어 오고 그랬습니다.

Q. 주인에게 돌 값은 지불했나요?

아, 주인도 왜냐하면은 밭에 돌이 얼토당토 않게 크게 있으면은 농사 짓기 괴로우니까 그냥 캐 가라고 주인이 허락을 해줍니다. 그 대신 마무리를 잘해주니까.

캔 돌은 굵은 나무에 얹어 줄 매고 땡겨서 내리고
운반은 마차에 실어 나르고

Q. 산에서 돌을 캐면 우마차 있는 데까지 운반을 어떻게 했나요?

산 조금 높은 데서 캐면은 삼바리로 갈라진 굵은 나무 위에 돌을 얹어가지고 줄 매고 사람이 땡기면은 이 나무가 쉽게 산 밑으로 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려왔습니다.

나무 위에 돌을 얹어 놓기만 하면은 돌이 무거우니까 옆드레 얼른 넘어나거나 허지 아니헙니다. 끄는 대로 그대로 따라오니까.

Q. 돌이 무거워서 마차에 실으려면 어려운데 방법이 있습니까?

그런 거는 돌을 마차에 실고 줄로 묶은 다음에 소를 마차에 매다니까 그전에는 마차를 마음대로 움직거릴 수 있으니까 어렵지 안 헙니다. 산에서 징 대고 떨고, 징 대고 떨고, 그 마음에는 하겐노로 쳐 가지고 떨고, 그래가지고 사용할 거만 해놓고 가볍게 만들어서 마차에 실렁 옵니다.

Q. 집으로 가져온 이후 작업은 어떻게 합니까?

옆에 큰 거는 하겐노로 치고, 족은 거는 전부 징으로 깎으고, 징으로 깎은 다음은 이런 모사리는 손가락 두 개만큼 넓은 납작한 징으로 쳐서 모사리만 뺑 돌아가면서 깎습니다. 가운데는 손가락 절반만큼 넓은 징으로 깎으고 그 다음에는 곰보망치라고 주먹보다 조금 긴 건데, 여기가 곰보로 되어 있으니까 이걸로 쪼으면은 여러 군데가 한꺼번에 쪼아지기 때문에 평탄해지기 시작합니다. 평탄되면은 냉중에는 덕수 솥뚜가리(덕수리 불미로 만든 무쇠솥뚜껑)로 배에 대고 밀면은 조금씩 튀어나온 거는 전부 깎아집니다.

그 다음은 공구샤로 밀고 그럽니다. 그거는 신삥이. 신삥이라고 하면은 초보자들, 초보자들한테 비석 한 장 솥뚜까리로 미는데 얼마 해가지고 우께 주지요. 이거 하나 하는 데는 얼마다 해서 만들어서 우께 주면은 그 사람들은 하루종일 그런 것만 맡아서 밉니다. 배에 대고.

곰보 망치(도드락 망치) / 사진=조환진
곰보 망치(도드락 망치) / 사진=조환진

Q. 비석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솥뚜껑으로 미는 것부터 배우는 겁니까?

예. 그건 아주 기술이 없는 사람들, 비석 깎으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은 솥뚜까리로 밀어서 일당을 벌고 그럽니다.

Q. 솥뚜껑으로 미는 일이 힘듭니까?

기술은 별로 필요 없지만 솥뚜까리를 배에 대고 계속 밀어야 하니까 힘들죠.

Q. 여자 분들도 솥뚜껑으로 미는 일을 했나요?

여자도 했습니다. 그 당시엔 돈벌이가 없으니까 여자도 하겠다고 해서 오면은 하나 하는데 얼마 결정되어 있으니까 밀고 돈 받아가고 그랬죠.

비석일 처음 하는 사람들은 솥뚜껑으로
하루 종일 밀어서 일당을 받고

Q. 얼마 정도 받았습니까?

지금 일당으로 봐서는 하나 미는데 하루 일당의 4분의 1 정도는 받아갑니다. 힘내서 잘 미는 사람은 세 시간이면 거의 하나 밀고 그럽니다. 잘하는 사람은 하루 세 개, 네 개 밉니다. 기술이 제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노니까 그거 해서 자기 용돈 쓰려고 하죠.

Q. 솥뚜껑으로 미는 것은 시끄러워서, 하는 데가 따로 있었습니까?

가까이서 하는데 솥뚜껑 하는 건 시끄러워도 내보낼 수가 없는거죠. 그것도 돈벌이니까.

Q. 솥뚜껑은 큰 거 작은 거 크기 별로 나눠서 사용합니까?

대부분 솥뚜껑은 전부 큰 겁니다. 가마솥은 안고 말치라고 해서 솥 중에는 큰 것 뚜껑.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Q. 솥뚜껑으로 밀고 그 다음 과정은요?

솥뚜까리로 밀고 공구샤로 밀면은 매끈해집니다. 공구샤는 아주 굵은 것을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손으로 잡고 밀다가, 이거는 그라인다에 메워서 뺑뺑 돌아가게 사용하는 건데 나중에 그라인더 나오니까 이런 걸로 쉽게 밀었죠. 공구샤로 밀면은 완성, 끝나는 겁니다.

Q. 당시 보통 크기 비석은 값이 얼마나 했었나요?

1960년, 1970년대, 그 당시 공무원 월급의 배가 되는 정도였어요.

Q. 비석을 안 세우다가 세우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자기네 조상을 잃어버릴까 봐. 공동묘지에 가면 산들을 많이 사용하니까 냉중에 후손이 자기네 조상 산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산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공동묘지부터 비석을 세우기 시작한 거죠. 개인 밭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한 거고, 처음에는 자기네 조상 잃어버릴까봐 표시 겸 세우기 시작한 거죠.

Q. 산에 가서 돌 캐고 끌고 내려올 때 노래도 불렀습니까?

안 불렀습니다. 힘든 일이라서.

조이전 장인이 비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조환진
조이전 장인이 비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조환진

동자석이나 상석,
향돌 같은 것도 주문 받아서 만들고

Q. 비석 말고 다른 것도 만들었습니까?

비석 위에 집을 만들어서 씌웠죠. 모자 씌우듯이 씌우면 비바람을 덜 맞아서 글자가 덜 망가지라고 씌우기 시작한 거였습니다. 동자석이나 상석, 향돌 같은 것도 주문에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무사 동자석을 무덤에 세워신고 허니. 동자석은 보기에는 자식들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개인 생각에 따라서 나는 조상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겁니다. 

Q. 비석 만들 때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과정은 무얼까요?

첫째는 산에서 돌을 선별하는 게 힘들고, 둘째는 집에 와서 돌을 반듯하게 깎아내는 게 힘들죠. 모양이나 규격이나 남이 보기에 이거, 아 깨끗하다. 이거, 잘 만들었다. 이렇게 할 정도가 돼야 잘된 거죠. 성격이 꼼꼼해야 모든 걸 다 생각하면서 만듭니다.

괴로운 일이다보니 우리 안사람도 비석 사업을 도왔습니다. 저녁에 비석 운반할 때 산으로 마차 끌어다주는 걸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괴로우니까 나중에는 탈탈이(경운기) 이런 게 나고 하니까 탈탈이 운전수에게 몇 시에 와서 이거 실어가라고 많이 했죠.

Q. 비석을 사러 오는 게 개인인가요, 비석에 글씨 새기는 업체인가요?

주로 개인적으로 자기네 조상의 비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러옵니다. 문중의 책임자들이 여럿이 사러 옵니다. 사러 와서 자기 집안에 것 전부 다 이제 주문을 합니다. 주문을 하면 저는 주문받아서 조각하는 사람을 불러서 조각해달라고 주고 그랬습니다.

Q. 비석 작업을 했던 장소가 여깁니까?

요 밑이었는데 집으로 도로가 나버려서 여기로 왔는데. 요 밑에 창고 크게 해서 그 안에서 소소한 거 전부 가공했습니다. 우리 집은 작았지만 창고는 15평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서 딴 건 일절 안 하고 돌 깎는 일만 했으니까. 조각하는 사람이 여기 와서 조각하기도 하고 저희들이 이제 비석을 만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날 좋은 날에는 밖에서 만들고 우천 시에는 창고 안에서 만들고 그랬었죠.

그때는 집에 여러 사람이 와서 전부 일했죠. 제가 맡아서 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은 전부 일당 주고 시켰죠. 많을 때는 나 말고 세 사람, 나까지 네 사람이 같이 돌도 캐고 비석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술이 모자랄 때는 나 밑에서 나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고 기술이 좀 나아지면은 이건 너대로 해라, 해 가지고 내보내고 그랬습니다. 한 1년 정도 해서 어느 정도 익숙어서 자기대로 할 줄 알면 독립을 시켰죠.

글씨는 조각하는 사람, 각자장에게 맡기면
그 사람이 글씨도 쓰고 새겼지

Q. 글씨는 집에서 새겼습니까?

글씨는 조각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버리면 조각하는 사람이 맡아서 글씨 쓰고 그랬습니다. 저희 작업장 한쪽에서 많이 새겼습니다. 비석을 자기네 집에 가져가서 조각하는 사람은 저 성산포에 있었고, 화북에 오태국이라고 있었고, 광양에 오상욱이라는 조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서쪽으로 오면 애월에 배두환이 있었고, 한림에 오면 양만철이가 있었고, 그 외에 가까운 동네에서는 저희 집으로 와가지고 조각하고 그랬었습니다. 거긴 거리상으로 머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주문해서 어느 정도 크기로 비석을 만들어 달라 하면 크기에 따라 만들어주면 여기서 조각하는 사람도 있고 집에 가서 조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랬습니다.

Q. 다른 마을에는 조각하는 곳이 없었습니까?

남원이나 서귀포에서는 저희 집으로 찾아왔죠. 거리가 먼 사람들만 조각하는 사람들이 여기 돌을 차서 차로 실어가서 조각했죠. 성산, 화북, 제주시 광양, 애월, 한림, 협재 이런 데 전부 있었습니다. 여기 돌 가져다가 자기 창고에서 조각하고 했습니다. 고산은 가까우니까 여기 와서 얼마짜리 해달라고 해서 여기로 비문 갖고 와서 맡겨두고 가고. 먼데 사람들만 비석을 사고 가서 조각하면서 돈 벌고 또 비석에서도 이익을 봤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비석일이 참 많았습니다.

Q. 비석일은 언제까지 하셨습니까?

1962년에 시작해서 15년 동안. 그 정도까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1977년도쯤에 그만뒀습니다. 그 이후로도 비석은 만들어서 세웠지만 그만 둔 이유는 제주도에 비석이 많이 소모되어 가니까 장사꾼이 육지부로 나가서 오석, 아주 강한 걸 사가지고 배로 실어 와서 오석을 막 퍼트려 놨습니다.

오석이 강하니까 사람들이 아, 이건 강한 돌이다 해서 눈독을 들이니까 여기 거는 사라졌습니다. 육지에서 운반해서 들어오니까 산방산 돌보다 오석 가격이 더 비쌌죠. 가격이 비싸도 더 강하니까 돌이 허물어지지 않으니까. 글자를 한 번 파노면은 그게 비바람에 망가지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Q. 비석일이 제일 활발할 때 이 동네에 또 다른 업체가 있었습니까?

크게 하는 데는 저 밖에 없고 나머지는 좀 염가로 해서 한두 장 팔리고 그럴 정도지 그렇게 많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조각하는 사람들이 누구에게 가면은 전부 알아서 해준다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나한테만 와서 맡기니까 다른 사람은 별로 맡아서 하질 못했습니다.

비석을 활발하게 만들 때 사계리나 덕수리 이런 데서도 제가 만들어 버리니까 저 말고 만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계리도 없었고 덕수리도 없었습니다.

거의 독점을 했다고 할까요. 저는 돌의 내용을 전부 파악했기 때문에 글자 파는 사람도 글 파기도 쉽고 돌도 비바람에 덜 깎여진 돌. 저는 이런 돌만 찾아서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돌의 내용을 전부 파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었지

Q. 계속 형님이랑 같이 비석을 만드신 겁니까?

어느 정도 기술이 능숙해지니까 사람들 데려가지고 저만 했습니다. 저는 비석일을 배운 사람들에게 일을 나눠 줬습니다. 주문이 많으니까 얼마 크기로 만들고 집어넣으라고 하면 그 크기로 만들어서 가져오고 그랬습니다. 그 정도 비석은 상당히 큰 것 같지만, 커보여도 저런 건 뭐 혼자 힘으로 또 젊을 때니까 웬만한 건 힘으로 다 했는데. 요즘은 뭐 그런 힘이 어디 갔는지.

일본 교포가 이 넓은 밭을 문중에 희사해서 엄청난 땅을 묘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산(무덤) 없는 데는 밀감나무 심어서 농사짓다가 산 쓰게 되면은 밀감나무 캐서 이용하고.

형님하고 15년 동안 계속 같이한 것은 아니고, 형님도 친구들 있으니까 친구들하고 같이하고 그랬습니다. 이웃집 되다시피 가까운 데서 했습니다. 그 당시 해병대를 갔다 오니까 술을 워낙 좋아해노니까. 술 좋아하는 형님 인도하느라고…, 그 당시에는 전쟁 상황이니까, 술을 억지로 마시고 나가라고 했다고 형님이 그러던데. 술 안 먹으면 무서워가지고. 사람이 죽는 판이니까.

Q. 돌 캐러 다니고 비석 만들 때 크게 다쳐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적은 없고 집에 과수원 들어가는 올레길 만들면서 다쳐났습니다. 올레길 하면서 큰 오겐노(큰메)로 징 대고 징을 치다가 바로 안 쳐져서 징의 귀투머리 쳐지니까 징이 깨져서 파편처럼 날아와서 여기 허벅지 안쪽에 꽂아져가지고. 피는 계속 나고 해서 한 손으로는 여기를 눌르고 집에 와서 서귀포 갔는데, 서귀포 병원에서 가서 박힌 쇠를 빼달라고 하니깐 빼기는 고사하고 혈관까지 잘라버려서 온몸이 전부 피고. 자기는 쇠 박아진 걸 못 빼겠다고 해서 제주시에 가서 뺐습니다. 처음부터 못 빼켄 허지, 빼어지켄 행 그것 때문에 피가 엄청나게 나고 그런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조이전 장인. / 사진=조환진
조이전 장인. / 사진=조환진

Q. 비석 일 말고 농사도 하셨나요?

비석일은 성수기나 비수기가 없었습니다. 일 년 내내 비석 일을 했으니까. 경해도 농사도 조금 했습니다. 과수원 했습니다. 귤밭. 비석일 하면서 돈 벌어서 과수원도 크게 했습니다. 수입은 비석일이 더 좋았지만 비석일을 못하게 되니까 밀감 과수원을 한 거죠.

Q. 몸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힘든 일이니까 마스크 쓰면 답답해서는 일 못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돌가루를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주문이 밀릴 때는 야간 작업 하게 되면 집 안에서 불 켜면서 일하니까 징 한 번 때리면 돌가루가 날릴 것 아닙니까. 돌가루가 날리면 코로 많이 들어가니까 돌가루를 많이 먹었죠. 그러면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 돼지비계 먹고 돌가루를 몸 밖으로 내치지 않으면 폐가 망가진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서 미리 조심해서 지금 건강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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