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3)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도 
한국 시월은 맵지 않았네

맨발로 종일을 걸어도 
시월 들길은 아프지 않았네

차 시간 일분을 앞두고 
울지 않던 
그대가 미웠네

/2004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시골 버스터미널엔 사람 냄새가 정겹습니다. 허름한 자판기에 동전 두 개를 넣으면 커피와 프림 설탕이 알맞게 용해된 ‘잔칫집 커피’가 종이컵에 채워져 나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맛이 시골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초로에 접어든 어머니의 걸음걸이가 하나같이 비슷합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논과 밭일에 전신의 힘을 모았던 삶의 모습을 시골 어머니들의 걸음걸이에서 읽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통일된 파마머리의 헤어스타일! 바로 한국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서 오늘까지 우리 농촌을 지켜온 주역이 저들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모습에는 우리 어머니의 모성애를 다시 읽습니다. 흙과 농촌을 가꾸며 자녀를 공부시키고 군에 보냈던 어머니의 사랑을 읽습니다. 개찰을 마치고 완도행 정류소 앞 나무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건너편 순천행 버스 입구에 한 젊은 남녀의 석연치 않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긴 머리 아가씨는 연신 생글거리며 뭔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고, 어깨에 가방을 걸친 짧은 머리 총각은 고개 숙인 채, 아가씨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우울한 모습으로 시멘트 바닥에 ‘발 긋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출발 시간이 됐는지 버스 기사가 차에 오르자 그 ‘발 긋기’만 하던 총각이 버스에 올랐습니다. 아가씨는 총각을 향해 이별의 손짓을 했지만 총각의 답례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버스는 강진 터미널을 빠져나갔습니다. 한참이나 버스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 아가씨는 돌아서서 돌담 밑으로 가더니 쭈그려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오래도록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이별의 이유는 내가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차 시간 일분을 남기고도 한결같이 명랑한 모습 속에 감췄던 아가씨의 뒷모습이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철을 만난 코스모스가 그 돌담 곁에서 혼신을 다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더더욱 공교롭게도 오늘의 주인공 고추잠자리가 코스모스 꽃송이에 앉아 그 아가씨의 흐느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픔을 참고 참았으면 멀쩡하던 잠자리 몸빛이 저토록 빨갛단 말인가? 고추잠자리 몸빛이 어쩌면 아득바득 아픔을 참았던 그 아가씨 속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간 곳 마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때 그 잠자리야말로 「고추잠자리」 라는 시 한 편을 건네주고는 오래도록 내 기억의 보따리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이별의 아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얼마나 속이 아팠으면 몸빛이 저토록 붉었단 말인가?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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