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22) 이제 논의는 일단락, 에너지 낭비 없이 산적한 과제 집중해야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정책이나 제도는 없다. 기초자치단체의 도입 여부는 그 지역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정책이나 제도는 없다. 기초자치단체의 도입 여부는 그 지역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형 행정 체제 도입을 위한 공론화 추진 연구용역’이 추진되고 있다. 그 갈래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요약하면 기초자치제를 부활할 것인가? 부활한다면 행정(자치)구역을 몇 개로 개편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지속적인 추진 여부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도민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론적인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용역에 들어갈 내용은 이미 다 나왔다고 보는 사람이다. 15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이면서 용역으로 하지 않아도 답은 뻔하다. 숙의형이니 뭐니 하면서 토론하지 않아도 지난 수년에 걸쳐서 논의된 대안 중에서 추출하면 될 일이다. 원래 사회·정치문제 등에 대한 답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축적된 사실적 현상에서 해답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원론적 차원의 논의가 문제의 시작이고 답이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는 오늘날까지도 멀쩡하게 광역과 기초 2개의 자치 계층을 유지하고 있는데 왜 제주도만 이 문제를 놓고 도지사 선거 때마다 논란이 되느냐는 것이다. 제주도가 잘 나서인가? 아니면 못나서인가? 중앙정부의 비호 때문인가? 아니면 하대 때문인가? 지난 17년 동안 채택·유지돼온 제주특별법은 진공상태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제도는 그 사회의 수요에 대응해서 형성된다. 그래서 성공한 제도는 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되기 마련이다. 이런 접근을 학문적으로는 역사 제도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통용·적용되는 일반자치가 아니고 왜 제주도만 특별자치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일방적인 힘으로 강요한 것은 아니다. 제주도민들 절대다수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찬성해서 나온 결과이다. 여기에 역대 도지사들의 몫도 컸다. 신구범 지사는 제주국제자유도시에 대한 기획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연속선상에서 우근민 지사는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제도적인 밑그림을 그렸고 김태환 지사는 오늘날 형태의 통합적인 법 제도를 완성했다. 이분들의 노력만으로 오늘날의 특별자치도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중앙정부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은밀한 시도가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주도를 홍콩과 같은 국제자유도시로 만들자는 중앙정부의 생각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부터 그 논의가 됐었다.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영국의 홍콩 조차 기간이 끝나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 홍콩이 해왔던 산업적 역할을 제주도가 대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제주를 자유항 등 국제자유도시로 추진할 구상을 했다. 그러나 현실화 되지 못했다. 그 후 제주국제자유도시는 박·전 정부 때의 구상보다 그 규모나 범위는 매우 협소해졌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 와서 비로소 오늘날 형태의 국제자유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도적 진화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는 시작은 위로부터 동원된 어젠다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제주국제자유도를 제주 산업구조 형성정책의 하나로 추진했다. 거기에는 관광과 1차 산업 중심으로 형성된 제주도의 단순한 산업구조를 어떻게 고도화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겨있다. 제주도가 국가적 관점에서 개방화 등 세계적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지역적 관점에서는 감귤 중심의 1차 산업과 내국인 위주의 관광산업을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는 곧 입법으로 구체화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제주특별법. 2006년 2월) 제정으로 그 기틀을 마련했다. 이 법이 지향하는 바는 주민자치라는 민주성보다 경제적 능률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능률성이냐? 그것은 기존 제주의 단순한 산업구조를 어떻게 능률적으로 조정하고 촉진할 수 있는 제도의 창출에 그 입법적 의도가 있다. 주요한 몇 가지를 거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새롭게 출발한 노무현 정부가 이 법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제주도를 국가발전 전략의 거점도시로 삼고, 제주도에만 유일하게 사람·상품·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기업활동의 편의를 보장할 수 있는 특례적 지위(special Status)를 부여했다. 여타 광역 시도에는 없는 특례조항을 제주특별법 속에만 담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적 근거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특례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투자진흥지구 제도와 부동산 영주권 제도 활용, 무비자 입국 확대, 영어교육도시 조성, 등록세율 조정권 활용, 시내면세점 설치·운영. 인허가 의제 처리 등 10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할 기관으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를 설립하고 그 운영 재원은 공항 내국인면세점 수입을 근간으로 삼도록 했다. 면세점 수입은 연간 1000억원이 넘는다.

둘째는 산업적 측면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하는 데 있어 수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주형 행정체제를 구축했다. 두 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는 기존의 제주도 2개의 자치 계층 중에서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을 없애고 도 단위의 광역자치단체 하나만 뒀다. 과거 법인격을 갖춘 도와 시·군 두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인허가 단계가 한 단계로 축소됨으로써 인허가 기간이 단축되고 공무원 수도 감소하는 등 거래비용을 상당 정도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을 이룬다. 그 당시 발전연구원은 하나의 자치 계층으로 갔을 때 공무원 수 감소, 행정청사 축소 등 매년 800억원 정도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편익적 근거를 제시했지만, 임명제 행정시장 도입 등으로 인해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 자치분권 차원에서 제주도지사에게 엄청난 권한이 집중되는 구조가 마련되었다. 기존 제주도의 산업구조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막강한 권력이 도지사에게 부여되었다. 이른바 조례 특례규정이 그것이다. 이 규정 제정으로 일반법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항에 대해 제주도지사가 조례로 특정 사항을 규정할 수 있도록 했다. 예컨대 제주자치도 세율은 지방세법에 따른 세율에도 불구하고 도 조례로 특정한 범위 내에서 세율을 가감할 수 있게 했다. 도 조례가 일반법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을 제주도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제주특별법에만 부여하고 있는 권한이다. 이러한 권한을 통해 제주도는 개발사업 인·허가 기간 단축, 지역 특화성 산업정책 등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자치분권 영역이 확대되어 7개의 특별행정기관이 제주도로 이양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지사에게 부여된 권한의 수(일반 광역단체장의 2.72배 정도)가 늘어나고 질적으로도 그 권한 강도 또한 전국에서 가장 세다. 과거 시장·군수의 권한이 전부 지사에게 귀속됨으로써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장 중 제주도지사만큼 힘 있는 자치단체장은 없다.

특별법이 시행된 후 그 명암에 대해서는 앞으로 엄격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형식적인 면에서 그간 6단계의 제도개선을 통해 4680건의 중앙행정 권한과 특례를 받아온 것은 일단 환영할만한 일이다. 경제적 지표면에서도 논쟁의 소지는 있지만 괄목상대한 성장을 달성했다. 하나의 측정지표만 예로 들어보자. 특별자치도 출발 이후 17년이 지난 제주의 지역총생산 연도별 증감률을 보면 특별자치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2011년(6.9% 성장)부터 2017년(4.6%)까지 전국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역기능도 만만치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왕적 도지사의 출현이다. 이것은 이미 제도형성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애초는 자치 계층은 하나, 행정 계층은 2개 즉 도→대동(大洞) 형태를 갖추자는 것이 대세였는데 이와는 반대로 자치 계층은 하나, 행정 계층은 도→행정시→읍·면·동 3개 체제라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김태환 지사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행정시장을 지사가 임명할 수 있게 함으로 도지사의 힘은 더욱 막강해졌다. 그야말로 도지사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이다. 제주도만 유일하게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자치조직권까지 가질 수 있게 됨으로써 공무원 수도 특별자치도 출범 이후 무려 1000명 가까이 늘어났고 행정기구도 엄청나게 팽창되었다. 모든 권력이 도지사에게 집중되는 이른바 ‘제왕적 도지사’ 현상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민들이 특별자치도를 통해서 바란 바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제왕적 도지사를 견제하기 위해서 지방의회 의원을 과거처럼 선출할 필요는 없지만, 행정시장만큼은 주민직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도민들의 의견이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욕구가 도지사 선거를 기점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010년 6.13 지방선거에 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우근민 前 지사는 당선되면 임명제 행정시장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선된 우 지사는 조례를 제정, 이에 근거해 행정시장 직선제 도입을 검토할 행정체제개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 지사의 권유로 나는 이때 행정체제개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우 지사는 위원회가 채택한 안(案)을 2014년 지방선거부터 적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애쓰게 작성된 보고서는 도의회의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사문화된 문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희룡 후보가 도지사로 당선된 2014년 6.13지방선거에서도 행정시장 직선 문제가 또 다시 선거 쟁점되었다. 이번에는 의회가 나서서 조례를 제정, 적합한 행정시장모형을 제시할 행정체제개편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때도 나에게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번은 지사가 아니고 의회에서 나를 추천했다. 우 지사 때는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꼭 바람직한 행정시장모형을 결말지어야 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했다. 위원들도 열정적으로 그 과제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분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그러나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 나로 좌절되었다. 위원회 보고서도 우 지사 때와 마찬가지로 의회에 가보지도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분노가 노도처럼 가슴을 때렸지만 힘없는 지식인의 운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지식인들이 정치인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 지사와 원 지사 때 제출된 행정체제개편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기조는 같다. 보고서의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행정상의 능률적 운영을 위해 4개의 행정시를 둔다. 제주도 지형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해보면 동·서·남·북을 중심으로 행정시를 설치한다. 여기에다가 지역 간 산업구조의 동질성 등도 고려했다. 이러한 기준을 참작하여 행개위는 4개의 행정시를 제시했다. 즉 동 제주시(조천·구좌·성산·표선·남원·우도), 서 제주시(애월·한림·한경·대정·안덕·추자), 제주시(현재 제주시 동 지역), 서귀포시(현재 서귀포시 같은 지역) 4개 지역을 유력한 대안으로 선보였다. 그야말로 행정적 기능의 효율화를 고려한 대안이다. 

행정시장은 주민직선으로 선출되고 당적을 보유해서는 아니 된다. 행정시장 선거관리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맡아서 한다. 행정시의 권한에 대해서는 항목별로 제주특별법에 열거주의 형태로 자세히 나열 규정한다. 그중 행정시의 중요한 권한 사항만 예시적으로 적시하면 행정시는 조례발안권, 4급 이하 인사권, 예산편성권 등을 가지며 행정시의 재원 염출 근거 및 행정시에 귀속될 예산 배분 기준 등을 명확히 규정한다. 요약하면 적어도 행정시장에게 광역시나 특별시의 구청장에 따르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우근민·원희룡 지사 때, 정성을 들이고 어렵게 만든 행정체제개편위원회 보고서가 입법화되지 못한 체 불발로 끝난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그러면 위원회 보고서가 왜 ‘허명의 문서’가 됐을까 생각해보자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지사(우, 원) 다 행정시장 직선제를 꼭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부족했다. 단지 행정체제개편위원회를 두어 도지사 선거 때 강력하게 제기되었던 행정시장 직선제 여론을 면피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다. 시장이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면 그 권력은 도지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시장을 선출하는 것 자체가 직선 시장에게 상당한 정도의 힘을 부여해주는 제도적 근거로 작용한다. 이러한 힘 있는 시장을 반가워할 지사가 몇이나 있을까. 우 지사나 원 지사는 실질적으로는 직선 시장제를 수용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시장 직선을 선호하는 도민여론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시장 직선제를 도입할 것처럼 변죽만 울리다 말았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자치 근본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도의원들의 입장도 문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초의회가 없는 지방자치는 지방자치가 아니라는 견해가 힘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심하게 말하면 교조화되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방자치는 본래 모범답안은 있어도 정답은 없다. 영국에서는 지방자치의 면적은(자치구) 마차로 한나절 갈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정했다. 요새는 마차가 자동차로 대치되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의 경우 자동차로 한나절 갈 수 있는 거리는 어디서 어디까진가. 지방자치의 면적 기준이나 계층이란 것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창의적으로 고안해놓은 제도이다. 그 정답은 시대정신, 통신·기술의 발달, 해당 지역의 물리적 여건, 주민들의 자치 수준 등을 고려해 찾아야 한다. 모범답안은 있을 수 있지만, 정답은 제각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지방자치 모형이 있다. 광역자치단체의 경우, 자치 계층의 수가 두 개인 곳이 다수이지만, 사정에 따라 1개의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3개의 경우도 있다. 의회는 없고 시장만 있는 예도 있고, 그 반대로 의회만 있고 시장은 없는 예도 있다. 

제주도가 특별자치도로 가면서 광역의회 선거구는 과거 기초자치단체 하의 선거구를 거의 그대로 승계받았다. 단지 우도와 추자 선거구만 폐기되어, 다른 선거구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지금 도의원 숫자가 40여 명까지 늘어난 것이다. 기초자치제의 부활만이 지방자치의 금과옥조처럼 주장하는 도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제주도에 기초자치를 부활시키려면 현재의 도의회 선거구 수를 적어도 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하는데 도의원들은 이에 동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기초단체 부활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의원들은 솔직해져야 한다. 기초자치를 부활, 일반자치로 복귀하려면 도의원들 스스로 자신의 선거구를 날려 보내야 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더욱이 도의회가 오늘날까지 스스로 시대착오적인 교육의원 제도도 폐지하지 못하면서 동료의원들의 지역구를 없앨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인구수가 경기도 부천시보다 작은 제주도가 현행의 도의원 선거구를 설정한 것은 기초자치단체 포기에 따른 중앙정부의 보상적인 의미가 크다. 앞으로 제주도가 기초자치 부활로 간다면 특별자치도라는 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렵게 얻은 특례조항이나 제주도의 분권적 권한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구역 모델로 현 국회의원 선거구를 적용한 '3개 행정구역 개편안(왼쪽)'과 기존 제주시·서귀포시를 포함해 동제주군·서제주군을 나누는 '4개 행정구역 개편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구역 모델로 현 국회의원 선거구를 적용한 '3개 행정구역 개편안(왼쪽)'과 기존 제주시·서귀포시를 포함해 동제주군·서제주군을 나누는 '4개 행정구역 개편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정책이나 제도는 없다. 기초자치단체의 도입 여부는 그 지역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기초자치단체의 부활을 지방자치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치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범답안이 될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니다. 모범답안과 정답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행정시장 직선제 논의 때 제주의 국회의원들이 취했던 입장도 한번 복기할 필요성이 있다. 이들 중에는 정치적 대의보다 정치적 라이벌만 키워준다는 측면에서 행정시장 직선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육지의 경우, 시장·군수가 국회의원선거에 도전해 현직 국회의원을 내모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초자치 도입은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행정시장 직선제의 경우는 정당공천이 근본적으로 배제됨으로써 국회의원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이 어렵지만 기초자치단체 도입의 경우는 국회의원이 기초의원 후보, 시장·군수 후보 공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 도입을 크게 환영할 것이다.

기초자치제의 도입은 과거 17년 동안 관행화돼온 특별자치도의 권력의 틀을 한꺼번에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일반자치로의 복귀 과정에 중앙정부와의 충돌, 새롭게 등장한 시장·군수와 도 간의 권력 배분을 둘러싼 갈등, 주민들의 부적응 등 많은 문제가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특히 중앙정부가 제주도의 일반자치 시대로의 복귀를 과연 수용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격절된 섬이고 인구 규모도 적정하고 한·중·일의 중심에 있는 지경학(地經學)적인 이점 등을 높게 사서 중앙정부가 제주국제자유도시 추진을 선도한 것이지, 제주도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요새 특별자치도를 앞세우고 있는 강원도나 전라북도에도 특별자치도라는 명칭을 주었지만, 제주도에 준하는 정책 특례나 분권적 권한까지는 주지 않았다. 줬다고 해도 그 수준이 제주도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앞으로도 제주도에 버금가는 분권 조치가 이 두 지역에 부여되기는 난망할 것이다. 

중앙정부로부터 분권적인 특혜를 가져오는 작업은 절대적으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중앙정부는 분권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격하다. 이 저지선을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봉건적인 문화를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주민자치 경험도 짧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지방자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그래서 나는 특별자치도의 틀 내에서 할 수 있는 적실한 대안을 ‘행정시장 직선제’라고 봤고 중앙정부도 이 선까지는 양보할 것이라 생각해서 행개위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것 자체도 지사나 의회 등으로부터 내발적인 동력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했다. 하물며 기초자치제 도입은 제주특별자치도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상당한 격랑이 예상될 것이고 실행이 된다 해도 당분간은 행·재정 피해도 상존할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 행개위를 운영하면서 행정학자로서 느낀  엄중한 현실이다.

어떻든 용역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했으면 좋겠다. 제주에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주다. 지방소멸, 저출산, 고령화, 산업정책의 전환 등 제주도가 가야 할 길은 바쁘고 멀다. 서귀포시도 지방소멸 대상으로 보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주의 인구가 조금씩 줄어드는 현상이 불길한 예고라면 예고다. 행정체제 개편 문제로 사회심리적 에너지를 더 이상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행정체제 개편 하나가 제주의 미래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초자치 단체를 도입하지 않게 되더라도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를 잘 활용하면 보석 같은 진주를 얼마든지 캐낼 수 있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 내무린다(동네  무당 나무란다)'고 제주특별자치도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물의 앞뒤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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