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4) 길

 

길 

한 세상 사는 것이 다 길이라 하는 것을
물빛 글썽이는 산만 보고 가노라면
세월은 소롯길로 와서
억새꽃을 피웠네

노을 녘 산마루엔 하늘만한 뉘우침이
웃자란 억새밭에 하얗게 눕던 날은
길 잃은 조랑말 한 마리 
산을 향해 울었다

반평생 굽잇길을 먼발치로 따라와서
때로는 이마 섶에 주린 듯 돋는 별빛 
그 순명 비포장길에서 
삐걱이는 
내 수레여

/1987년 고정국 詩

/ 사진=고정국

#시작노트

맨 처음 땅 위에 길을 낸 것은, 하늘의 심부름꾼 바람이었을 겁니다. 바람이 뚫어놓은 길로 물이 흘렀고, 그 물가엔 파릇파릇 초목이 자랐을 겁니다. 여기저기 초식동물이 모여들었고, 그 발자국 따라 육식동물과 사냥꾼의 발자국이 포개지면서 ‘길’이 탄생했을 겁니다. 한참 뒤에야 공자도 석가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 하면서 그 길 따라 걸었을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과거사를 이야기할 때, 가난과 역경을 먼저 들추기 마련입니다. 그 흉터가 개인의 것이든, 시대적인 것이든 그 역경의 질량만큼 이야기 속에 아픔이 묻어납니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어서 작품 대부분이 시련과 좌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의 절반을 넘기도록 끈질기게 따라오는 병마와 가난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내 슬픈 영혼은
창작이라는 동아줄에 매달려 오래도록 대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글쓰기를 통해 내가 떠나야 할 길이 아닌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전혀 다른 길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동물, 식물, 산, 바다, 바람, 섬, 별 그리고 하늘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자기의 길을 따라 내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정녕 그러한 대상들이야말로 내 생의 목격자이며 이 시대의 목격자이며 우리 역사의 목격자임을 깨닫게 되면서 한층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갈 데까지 가서도 
갈대는 서 있다
저 끈질긴 사람들의 슬픔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이 가을 날
올 데 까지 와서도 갈대는 
무리지어 서 있다

한반도의 저 
끈질긴 슬픔

/1993년 고정국 詩

「가을소묘 2」전문

삶의 길이든 문학의 길이든 ‘길’은 한 존재를 해방시켜줄 것 같지만 결국 그 안에 모든 것을 속박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심력에 반발하려는 역동성 에너지야말로 글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시대정신이란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항시 삐거덕 거리면서도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나의 생의 수레는 그래서 늘 외롭고 고달프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길’이라는 어휘의 뉘앙스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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