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도민연대, ‘1947년 3.2, 3.10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토론회 2일 개최 
수형인명부 속 피해자·유족 212명 면접 조사...“최소 80명 4.3희생자 미신고”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일 오후 2시 제주시 하니크라운 관광호텔 회의실에서 ‘1947년 3.1사건과 3.10총파업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일 오후 2시 제주시 하니크라운 관광호텔 회의실에서 ‘1947년 3.1사건과 3.10총파업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4.3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평가받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 발포 사건(3.1사건)과 3.10총파업. 섬 전체를 뒤흔든 움직임의 선두에는 20~30대 제주 청년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는 역사적인 정당성을 오늘도 간직하고 있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는 2일 오후 2시 제주시 하니크라운 관광호텔 회의실에서 ‘1947년 3.1사건과 3.10총파업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는 3.1사건과 3.10총파업으로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의 희생 사실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하면서 명예회복의 근거까지 마련하기 위한 자리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기마경찰이 6세 가량 어린이를 치면서 현장에서 항의가 나왔고,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 발포에 분개하면서 3월10일부터 제주 전역에서 민·관 총파업이 진행됐다. 관공서,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노동자, 각급 학교, 미군청정 통역관 등 공무원, 회사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제주경찰사’는 파업 규모를 166개 기관·단체, 참가자 4만1211명이라고 기록한다.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미군 정보보고서는 3.10 총파업에 대해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군정은 그러면서도 사후 대응책으로 전자의 치유책, 즉 민심 수습보다는 후자의 문제인 좌익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갔다”고 밝힌다. 3.1절 기념대회와 총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과 피해가 벌어진 배경이다.

도민연대는 국가기록원 수형인명부에 등재된 3.1사건 피해자 명단을 확인했다. 3.1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는 244명이다. 거주지로 구분하면 제주읍이 49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서귀면·대정면 25명, 한림면 24명, 구좌면 23명 순이다. 도외 거주자도 3명 포함한다.

연령별로 나누면 20대가 132명으로 절반이 넘었으며 30대(74명)까지 포함하면 대다수가 20~30대 청년들이었다. 직업은 농업 92명, 교원 77명, 자영업(공업) 29명 순이다. 관공서 20명, 경찰 4명 등 공직자도 포함돼 있다. 244명은 1947년 4월부터 12월까지 유죄를 선고 받았다. 형량은 벌금(110명)이 가장 많았으며 징역이 56명, 징역·벌금·집행유예도 53명이다.

양동윤 대표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양동윤 대표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4.3에서 소외된 1947년 3월 1일과 3월 10일 

도민연대 조사원은 피해자 혹은 유족을 1대 1로 직접 만나서 설문지를 작성했다. 조사 기간은 지난해 4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8개월이 소요됐다. 244명 가운데 행방불명, 연락 두절,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실제 조사는 212명만 성사됐다. 살았던 마을을 찾아 노인들에게 이름을 대며 수소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212명에는 유족 혹은 지인까지 포함시켰다.

이날 조사 결과는 도민연대 양동윤 대표가 발표했다. 조사 결과, ▲피해자가 체포된 장소 ▲체포된 이유 ▲체포된 후 갇힌 장소 ▲체포된 후 조사 여부 ▲재판 여부 ▲재판을 진행한 법원 ▲형량에 대한 납득 여부 ▲복역형무소 위치 등의 질문에 대해 매우 많은 숫자가 ‘잘 모른다’고 답했다. 기억의 유실, 고령화, 정보 미전달 등의 이유로 추정된다.

응답자 212명 가운데 ‘4.3희생자 신고’ 여부를 묻는 질문에 132명(62.3%)이 신고했다고 답했으며, 80명(37.7%)은 신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미조사 인원까지 고려하면 최소 80명이 아직까지 4.3 희생자로 신고하지 못한 것이다.

미신고 80명에게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48.8%(39명)가 ‘신고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았다’고 답했다.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3.1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 곧 기점이 되고 말았다”고 명시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도민연대의 피해자·유족 조사 결과는 3.1사건은 정작 4.3에서 소외됐다 시피 여겨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 재판부가 내린 형량을 왜 납득할 수 없냐는 질문에는 78%(46명)가 ‘잘못한 일이 아니었기에’라고 답했다. 

3.1사건, 3.10총파업 피해자·유족들은 4.3 과제 해결 과정에서 가장 잘된 일로 ‘4.3특별법 제정, 공포 및 4.3희생자 결정’(27.8%)을 꼽았다. 남아있는 4.3 과제는 ‘지속적 4.3 진상규명’(22.6%)이 가장 높았다. ▲4.3유해 발굴 및 감식 예산 지원 ▲4.3보상금 균등 지급, 배우자 및 자녀 보상금 지급도 높게 나타났다.

조사 대상자들은 “70년이 넘었으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다 상생할 수 있도록, 정부가 아무런 차별 대우 없이 4.3 희생자들 모두를 다 인정해줘야 한다”, “보상금 보다 진상규명을 잘해달라” 등의 의견도 덧붙였다.

왼쪽부터 박찬식, 고성만, 조수진.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왼쪽부터 박찬식, 고성만, 조수진.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조사 발표 이후 토론은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고성만 교수, 제주4.3연구소 박찬식 전 소장(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장), 제주투데이 조수진 기자가 진행했다.

박찬식 전 소장은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을 겪은 도민 가운데는 4.3에서도 생존해 최근까지 살아있거나, 그분들은 모신 가족들도 적지 않게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에 도민연대가 조사·발표한 내용은 제주도, 4.3평화재단 같은 공공 영역에서 시행해야 할 일이다. 더불어 진상조사가 계속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고 격려했다. 다만, 조사 대상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누락된 점은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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