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7) 제주 보성시장 김순열 어르신 ①

빗상외를 맞추러 자주 가는 보성시장의 한 빵집이 있다. 유독 그날은 아침부터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일을 했던 날이라 보성시장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배지근한 음식 냄새에 무엇인가에 홀리듯 시장 안에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순대국밥 냄새와 고기국물 냄새. 그러고 보니 이십여 년 전 대학 시절 체육대회, 대학 행사 후 이 보성시장 순댓국밥집에서 뒤풀이하러 우르르 몰려왔던 그 시절 이후로 보성시장 건물 안으로는 처음 들어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최근 건물의 바닥 타일 공사를 다시 한 듯했지만 그 외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십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생 때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간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최근 건물의 바닥 타일 공사를 다시 한 듯했지만 그 외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십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사진=김진경
최근 건물의 바닥 타일 공사를 다시 한 듯했지만 그 외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십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사진=김진경

추억을 상기하며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니 고소한 튀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체육대회나 과 행사에 항상 한 자리를 차지했던 시장 통닭. 그 후 직장인이 돼서도 회사 행사나 모임 행사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시장통닭이 그 분위기를 띄우는 음식으로 자리 잡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보성시장 안에 들어간 김에 시장의 제일 안쪽 할머니들이 튀겨주시던 그 통닭집들이 아직도 있는지 궁금해졌다. 

보성시장의 제일 끝 안쪽. 이십여 년 전에도 할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 두 분이 계시는 것을 보고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가방을 열어 현금이 가방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바로 시장 통닭 한 마리를 주문하고 곧 다시 온다 약속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통닭을 들어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옛날 맛. 그래 이거지 하며 소소한 기쁨에 휩싸였다. 

중앙닭집과 장원닭집이 나란히 같은 구조로 보성시장의 가장 안쪽을 자리하고 있다. 그 왼편으로는 나주닭집까지. 1982년부터 운영한 나주닭집은 오히려 그 세 닭집 중 가장 막내였다. 나는 중앙닭집 할머니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여쭈었다.

보성시장의 제일 끝 안쪽. 이십여 년 전에도 할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 두 분이 계시는 것을 보고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 사진=김진경
보성시장의 제일 끝 안쪽. 이십여 년 전에도 할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 두 분이 계시는 것을 보고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 사진=김진경

“나? 1940년생이야. 우리 하르방이 오전까지 있었는데 방금 집에 갔어. 오전에 하르방이 와서 마늘도 갈아주고 저기 보이는 양념 있지? 그것도 만들어 주고 갔어. 우리 하르방은 나이는 나보다 하나 위. 토끼띠. 원 나이는 여든다섯인데 하르방네 집 아이들이 열둘이었는데 여섯밖에 못 살아서 호적에는 나보다 세 살인가 밑으로 되어 있지. 우리 하르방? 행원 사람이야.”

거침없는 제주말을 쓰시는 1940년생 김순열 어르신. 아버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맞은편 아버님이 가득 만들어 채워둔 양념 소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버님의 성품이 어떨지 짐작이 되었다. 어르신께서 기계를 만지는 것이 무섭다고 하시니 기계를 이용해 갈아야 하는 마늘과 양파는 남편 분께서 꼭 직접 갈아 준비해주신단다. 대형 상점에 대용량으로 양념치킨 소스를 사서 편하게 쓸 수도 있을 법 한데도 아버님의 손길로 직접 만든 수제 양념 소스를 보니 이 집의 통닭이 더 특별해 보였다. 한 솥 가득 만들어 채워 놓은 소스를 보는 어머님은 얼마나 든든하실까? 아버님의 고향이 구좌읍 행원이라 말씀해주셔서 그럼 김순열 어르신은 어느 동네에서 행원으로 시집왔다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르신께서 기계를 만지는 것이 무섭다고 하시니 기계를 이용해 갈아야 하는 마늘과 양파는 남편 분께서 꼭 직접 갈아 준비해주신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께서 기계를 만지는 것이 무섭다고 하시니 기계를 이용해 갈아야 하는 마늘과 양파는 남편 분께서 꼭 직접 갈아 준비해주신단다. / 사진=김진경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어. 저기 청사포 넘어 구덕포에서 태어났지. 그런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서귀포사람이야. 어머니는 하효, 아버지는 위미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 해녀였는데 엿날에는(옛날에는) 해녀 모집해서 남자들은 배 몰고 여자는 출가 물질하고 그렇게 육지 다년. 그렇게 우리 어머니 해녀하고 아버지 배 하면서 부산으로 올라가 살면서 8남매 낳았지. 난 막둥이라 여덟 번째. 우리 집도 세 사람 죽고 다섯 명 살안. 오빠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헌병하다 제대했는데 폐가 나빠서 일찍 돌아가셨지. 우리 부모님도 내가 어렸을 때 더 일찍 돌아가셨지.”

김순열 어르신의 부모님과 하나밖에 없던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어르신은 고작 십 대였다. 태어나고 자란 부산에 부모도 없고 연고도 없어져 버렸고 언니들은 시집을 가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어르신은 행원으로 시집간 네 번째 언니를 따라 제주로 내려왔다. 당시 어르신의 부모님과 같이 부산으로 이주했던 친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와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 행원으로 내려왔다. 

다른 또래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큰 데다 힘도 좋아 어르신은 어렸지만, 마을 일에 곧잘 힘을 보탰다. 예전에 길이 포장되기 전에는 비가 오면 자동차가 다니기가 영 어려워지니까 지게를 지고 자갈 주워서 신작로(新作路) 길 닦으려도 다녔다고 하셨다. 다른 친구들은 가고 싶어도 작고 힘이 없어 못 갔던 경험이라고 했다. 마을 일을 성실히 곧잘 도와 마을 어른들께 예쁨을 받았다. 

“남편은 할머니들끼리 절에 댕기면서 중매로 만났지. 어렸을 때 나 바당에서 하는 거 보면서 힘도 좋고 물 쌍 바당에 가면 오분자기, 소라 한두 구덕 해 오는 거 보면 마을 사람들이 ‘아이고 착하다’하면서 좋아해 줬어. 그렇게 행원 와서 한 할망한테 물질 다 배웠어. 그런데 그 할망이 나중에 사돈 할망이 된 거지. 그래도 나한테 사돈 할망이라고 하지 말고, 사돈이랜도 하지 말고 똘이라고 하라고 했어. 그렇게 날 아껴줬어. 그렇게 중매로 19살에 약혼하고 나는 시집갈 돈 벌어야 하니까 나도 육지로 언니랑 같이 물질 다녀왔지. 내가 먹고살고 하는 건 우리 언니 물질한 걸로 다 대주고 나는 물질해서 번 돈으로 부산 범일동 시장에서 광목이랑 막 보석 같은 것도 준비했어. 광목 다섯 통 샀지. 그땐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궨당들 몫까지 다 해주고. 이불도 두 채. 농이영 다 해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시집갈 땐 우린 다 철부지였지. 열아홉에 결혼하고 정월 열사흗날 결혼 핸.”

행원 출신이었던 아버님과는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고 동네 사람이라 그래도 혼인할 때 어색하지는 않았겠다 여쭤보니 사실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님은 제주상고를 다니셨기 때문에 제주시로 유학 간 동네 사람이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고. 

어르신은 제주로 내려와 친정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이어 해녀가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출가 물질을 다녀와 보니 어머니가 바다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알게 되었단다. 어르신의 친정어머니는 부산 구덕구에서 해녀 하셨는데 추석 대목이 다가오면 합저(홍합)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섬으로 들어가 작업을 하셨다. 어르신이 말씀해주시길 어르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어머니가 추석 대목 보려고 무리하며 작업을 하시며 머리가 어지럽다는 말을 자주 꺼냈단다. 그 후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때가 어르신이 다섯 살 때였다고. 가족 먹여 살리려다 그렇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본인이 물질하며 몸으로 느꼈으니 얼마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고 사무치게 보고 싶었을지 짐작이 갔다.

혼인한 후 행원에서 먹고살려니 마을에서 하는 물질로는 돈벌이가 시원찮았다. 둘째 아들까지 낳고 그 아들을 데리고 강원도에 미역을 하러 출가 물질을 갔다. 그래도 출가 물질을 나서면 남편도 함께 따라와서 곁에 있어 주었다. 강원도 바다로 들어갔더니 미역이 시커멓게 펼쳐져 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섯 망사리까지 퍼내고 다시 바다에 내려가는데 물이 너무 차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추위와 힘듦은 출가 물질을 그만두게 했다. 하지만 행원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먹고 살기에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시내로 들어와 보기로 했다. 

“처음 도남으로 터를 잡고 한 일 년 살다가. 그때 하르방이 산담 쌓는 일 해나난 동과양(동광양)에 한 열다섯 사람이 와서 박성내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집 지어줬어. 그래서 동과양에서 문짝 만드는 공장도 해났지. 그러다 내가 서른 넘어서. 보성시장 건물 생겨서 딱 들어왔어. 그리고 지금까지.”

부산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오빠를 여의고 다시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로 내려온 십 대 김순열은 다시 육지로 출가 물질을 다니며 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며 성장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내 가족을 삶을 위해 보성시장의 시작을 함께했다. 그 이후 50년 동안 시장의 역사 한쪽에 여전히 자리하고 계셨다. 인터뷰 내내 단골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오셨는데 통닭을 사러 온 손님보다는 죽을 쑤어 먹거나 백숙하려고, 또는 다른 요리를 하러 닭을 장만하러 온 손님들이 꽤 많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가게 간판을 보니 중앙통닭이 아닌 중앙닭집이라는 이름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참 열심히 살았어, 이 시장에서만 거의 50년이니까….” 열심히 살았다는 말에는 언제나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참 열심히 살았어, 이 시장에서만 거의 50년이니까….” 열심히 살았다는 말에는 언제나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오시는 손님들이 오랫동안 이 닭집을 찾은 단골임을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의 기억에는 그냥 옛날 시장통닭을 파는 곳이었지만 이분들께는 시장통닭집 이상의 곳이었다. 어머님은 오늘 오전 생닭이 들어와서 닭이 선도가 좋다고 기분 좋게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음식을 파는 일을 하는 나도 그 마음을 안다. 신선한 식재료가 매장으로 들어오고 그 재료를 손님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그렇게 손님을 응대하는 김순열 어르신을 멀리서 기다리면서 중앙닭집을 찬찬히 보니 눈에 띄는 글귀들이 붙어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르신이 씩 웃으며 이야기해 주셨다.

“그거 우리 하르방이 나한테 써 준 시야. 집에 이런 글이 책을 낼 정도로 많아.”

얼굴을 뵙지는 못했지만, 이 중앙닭집의 계속되는 아버님의 흔적에 이곳은 중앙닭집 두 노부부의 소중한 공간으로 환기되었다. 다시 한번 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김순열 어르신을 향한 낭만과 멋이 가득한 아버님의 러브레터였다. 

다시 한번 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김순열 어르신을 향한 낭만과 멋이 가득한 아버님의 러브레터였다.&nbsp;/ 사진=김진경
다시 한번 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김순열 어르신을 향한 낭만과 멋이 가득한 아버님의 러브레터였다. / 사진=김진경

갓 보성시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닭집을 한 것이 아니었던 어르신. 처음엔 어물전으로 시작했다 지금의 닭집을 인수했다. 그 세월이 벌써 반백 년이 되셨단다. 나는 어르신에게 닭집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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