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부터 올해까지 11회에 걸친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았다.

제주 출판사 한그루는 최근 ‘제주4.3 평화문학상 수상시집’을 발간했다. 이 시집은 제1회(2013)부터 제11회(2023)까지 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과 당선 소감, 심사평을 함께 수록했다.

특히, 공개된 당선작 외에 응모작 중 7편을 함께 소개하면서 당선 작가의 시 세계를 보다 폭넓게 소개한다. ▲현택훈 ▲박은영 ▲최은묵 ▲김산 ▲박재우 ▲정찬일 ▲김병심 ▲변희수 ▲김형로 ▲유수진 ▲한승엽 시인의 작품이 담겨 있다.

한그루는 “그간 제주4.3평화문학상 소설 부문과 논픽션 부문 당선작은 각각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시 부문의 경우 당선작 외에는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웠다”면서 “이번 수상시집 발간으로 여러 작가들의 제주4.3 시를 폭넓게 소개하고, 4.3 시 문학의 흐름과 전망을 짚어보며, 4.3평화문학상의 가치와 의의를 이어가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영남동
한승엽
(2023 제1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

한라산 남쪽 아래 첫 마을 
안개가 귀띔해준 얘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고 있다 
이윽고 무리 지어 올라오는 광기의 눈빛에도 
머릿속은 말라버린 층계 밭에 갇혀 멈칫멈칫 헤매는데 
악몽처럼 올레는 아찔한 소란에 어둑해지고 
고막을 때리듯 문짝이 부서지더니 지붕이 활활 타올랐다 
와들와들 울부짖는 불기둥, 신들린 것 같았다 
기댈 벽도 없이 
저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대물림할 수 없는 것들만 넋 나간 채 나뒹굴고 
한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의 눈을 감겨주는 찰나에도 
우물에 갔다는 누이도 연기처럼 돌아오지 않아 
숯검정을 쓴 채 정체 모를 벽에 휩싸여 
검은 하늘이 지붕이고 
잃어버린 번지수가 달빛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서성거리는 우주의 끝에선 
잠들지 않는 물소리가 흰 그늘로 길게 흘러가고 
늑골로 빠져나간 바람까마귀가 대숲을 빙빙 돌다 
기어이 지층을 깨우듯 울음을 터뜨리던 
지상의 마지막 화전(火田) 
거칠게 멍든 살갗이 바짝 곤두서고 있다 
눈물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허상의 벽과 벽을 지우며 
상처가 아무는 자리에 피 울음의 뿌리라도 처연히 솟아 날까, 
영영 폐족을 꿈꾸지 않았던 이름들 
주름 깊은 웃음으로 기꺼이 밤길을 헤치고 돌아와 
세상 한구석 어둠의 체위를 바꾸려고 
서로 이마를 맞대 푸른 잎을 피워 올릴 것이다. 

234쪽, 한그루,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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