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6) 길 뜨던 낙엽 한 장이

 

길 뜨던 낙엽 한 장이

초겨울 보도블록에 
반나체로 밟히는 소녀

바람이 흘리고 간 
원조교제 광고전단을 

길 뜨던 낙엽 한 장이 
덮어주고 
있었다

/2004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필자가 농업잡지 월간《농업정보》지를 발간하던 당시, 전국 주요 농산물 시장을 취재하던 길이었습니다. 국내 한 사과 농가를 취재하고 근처 모텔에 숙소를 정하였습니다. 모텔 가까운 쪽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 골목 과일가게에 진열된 과일들을 구경하면서 간식용 빵과 과일을 샀습니다. 

그리고 모텔 입구를 막 들어서려는데 명함 크기의 광고전단 여러 장이 길바닥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 전단엔 아직 어린 나이로 보이는 소녀들이 반나체로 웃고 있었고 큼직한 글씨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습니다. 반나체로 이 추위를 견디다니, 그 연유야 어쨌든 사진 속 소녀들은 몹시 추울 것 같았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주변 길바닥의 낙엽 한 장이, 가볍게 바람에 날려와 그중 한 장의 반나체 소녀 사진을 덮어주었습니다. 

이처럼 농업관련 취재로 전국을 돌다 보니, 도시와 농촌 사이에 얽혀 있는 갖가지 풍경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칠십 넘게 인생을 살다보면서 갖가지 체험했던 사실들을 글로 옮기는 마음은 결코 편치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처럼 글 내용이 사실과 좀 다르게 각색해야 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 반나체 소녀에게 덮어주는 낙엽은커녕 신문지 조각 하나 없었습니다. 다만 세상인심이 그래줬으면 하는  ‘내 바램의 한 토막’을 여기 「길 뜨던 낙엽 한 장이」라는 짧은 시조 한 토막에 옮겼을 따름입니다.

이튿날 경주의 한 유적지를 관람하고 나오면서 아주 높다란 미루나무 꼭대기에 서까래가 다 드러난 까치집을 보았습니다. 그 풍광을 보고 카메라 줌을 당겼는데, 카메라 렌즈 속엔 엉뚱한 단시조 한 편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천명天命을 어겼던 게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다투어 권좌 가까이 부귀영화를 조르던 저들

휑하니 몰락한 둥지가 

역광에도 

보인다. 

- 「까치집, 2004」 전문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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