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⑧ 거욱대(방사탑) 장인 현태성(1947년생, 성산읍 신산리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현태성(1947년생, 성산읍 신산리 거주) / 이하 사진=조환진

어르신들 얘기로는 한라산 남쪽에서는
우리 부친 돌담 쌓는 거 따라올 사람 없다고

 Q. 돌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가지고.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초등학교도 솔직하게 학교 다니는 일수는 절반 정도밖에 못 다닌 것으로 생각되고. 제일 맏이로 태어나가지고 조금 자라가니까 집안일도 해야지, 동생들도 돌봐야지 뭐하면서 어쩌다 또 동생들 데리고 학교도 이따가 또 한 번 갔다 와야지. 나는 그런 식으로 자라다가 어떻게 초등학교를 졸업해가지고. 바로 이젠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무슨 일을 할까 하다가 아, 목수 일을 하면은 돈을 좀 빨리 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느 날 목수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일시키는 바람에 목수 일에 못 들어가 가지고 지금 쓰는 사람 나가면 그 다음에 저를 쓰겠다고 하니까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어요. 

그때 내가 열여섯 살 땐데, 할 수 없이 전분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다른 우리 동창들은 다 중학교 다니는데 나는 중학교도 못 가고 전분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잘한다 해가지고.

다른 우리 또래에서는 내가 제일 돈도 많이 받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겨울 6개월은 공장에서 일하면 여름 6개월은 일이 없어요. 한겨울에만 고구마를 사가지고 뿌수어서 전분을 만들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일이 없어요.

그 당시에 아버지가 돌담을 쌓으러 다니는데 어르신들 얘기로는 한라산 이쪽에서는 아버지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런 말을 했는데, 남제주군 쪽에서는 우리 부친 돌담 쌓는 거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 부친이 키도 크고 힘도 좋고 돌담을 그렇게 잘 쌓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돈을 못 버는 원인이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일 없는 날은 일하면서 벌어놓은 거 매일 술로 다 먹어부러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소문나게끔 일도 잘 하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도 남은 거는 자식들밖에 없어.

현태성 장인의 작업 도구들.<br>
현태성 장인의 작업 도구들.

우리가 구 남매인데, 한 열일 곱 살 열 여덟 살이 돼가니까 그 때 과수원 붐이 일기 시작해가지고 전분 공장일이 끝나면 과수원 하는 데 가서 일하게 됐어요. 과수원 할 때 1차로 돌담을 돌려놓고, 그 다음은 방풍나무를 심고, 그 다음엔 밀감나무를 심고 하면서 과수원 붐이 일기 시작했어.

어른들에게 사정해가지고 같이 달라붙어가지고 일을 했지. 열일곱 살 때 열여덟 살 때는 우리 동창 중에서는 그래도 힘때가 젤 좋다고 칭찬을 받았거든. 어른들하고 같이 일을 했는데 내가 그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하고 같이 일당을 받으면서 일을 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까 봄 나면 가을 들 때까지 돌담 싸러 다니고 가을 들면은 전분 공장 들어가서 겨울내낭 6개월 동안 일하고 하면서 부지런히 일했지.

주인이 이렇게 해달라 하면 그렇게 하지
내가 이렇게 해야 됩니다를 안 해봐수다

돌담을 쌓으러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다 보니까 결국은 전석도 쌓게 되고 견치 쓰미도 쌓게 되고 방사탑도 만들게 되고 하면서 돌에 대한 것은 주인이 요구하면, “예, 알았습니다.” 해가지고. “이렇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해가지고.

딱 시작을 하면은 아, 됐다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 달라 하면 또 그대로 이제 만들어드리고, 그래서 돌담을 쌓던 방사탑을 만들든, 무엇을 했든 간에 제가 주인에게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수다. 주인이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면은, 예, 알겠습니다. 해가지고 그대로 쌓고, 조금 손봐서 조금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면 아 예, 해서 금방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그렇게 하면서 지금까지 일했어요.

어디 가서 산담 같은 것도 다우러 가서 다 쌓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다 싹 나가서 앉아서 술 먹고 담배 태우고 하는데 주인은 아, 이것도 좀 손봐줬으면, 팡돌도 좀 놓아줬으면, 하면은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같은 일행들은 모여 앉아서 잡담하면서 술 한 잔 먹고, 담배 태우고, 거기 음식 같은 거 남은 것들 주면은 먹고 하는데도 나는 바깥 딀로 팡돌 놔주고 안으로도 팡돌 놔주고. 주인이 원하면은 산담 모서리에 어귓돌도 놔주고. 주인이 어떤 거든지 얘기만 하면 다 해줘요.

그러면 이제 다른 사람들 몰래 솔째기 주인이 뭐 주머니에 넣는 거 같아요. 집에 와서 보면은 몇 만 원씩. 그때 당시에 2, 3만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2, 3만원 넣는 사람이 있고, 5만원 넣는 사람도 있고. 나중에라 가니까 한 10만원 주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 몰래. 그렇게 하면서 나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했던 간에 팁을 안 받아본 데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일을 하면은 주인이 청소 할 거를 나는 청소까지 다해줘요.

“아, 그만하면 됐수다. 내불민 우리가 알앙 허쿠다.”

경해도 청소를 깨끗이 해야 내가 한 솜씨가 뚜렷하게 나오지, 이렇게 지저분하게 놓고 주인보고 하라고 허영 가불면은 이게 돌담을 아무리 잘 쌓아놔도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놔요. 다른 사람들은,

“야, 그만허고 오라. 가게, 가게. 그건 주인이 허는 거지 우리가 허는 거 아니여.”

경허당 보니까 주인이 너무 고마워가지고 그대로 못 보내서 팁도 주고 했는데 내가 팁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성격상 그렇게 꼭 하고 싶어요. 팁은 줬든 안 줬든, 그것는 생각지도 안 허고 내가 했던 데니까 깨끗하게 잘해주고 가야지. 난 그 생각만 해지지 다른 것은 생각을 안 해요. 

장인이 만든 삼달리 돌담.
장인이 만든 삼달리 돌담.

방사탑은 원형이 쌓기가 손쉬워요
그런데 잘 허물어지는 것도 원형방사탑

방사탑은 미천굴에서 제일 많이 만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입구 쪽이라든가 어디서 방사탑이 필요하다고 하면은 만들어주고 대문 대신 방사탑으로 좀 만들어줄 수 없느냐고 하면은 알겠습니다, 해가지고 만들어주고, 그렇게 하면서 하다 보니까 방사탑도 참 많이 만들게 되고

방사탑은 보통 원형인데 신산리 노인회관 입구라든가 저쪽에 파출소 앞에 가면은 팔팔상회 앞에 대문 대신 방사탑 만들고 정주석 만들어서 꼽아 놓았는데 원형 방사탑은 상당히 손쉬워요.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원형 방사탑인데 또 잘 허물어지는 게 원형 방사탑이에요. 왜냐하면 원형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이게 벌어지는 힘은 있는데, 줄어드는 힘은 없으니까.

서서 뻗칠려고 해도 속에 들어간 게 안에서 밀리는 힘은 있으니까 원형 방사탑은 잘 허물어지는데. 그래서 이제 그런 것에 대해가지고 굉장히 신경 쓰면서 시멘트도 놓고 어떤 때는 철근도 좀 놔주면서 만들어요.

방사탑을 만들다가 한번 실수를 해가지고 새로 뜯어서 새로 만든 때가 있었는데. 고사리 축제 하는데 수망리에 방사탑 두 개 만들어져 있죠? 그 방사탑 동쪽에 꺼 만들 때 한 번 실수가 나 가지고 아차 잘못한게, 이게 지름이 5m인데, 높이 5m로 올라가서 봉을 만들 걸로 해가지고 탑 옆에선 포크레인이 돌 모아놔 가지고 그 돌무더기 위에 올라가서.

장인이 만든 수망리 방사탑.
장인이 만든 수망리 방사탑.

돌을 올려놓고, 올려놓고 하는데 방사탑 가운데 돌이 많이 모여지니까 손으로 담 다운 쪽으로 잘 놔줘야 될 껀디, 그걸 포크레인으로 밀리랜 해부렀어. 손쉽게 할려고. 그것 밀린 것에 방사탑이 어긋나 버렸어. 5m까지 다 올라갔는데. 그거 맡았던 업자하고 나하고 있었는데 나도 반 손해 볼 테니까 업자도 반 손해 봅시다, 업자도 그렇게 합시다 해가지고 싹 뜯어서 새로 만들어 올렸는데. 그때는 내가 한 번 큰 실수해가지고 그게 머리에서 잊혀지질 안 허여. 너무 애쓰게 힘들여 올려놔 가지고 이제 봉우리만 잘 만들면 되는데 아, 그 포크레인으로 그걸 밀리라고 해가지고 그때 한 번 실수한 것이 왜 그렇게 실수를 해졌나 싶어.

그 후로는 그렇게 큰 방사탑 작품 만들어보지 못했는데 돌문화공원 백운철 원장님이 남한에서 가장 큰 방사탑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까. 네, 그렇게 허십시오, 그랬는데 도저히 연락이 안 와서 한 번 어쩌다 만나져가지고 물어보니까 제주도에서 예산 지원을 안 해줘가지고 지금까지 도 못하고 있다고 얘기해서 남한에서 제일 큰 방사탑을 얼마 정도 높이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하니까 한 20미터 높이. 20m면 보통 7층 건물 높인데 20미터 높이로 만들겠다 하니까.

예, 알았다고 해놓고 집에 와서 시간 날 때마다 연구를 하는데 20미터를 올리려면 크레인으로 몇 미터까지 올리고 작은 포크레인이 또 탑 안에서 다니면서 같이 일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해 놨는데 20m는 안돼가지고…. 그런 높은 탑을 만들젠 허민 시멘트 안 놓앙은 힘들고 위로 갈수록 점저 줄여서 올라가야죠.

이게 직선으로 올라가는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그 높이 올라가려면은 짧은 돌을 놓은 이후에는 이렇게 긴 돌을 놔줘야 돼요. 짧은 돌 놓으면 긴 돌 놔주고, 중간중간 긴 돌을 놔주면서 이게 벌어지지 못하게시리 해야 돼요. 밑에서 돌을 만들어서 올려야 돼요. 다른 사람이 해버려서 못한 거면 어쩔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서 이름을 남겨 보고 싶었는데 그거 못 만들었던 게 조금 생각나네요.

한림하고 신창 사이만 내가 못 가봤지 한림으로 동쪽, 신창에서 동쪽으로는 거의 안 가본 마을 없이 거의 다니면서 돌담 쌓고, 전석 쌓고 울타리담 쌓고 올렛담 쌓고… 수십 군데 회사를 물어오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여러이 안 허고 막상 해봐야 나하고 한 사람이나 둘리 더 허나 해버리니까 어떤 일을 해도 실수가 없어. 막 여럿이 하다 보면 실수 해가지고 잘못될 수도 있는데 그런 실수도 없었꼬 양어장 울타리 같은 것도 좀 많이 답고.

미천굴 방사탑은 108개를 만들라고 해가지고
나중에 보니 더 되는 거 같아

미천굴 처음 만들 때 햇수로는 4~5년 일했는데 울타리도 쌓고 미천굴 방사탑은 108개를 만들라고 해가지고 108개를 만들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108개가 더 되는 것 같아요. 근데 거기는 왼쪽에 따로 들어가는 입구에 따로 있는 거는 조금 굵은 돌로 만들었는데 그 나머지는 다 잔돌로 만드니까 일하는 데는 크게 힘 안 들었는데. 미천굴 내부에 천정이 약한 부분에는 내려앉지 않게 방사탑식으로 돌을 쌓아가지고 기둥을 만들었어요.

그때는 미천굴 굴속에서만 우리가 1년 동안 있했는데 굴속에 떨어진 낙석도 치울 겸 미천굴 천정이 위험한 데는 안전을 위해서 내부에서 탑식으로 전부 다 쌓아 올렸어요. 혼자만 헌 게 아니고 원래는 네 사람이 만들었는데 나는 주로 돌을 벌르는 일을 했어요. 천정에서 떨어진 낙석들을 치워야 하니까 전부 벌르고 와리 할 거 없으면 담 쌓고… 계단 만든 돌은 외부에서 사다가 와리해서 만들었는데 포크레인으로 돌을 깨면은 계단 놀 수 있게 돌이 안 벌러지니까 전부 손으로 와리해서 계단 만들었지.

미천굴 내부.&nbsp;
미천굴 내부. 

내가 땀이 무진장 잘 나는 사람인데, 동굴 안에만 들어가면 좀 불안하긴 해도 여름에도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고. 아무리 더워도 동굴 안엔 14도 밖에 안 되니까. 높은 기둥은 4미터 정도 되는데 밑에 우마 놓고 위에 아비동 두꺼운 판 깔고, 다시 그 위에 우마를 놓아서 쌓았지. 밑에 우마에 돌을 얹어 놓으면 다시 그 위에 우마에 돌 얹어 놓고. 우마가 제일 편해.

여기서 일할 때는 일당으로 해서 마음도 편했지. 아침에 오면 담배 한 갑, 장갑 한 켤레 주고, 10시 되면 빵 하나 주고, 오후 3시 되면은 또 빵 하나 주고. 하루 일당은 10만원. 다른 데서는 12~13만원 받아지는데 여기는 오래 일하니까. 그 당시 회사일 가면은 회배당 얼마 하는데 포크레인 기사 잘 만나지면은 돈이 되는데 서툴면 능률이 안 올라가지고 나도 손해, 회사도 손해니까 교체해 달라고 하지.

미천굴 일할 때는 주로 밤에 농약을 쳤지. 당근밭이나 감자밭, 밀감 농사는 막 시작할 때였는데 아침에 경운기에 농약통 실고 농약 챙기고 와서, 점심 때 물 받아 놨다가 일 끝나고 밭에 가면은 집사람이 걸어서 밭에 가 있으면, 약 치다보면 10시도 되고 11시도 되고 그치룩 허면서 일허러 댕겼지.

장인이 작업한 미천굴 돌계단.
장인이 작업한 미천굴 돌계단.
장인이 작업한 미천굴 돌계단.<br>
장인이 작업한 미천굴 돌계단.

그렇게 일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적금을 들어서 그 당시에 3000만원 정도 적금을 타게 됐는데 내가 전분공장 일도 다 끝나게 되니까 포크레인 하고 덤프트럭 하나 사서 일을 하면 돌담 쌓는 것 보다 편안하고 자식들 뒷바라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집사람이 시에 가서 집 사버리라고 막 허길래 그것도 좋다고 생각이 들어서 삼촌한테 부탁해서 도남에 도로변에 자그마한 2층집 1억 1천만원에 사서 2층(15평)은 세주고, 1층(20평)은 딸들 신산리서 중학교만 마치면 그 집에서 살면서 학교 다 보내고 직장도 다니고 했지.

Q. 방사탑 모양을 보기 좋게 쌓는 기술이나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아니 없어죠. 그냥 뭐, 그대로 보면서 쌓아 올라가면 돼요. 자기 키까지 쌓을 때는 밑에서 쌓으면서 그냥 올라가는데. 키 이상 되가면은 이제 바깥에서 우마를 놔 가지고 쌓기도 하고. 또 안에서 시멘트 놓으면서 쌓기도 하고.

현태성 장인
현태성 장인

만일의 실수를 대비해가지고 잔돌을 쌓을 때는 반생 철사를 해가지고 한 1미터만 쌓으면 반생 철사로 묶어서 꽉 조여줘요. 시멘트 굳을 때까지. 그래서 50전 정도 더 쌓으면은 또 한 번 묶어주고. 그래가지고 완전히 완공된 다음은 딱 잘라버리면 지금까지 몇 십 년이 돼도 하나도 무너졌다는 연락을 못 받아봤어요. 근데 그걸 몰라가지고 그냥 내버려뒀다가 잘못해서 실수하면은 자기도 미안하고 주인 보기도 그렇고, 또 업자나 회사에 일 갈 때는 그 현장소장이나 사장이라도 보면 석공 교체하라고 할런지도 모르니까 일할 땐 매사에 신경을 써가지고 해야죠.

시멘트 비빌 때는 모래가 굵으면 시멘트 1에 모래 5 해도 되는데, 모래가 막 좀질면은 1 대 2해야 돼. 모래가 보통이면 1 대 3이나 1 대 4 해도 돼요. 모래가 굵으면 1 대 5라도 강도가 상당히 세요.

기초할 때는 신경을 써야
잘못되어버리면 고장나버리면 크게 문제 되고

Q. 방사탑 기초 작업은 어떻게 하나요?

만약 여기다 만들어 달라하면은,

“지름은 얼마나 놉니까?”

내가 물어보거든. 얼마짜리 해달라 하면은 거기서 괭이로 원을 그리는 거죠. 그런 다음 흙을 걷어내요. 완전히 흙만 있는 데는 많이 걷어 주면 좋죠. 그 다음엔 레미콘을 좀 깔아줘야죠.

수망리에 높이 5m, 지름 5m 탑 쌓을 때는 흙을 걷어내고 탑 하나당 밑에 레미콘을 3~4루베 깔았던 거 같아. 두께는 15전 정도, 20전은 안 됐을 거고. 탑 지름보다 최소한 50전 이상을 넓게 레미콘으로 놔줘야 힘을 뻗치거든마씸. 나중에 흙 덮어버리면 시멘트 안 보이니까.

신산리 방사탑.
신산리 방사탑.

처음 기초할 때는 조금 신경을 써야 돼요. 기초 잘못 되어버리면은, 만들어갈 때 고장 나면은 다행인데 다 만들어놔서 고장나버리면은 크게 문제되고, 신용 떨어지고, 일당 다 도망치고, 그렇게 되니까 기초는 참 신경 써야죠.

70~80전 높이로 쌓으면 전체적으로 레미콘 한 번 치고, 3~4일 굳혔다가 다시 7~80전 올라가면 다시 레미콘 치고 해야 엄청난 무게가 벌어지지 안 해. 사각이나 삼각은 벌어지는 힘이 없는데 이 원형을 벌어지는 힘이 굉장히 세요. 무조건 벌어질려고만 해요. 그래서 레미콘을 잘 놔줘야 벌어지는 힘을 딱 잡아줘요.

수망리 방사탑.
수망리 방사탑.

Q. 방사탑 꼭대기에 길쭉한 돌을 세우셨던 데요?

그 세운 돌은 빼고 높이가 5m인데, 마지막 돌은 높아서 크레인으로 세웠어요. 그 돌 이름이 ‘어위’라고 하는데, 나도 방사탑을 만들면서 탑 위에 올려놓는 돌 이름이 있을텐데 이름이 뭔고 허영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봐도 다 이녁만씩 이야기허는 거라. 누구는 동자석이다, 누구는 편석이다…, 그러다가 돌문화공원 부원장에게 물어보니까, “위에 얹어 놓는 돌 이름은 어위라고 합니다.”

수망리 어위 돌은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생겼는데 탑에 정면으로 섰을 때 약간 앞으로 숙은 듯이 세웠는데 너무 버짝 사 버리면 거만하게 보여서 공손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숙은 맛이 있어야. 구부러진 돌이면 바로 세워도 좋지요.

난산리 방사탑.<br>
난산리 방사탑.

Q. 난산리 방사탑도 쌓으셨습니까?

난산리 탑이 제일 나중에 쌓은 건데 만든 지 4년, 5년 됐나? 그 전 해에 주유소 일주도로변에 것은 6~7년 전 그 후로 여기 신산리 집 울타리 했으니까. 여기는 한 10년 정도 전에. 돌담이든 탑이든 똑같이는 안 만들어, 조금씩 더 틀리게 만들지.

1970년대 80년대는 말도 못하게 공사가 많았지
건축담도 하고 과수원담도 하고

Q. 방사탑 외에 다른 돌일도 하셨습니까?

1970년대는 주로 와리로 벌렁 건축담들 주로 하고, 과수원담도 많이 하고. 굉장히 돌 공사가 많았지. 1970년대 80년대 말도 못하게 공사가 많았지. 1990년대, 2000년대 전석작업 상당히 많이 했어요.

전석 쌓을 때는 웬만한 거는 혼자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동생 불러서 같이 하고. 쿠사리를 다섯 개를 딱 사놔가지고 만약에 하나가 끊어지면 금방 일해야지 실수해 버리면은 회사일은 포크레인도 있지 같이 일하는 회사 직원들이 몇 명이라고 조롬에 일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놀게 되니까 쿠사리를 한꺼번에 여러 개 사가지고 차에 싣고 다니고 갠노도 5개, 6개씩 가지고 다녔지.

요 근래까지도 신산리 마을 안에 집을 좀 괜찮게 짓는 사람들 울타리는 전부 다 나가 쌓아서. 그분들이 다 나보고만 해달라고 하니까. 집에 농사도 좀 지으니까 농약 칠 것도 계산하고, 비 올 것도 계산허멍, 여유를 두면서 언제까지 시작해 드리쿠다 허멍. 다 시기를 맞추어 가면서 절대 실수 없이. 오늘 올 건가, 내일 올 건가, 막 기다리게 무조건 맡아 놓고는 절대 안 해.

좀진 곰보 큰돌 와리하다가 곱닥헌 상석이 나올 것 같으면은 잘라서 상석돌로 만들어 놨다가 마차로 실어서 옮기든가. 이후에는 경운기로 실어다가 놓고 갠노로 다듬어서 상석도 만들고. 정으로 다듬으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해서 갠노로만 다듬어요.

신산리 울담.
신산리 울담.

돈을 받고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동네 사람들 상석 하나 만들어 달라면은 만들어주고 술이나 한 잔 얻어먹고 했지. 

내가 만든 상석 중에 제일 큰 상석은 미천굴 사장님네 어머님 묘에 상석을 앚지는디, 할아버지가 상석 크기를 다섯 뽐에 여섯 뽐을 하라고 했던가 했는데. 와리하면서 도저히 그 정도 척수가 나오질 안 허여. 도저히 상석 만들지 못허쿠덴 허니까, 어디에 가보면은 자기가 봐논 평석이 있는데 그걸 잘라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잘라다가 말 마차로 실어단에 앚져놨는데 산담은 우리 부친은 쌓아서.

온평리 돌이 좋아. 빌레 캔 돌이 상당히 좋은데
돌이 일어나게 되면 이중삼중으로 막 쏟아지는데 재미잇어

Q. 어디 돌이 좋습니까?

신산리는 보통이고, 이 근방에서는 온평리가 돌이 좋아. 돌이 좋은 데는 밭이나 마을이나 산이나 빌레 캔 돌이 상당히 좋은데, 온평리가 빌레 마을이라 노니까 돌이 괜찮치. 빌레가 잘 일어나는 데는 그자 대꾸로만도 다 일어나요. 돌이 일어나게 되면 이중 삼중으로 막 쏟아지는데 재미이서. 지금 보러가는 데가 온평리돌 사다가 돌을 쌓은 거라.

일헐 때는 주로 갈중이를 입고 했는데 갈중이가 편안해. 경헌디 갈중이 입ㅈ는 사람이 신산리 안에서는 나뿐이라. 아무도 없어.

Q. 일하다가 사고 나서 다치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까?

전분 공장 40년 일하면서 수십 명 다쳐나가는 거 보고, 죽는 것도 보고, 손가락 갈라지는 거, 뭐 머리 다 뽑혀버리는거, 모든 거 다 보고 그랬는데 40년 간 전분 공장 일하고 한 50년 돌일 하고 했어도 손톱 깨끗해. 일절 다친 데 없어요.

딱 한 번 다쳤는데. 포크레인 기사가 하도급을 맡아서 삼달천에서 전석 쌓는데 다른 사람 빌지 말고 삼춘 혼자만 쌓아 줍서 허는 거라. 전석 쌓는 데는 보통 다 둘이서 쌓는데 밑에서 돌 걸어주고 위에서 놓으면서 둘이가 하는데. 나 혼자서 해줍서 허는 거라. 혼자만 허는 거 봐나부니까. 

혼자 밑에서 돌 걸고 올라가서 돌 놓고 내려왕 돌 걸고, 올라가서 돌 놓고 해가는데. 돌을 잘 놀려고 하는데 이놈이 빨리 한 덩어리라도 빨리 놀려고. 그냥 그 줄을 잡고 돌 방향을 잘 맞추려고 하는데 쿠사리를 들러버리는 거라. 손가락 세 개가 돌과 쿠사리에 잽져가는 순간 촥! 잡아당기니까 장갑도 잘라지고. 손도 잘라져버릴건디 빼내는 힘으로 손가락 가죽이 다 잘라져 버린 거라.

하필 또 일요일 날인데 서귀포의료원에 꿰매러 갔지. 이게 하마터면 잘라질 뻔했어. 그놈이 어떻게 미안하다고 죽도록 사정을 해. 사고 처리해서 회사 보험으로 하면은 자기네가 다음 공사 밭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좀 보험 처리도 허지 말아주십시오. 사정사정 하니까 그러라고. 나만 고생해버리면 되니까 그러라고.

그때 한 번 이거 다쳤던 거 외에는 전분공장에서 40년 동안 일하면서도 손가락도 하나 안 다치고 다른 사람들은 많이들 다쳐가지고. 옛날엔 차도 없고 리어카도 없을 때는 업엉이네 다친 사람들 데려다 치료하러 다니고.

상당히 건강하게 태어나진 거 같고
먹는 음식을 또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져

Q. 돌일 하며 무거운 거 들다 보니 불편한 곳은 없었습니까?

무거운 돌은 들다 보니까 허리가 관절이 아프는데 나는 상당히 건강하게 태어나진 거 같고. 또 그리고 먹는 음식을 또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져요. 아무거나 잘 먹어서 그랬는지 아픈 데는 전혀 없이 살아와서. 그런 일을 하면서도.

전분 공장 일도 상당히 고되요. 왜냐면 코팅 장갑이나 나온다, 옛날엔 장갑 살 돈도 아까워가지고 맨손으로만 전분 푸대를 들었는데. 이게 45kg거든. 45키로니까 이것도 한 포대씩만 들러매면 좋은데 힘자랑 한다고 45키로 세 푸대씩 들러메고 그 먼먼헌, 한 70, 80m, 100m 되는데 까지도 메고 가는데, 나는 그렇게 해도 아픈 데도 없었는데 작년 74세 때로구나. 지금 용행이 조합장네 삼달 하동 도로변에서 들어가는 입구로 그 안에 전부 내 손으로만 거의 다했는데. 

삼달리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돌 작업.
삼달리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돌 작업.

아, 그 작년엔가. 새로 밭 사가지고 돌담을 두르는데 일 해달라고 해서 한 열흘 이상 하다가 그냥 돌을 잡아던졌는데 아, 그때 팔에서 끽! 하는 소리가 나더니만 도저히 팔을 쓸 수가 없어. 아, 나 오후에 일 못허쿠댄핸 병원에 강 엑스레이 찍으니까 힘줄이 나가버렸다고,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되켄 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쌩것도 나갔는데 수술행 붙이면 조금 힘쓰면 그냥 있겠나 싶어서 수술을 안하고 지금까지 버텨오다가 요 근래 들어서 너무 아파가지고 병원에 가서 자꾸 물 빼고, 주사 맞고, 약 먹고 하다가 제주시 우리의원이 어깨 수술 잘한다고들 하길래 한 일주일쯤 됐구나. 저번 주에 가가지고 MRI 촬영을 해봐야 되겠다대서 MRI 촬영하니까. 힘들이 나간 게 너무 줄어들어 버리니까 이거를 수술해서 땡겨 묶어도 또 금방 나가버릴거랜 허니까. 이거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편안할 것 같고 연골이 다 닳아가지고. 앞으론 인공 연골을 넣어야되겠다고.

“인공 연골을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원장에게 물으니까 인공 연골을 넣으면 전혀 아프지 않는다 하고. 그 대신 밥은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밀감 컨테이너를 들거나 무거운 걸 드는 건 절대 못한다.

“그러면 난 수술 안 허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만, 일만 해온 사람인데 남 일하는 거 보면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집사람이 77세인데 내일모레 팔순 나는 할망 일허는 거 보면서 내가 어떻게 가만히 쳐다만 보고 살아요. 일을 안 했던 사람 같으면 몰라도. 그래서 그대로 이제는 수술 안 하겠다고. 아프면 주사 맞고 진통제 먹고 하면서 그대로 하다가 정 안 되면 죽어버리겠다고 해가지고 수술도 안 하겠다고 허난 만약에 수술이 필요허거든 전화하라고 번호 알려주니까 알았댄 허영 그자 와부런.

열여섯 살 때부터 해서
한 55년 충분히 헌 거 닮아

Q. 돌일은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열여섯 살 때부터 허연 50년을 해서. 전분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고 한 17살 때부터 그 과수원 돌담 쌓는 데 갔지. 19, 20살 돼가니까 아버지 같이 따라다니면서 건축 담 쌓고 허다보니까 한 55년 충분히 일해지지 않았나.

Q. 몇 년 도에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1947년 여기 신산리에서 태어나서. 원래 증조할아버지는 귀덕인데, 증조할아버지가 신산리에 고기 낚으러 왔다가 살아보니까 사람이 인심도 좋고 아무래도 북군 인심하고 그땐 여기를 정의랜 해났는데 정의 인심하고는 이건 모든 게 다르지. 사람 인심들도 좋고, 욕심도 없고, 사람 살만한 데가 신산리라고 하면서 고향에 그 배 타고 가가지고 밭이영 집이영 다 팔고 가족들 전부 배에 실어가지고, 

“난 정의(조선시대 정의현, 현재의 성산읍·표선면·남원면 지역)로 감시난에 찾아보지 말라.”

귀덕 우리 궨당들이 막 모여들엉 배에 닷줄을 심엉 동겨가니깐 우린 할아버지가 자귀로 닷줄을 탁 잘라가지고 그냥 와부럿댄.

경 해부니까 옛날엔 교통수단이 이섯수과. 정의에 가노랜만 허니까 그 할아버지의 손자들이 커가지고 교육자도 되고, 사업가도 있고, 건축업을 하고, 공사 일도 하는 업자가 되고 해가지고. 성산읍에만 오면은 여기 귀덕에서 와서 사시는 분 엇수겐 허멍. 성산 마을에 갈 때마다 물어신디. 신산에 와그네,

“여기 귀덕에서 왕 사는 분 엇수가?”
“아, 있수다.”

경핸에 그때부터 친척들 찾기 시작행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때부터 귀덕에 벌초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제 친척들도 다 알게 되고, 지금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고 한 분도 요번에까지 돌아가셔버리니까 여자 삼촌만 지금 두 분 남아있는데 다 돌아가션.

우리가 이렇게 팔촌지간 되는 형제간들은 이제 우리가 묘제를 촐령가서, 우린 고조할아버지의 큰아들 자손이니까 고조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귀덕에 있으니까 묘제 촐령가서 벌초하고 할 때는 팔촌도 자주 만나졌는데 우리가 가족공동묘지 만들면서 고조할아버지를 모셔와 버리니까 이젠 팔촌이랑도 멀어져불고, 만날 일도 없고, 거기서 묘제 보러도 안 오고 허니까 우리만 묘제하고 벌초하고. 나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라고.

Q.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는 올해가 17년째.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95세인데 78세에 돌아가셨으니까 17년째. 

Q. 아버지는 몇 살 때까지 돌일을 하셨습니까?

아버지가 60이 조금 더 되니까 돌일을 설렀는데.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술만, 술만 평생 먹다 보니까 결국 술병으로 몇 번 간도 나빠져서 병원에도 입원하고, 겨우 살령 놔두면 또 술먹고.

근데 워낙 힘때가 세고 덩치가 좋아서 그나마 잘 버텼는데 그렇게 술 중독되고도 칠십 넘어서 사는 분들이 별로 없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78세까지 그래도 살아서 돌아가션.

난 술 먹게 되믄 한 일주일 폭삭 먹고
끊으면 또 몇 개월 일절 안먹고

Q. 돌일 할 때 술은 안 드시는지?

나는 술을 입 붙영 먹을 때는 한 일주일 막 폭삭 먹고, 또 끊으면 또 몇 개월간 일정 안 먹고. 꾸준히 계속 먹는 술이 아니고 먹게 되면 한 며칠 막 먹어. 그리고 몇 개월 원 안 먹고. 난 술 먹을 때는 조금 하다가 아이구, 너무 오래 먹어지는 것 같다 생각들면 내일부터는 술 안먹으켜, 허영 술 안 먹고.

우리 그 갑장이나 동창, 초등학교 동창들이 술 중독된 애들이 전부 50대에 다 돌아갔어요. 전부 술, 소주 중독돼가지고. 뭐한 애들은 50대 되니까 전부 다 죽어버리대. 아홉 사람이나 죽어버렸는데 술 중독된 애들은 싹 죽어버렸어.

저번에 미천굴 놀러 갔다가 거기 사람들하고 막 모여가지고 소를 한 마리 잡아먹게 됐는데.

“나는 오늘까지만 술 먹엉 내일 부터는 술 먹지 말아야지, 속이 안 좋다.”
“내일 소 잡아먹을건디 이놈의 새끼 술 먹느냐 안 먹느냐 보켜.”

소 잡앙 술 댓 병 몇 개 갖다 놓고 해도 술 한 잔도 안 먹어서. 사람들이 완전 놀래부러요.

“야, 이 안주에도 그렇게 먹던 술 안 먹는 지독한 놈.”

담배도 좀 태우다가 25살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구덕에 놓고 흔들면서 담배를 태우는데 아기가 기침을 허여.

“야, 이거 큰일낫다. 내 자식을 위해서 담배 끊어야지.”

담배 거기서 딱 끊고. 옛날은 지포 라이터만 갖고 다녀도 좀 굉장했는데 나도 총각 때 담배 태울 때는 최고급 담배에 최고급 라이터는 다 갖고 다녔는데, 담배영 라이터영 전부 다 주면서 요것만 피우고 딱 담배 끊어버리켄 허영 담배 딱 끊어부런.

Q. 돌담 쌓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뭐라 불렀습니까?

돌챙이랜도 하고 조금 무시거헌 사람들은 석공이랜도 허곡 허는디. 술 먹엉 몽니가 안 좋은 사람들은 돌챙이옌 주로 곧고, 좀 얌전하고 그래도 괜찮다 하면 석공이랜 불러주고.

석공이랜도 허고 석수라고도 허는데 신산리에는 지금까지도 돌챙이, 돌챙이.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어도 돌챙이 아덜, 돌챙이 손지 영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게 술만 먹으면 몽니가 나쁘고 인심도 못 얻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돌챙이.

내 생각에는 그냥 석공이라고 하는 것이 좀 괜찮지 않은가. 석수라고 하면은 뭐, 것도 목수가 있으니까 목수, 석수 이렇게 좀 이제 구분이 되긴 하는데 그 수자가 들어가보니까 목수, 석수 하는 거는 좀 뭐가 될 거 같고 석공, 목수 이렇게 하면은 괜찮지 않을까? 석공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좀 괜찮은 거 같아. 돌챙이라고 해도 아무 관계 없는 거고. 

나는 와리도 하고 돌담도 쌓고 닥치는 양
아무거나 돈만 된다고 하면 일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돌챙이는 주로 와리 하는 사람, 어릴 때 보면은 돌 벌르는 사람을 주로 돌챙이라고 많이 불러났고, 돌을 전혀 벌를 줄은 모르고 우리 아버지네처럼 돌 쌓기만 하는 사람들은 보통 석수, 석공 그렇게들 대부분 많이 불러온 걸로 아는데. 그 돌 쌓기만 하는 사람한테는 돌챙이라 얘기하는 거는 별로 안 들어봐진 거 같은데. 돌챙이라하면은 돌 벌르는 와리 하는 분, 나는 와리도 하고 돌담도 쌓고 닥치는 냥 아무거나 돈만 된다고 하면 일하는 사람이니까. 제주도에서 최고로 큰돌 벌렀댄 소문났던 사람인데 돌 한 덩어리 벌러 갖고 제무시(미군용 트럭) 두 대에 실었는데. 제무시는 옛날 육바리 군인차. 군인 트럭. 그 제무시가 나온 후로. 이제 민간차들이 민간 덤프트럭이니 무슨 카고 트럭이니…, 이런 트럭이 나오기 전에는 그 군 트럭 밖에 없었지. 군인 트럭이 제일 먼저 나왔는데 처음은 휘발유 엔진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디젤 엔진으로 바꿔지면서 했지만은 앞 대우 있고 해노니까 옛날 군 트럭이 힘도 상당히 좋았어.

돌 한 덩어리를 벌러 갖고 제무시 차 2대로 실렀거든. 그 돌은 이 근방 석공들이 다 벌르러 갔다가 못 벌렁 내부렀댄 허는 돌. 그 돌집 주인이 지금도 살아계셔. 내가 스물일곱 살 때인가, 여덟 살 때인가 신산리 와가지고 날 불러 가지고, “야, 우리 집 안팎거리를 짓젠 허는데 네가 돌 깨고 답곡 허는 걸 맡아서 해달라.” “알았수다.”

큰돌로 지은 삼달리 돌집.<br>
큰돌로 지은 삼달리 돌집.

“걸라, 나영 같이 가그냉 돌 벌를 거 고르쳐주크매. 그 돌을 꼭 벌러그네 우리 집 담을 다와 주라.”

삼달리 올라가서 성읍리 쪽 내창에 들어갔는데 시커먼 집채만한 돌 가리켜주며 이 돌을 벌러 갖고 꼭 우리 집을 지어달라해. 이야, 이 돌 기가 막히다. 옛날 어른들 몰고랑 돌이라고, 그것이 연자방아랜허는가? 큰 돌멩이로 이런 돌판 위에서 소나 말로 돌리면서 맥주맥보리를 껍질 벗기는 그 연자방아 밑돌을 만들려고 다른 석공들 몇 사람이 와도 도저히 이 돌은 못 벌른댄 행 지금까지도 고만히 남아 있는 돌인데 이 돌을 벌러지겠냐고 하는 거라.

“벌러드립주.”

돌 한 덩어리를 벌러 갖고 제무시 차 2대로 실렀거든
그 돌은 이 근방 석공들 아무도 못 벌른 돌

그 큰돌 있던 지경을 ‘문궤’라고 부르는데. 일출랜드 미천굴 위쪽인데. 그쪽에 쪼끄만 문궤라는 굴이 있고 돌 입구 쪽에 있었지. 돌은 크기가 내 키 두 배는 못 되고 한 배 반은 넘은 것 같아보였는데. 길이로는 약 3m 정도 옆으로는 4m, 두께도 4m 정도. 크기가 어느 정도 되어야 대꾸로 벌르기 좋게 위치를 잡고 벌를 건디. 이거는 너무 커서 포크레인도 버쳐서 둥그리지 못해. 

그 돌 위쪽 모양이 한라산처럼 봉긋했는데 우선 그거를 이제 떼 낸 거지요. 주변에 있는 돌 모아다가 쌓아서 사다리 대신 놓고 올라서서 작업했지. 궁기(구멍)를 파고 야를 한 서너 개 물려가지고 이제 메질을 하는데. 돌 위에 올라서서 허리를 숙이고 메로 때려야 하는데 이런 메질을 수구리메질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위험해서 아무나 못해. 밑에 서서 메질을 하면 세게 못 때려. 높은 돌 위에 서서 메질하면 망치 무게 때문에 앞으로 꼬꾸라질까 봐 허리에 줄을 묶고 뒤에 고정 시킨 다음 메질을 해사 안전해.

그때도 줄 묶고서 했지. 먼저 위쪽 돌을 떼 내고 이렇게 펜펜허게 만든 다음 돌을 벌러야지 그대로 벌르면 반으로 반듯허게 안 벌러져. 돌 양쪽이 힘이 같아줘야 밑으로 일직선으로 내려오지 한쪽은 세고 한쪽이 약하면은 약한 쪽으로 돌이 타져부러. 작은 돌도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때려야 바르게 내려가지 한쪽으로 치우지면 똑바로 안 벌려져. 그런 데 꼭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잘라야 하겠다 하면은 야 구멍을 돌이 두꺼운 쪽으로 비스듬하게 뚫러야 해.

돌 위쪽에는 야를 많이 물러줘야 해요. 도로무깡(드럼통) 잘라서 철판을 막 길게 만들어서 준비하고, 대 알귀(큰 야) 내 걸로만은 모자라니까 신산리 석공들 거 몇 사람한테 빌렁이네 12개인가 박았을 건데. 간격은 한 뽐, 20cm 정도 간격으로 해가지고 야 구멍을 파고 얇은 철판을 양쪽에 놓고 가운데 야 놓고 위에 아홉게 정도. 밑에서 세 개, 밑에는 많이 박지 못해요. 위에서 때려야 하는데 밑에 거는 깊어서 못 때리니까, 위에서 메로 때리는데 그때 힘이 어떻게 좋았는지 그때 오갠노 무게가 삼관오백(약 13kg)이었는데 한 번 들러서 야를 때리기 시작하면은 50번 때려.

수구리메질. / 사진=제주대학교 박물관<br>
수구리메질. / 사진=제주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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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나에 10번씩을 때려놓고 밑으로 요거 요거 때리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돌 위에 서서 옆으로 치는 거는 아무나 잘못 치다가는 큰일나부러. 이건 웬만한 기술자 아니면 이런 거 치치 못하는데 밑에 야 칠때는 한 열 번 정도씩 쳤을까 상당히 힘드니까. 오전 내내 궁기만 치고 오후 내내 매질하다가 쉬었다가 매질하고. 그래도 저녁때가 되도 돌이 안 벌러져 워낙 커노니까. 벌러질 생각을 안해.

그 어른 하는 거 보고
아 선배는 선배로구나, 감탄했지

그때 같이 갔던 분이 그 사람도 완전히 이름나게 석공 했던 분인데 나이가 드니까 이제 오갠노질 같은 거는 버쳐서 못하고 돌질은 잘 아니까 구멍만 치고 작은 돌 두 개로 벌리는 거 정도는 내가 할 거고 큰 걸랑 니가 허랜. 나 일당은 호꼼만 줘도 좋댄. 담배값 허곡 술값만 해지면 좋댄허멍 막 부쪄달랜 허난 그 어른을 데려와젼.

술을 한 되 상 강 둘이서 먹다가 조금 남았는데 집에 가젠허난 그 삼춘이 술을 야마다 비우는 거여. 

“아 무사 그 귀한 술을 비와붐이꽈?”
“아, 이거 비왕 놔두면은 지금은 술이 가만히 있는데 내일 아침 와바서 이 술이 없어지면은 돌이 벌러진 거고, 술이 그대로 있으면은 돌이 안 벌러진거다.”
“아, 그렇구나.”

그때는 술보다 물이 더 귀해요. 그 당시는 물을 담고 갈 통이 없어서 웃뜨리에 일 허레 갈 때는 술 댓 병에 길엉 가곡, 그렇지 않으면은 자그마한 애들 지는 물허벅에 물 담앙 짊어지고 가야 해서, 물을 마음대로 가졍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웃뜨르 강 일할 때는 상당히 물은 힘들어 가지고. 물은 아끼고 술은 많이 먹는 것이 아니니까 내일 또 사서 올라가면 되니까.

뒷날 아침에 다시 올라가서 점심 그릇 짐 놓자마자 얼른 올라가서 영보니까 술이 깨끗허게 말라버린 거여. 삼촌이 허는 말이 “야, 돌 벌러졌져!” 

가만히 보니까 돌과 야 사이에 금이 보이는 거야. 돌이 벌러지니까 술이 밑으로 내려가버리니까 술이 없어져버린 거라. 

그 어르신 허는 거보고, “아, 선배는 선배로구나!” 

술 때문에 벌러진 거는 아니고 하루 종일 야를 때린 힘에 밤에 잘 때 벌러진 거죠. 야가 꽉 물려 있으니까. 그리고 이게 그대로 돌에다가 야를 물린 게 아니고 철판을 놔서 야를 물려놓으니까.

돌 깨는 것은 장작 패는 거와 같아
돌이 질이 있는데 그걸 잘 찾아서 벌르면 쉬워

Q. 돌을 잘 벌르는 요령이 있습니까?

돌도 아무 델로나 때리는 것이 아니고 돌 전체에서 보면 약한 쪽이 있고 쎈 쪽이 이서. 구멍이 좀질고 되도록 구멍이 없는 쪽으로 야를 물려줘야만이 쉽게 벌러지지. 구멍 많은 쪽에 야를 물려서 구멍 없는 쪽으로 돌을 벌르면은 오갠노질을 3배 이상 해야 허여. 굉장히 힘들어요.

돌 깨는 것은 장작 패는 거와 똑같다. 왜냐하면은 장작을 세워서 위에서 때리면 반으로 잘 나가는데 옆으로 가로 짜를라면은 상당히 힘들죠. 돌도 그 질이 있는데 그 질을 찾아서 처음 벌르면은 쉬운데 질을 잘 못 찾아서 벌르려면 상당히 힘들어요. 완전 쎈 가다이(먹돌), 곰보가 전혀 없는 먹돌은 아무델로나 벌러도 관계가 없어요. 두꺼운 쪽, 쎈 쪽으로만 벌러주면 돼요.

Q. 돌에 야 구멍은 얼마 깊이로 뚫어주나요?

구멍은 깊이 팔수록 돌이 잘 벌러지지요. 얇게 파면은 돌은 안 벌러지고 거기서 주적(돌 파편)이 나와 버려요. 주적이 나버리면은 다시 구멍을 더 파고 더 큰 야를 박을 수 밖에 없지요. 한꺼번에 벌를 수 있도록 야의 3분의 1이나 4분의 1 정도만 남겨주고 톡 허게 구멍 속으로 내려가야 돌이 잘 벌러져요. 어찌됐든 깊이 팔수록 좋아요.

Q. 야를 박고 메로 때릴 때 순서는 어떻게 되나요?

이 안으로부터 막 때려와야. 안으로부터 막 세게 물려놓고 가에까지 똑같이 야를 물린 다음에는 이젠 밑에 야를 때려워야 돼요. 위쪽에 박은 야들이 벌어질려고 죽을 힘을 다 내고 뭐 헐 적에 아래쪽 야부터 때려서 올라와야 쉽게 벌러지지 위에 것부터 막 때리당은 잘못허민 옆으로 나가버릴 수가 있어. 두불 때릴 때도 안쪽에서부터 때려와야. 순서는 마찬가지. 통나무 장작 패는 거하고 똑같아. 도끼로 위로도 때리고 옆으로도 때리곡 허듯이.

돌에 바로 야를 맞물리면 제끼는 힘이 없어
철판을 물리면 힘이 곱빼기로 나

Q. 야와 돌 사이에 왜 철판을 넣는 건가요?

돌에 바로 야를 맞물리면 제끼는 힘이 없어요. 철판을 물리면 힘이 곱빼기로 나. 돌에 바로 야를 박아 버리면 돌이 절대 안 나가요. 차라리 띄우는 게 낫지. 띄우는 거는 볏짚이나 뭐 놔가지고 돌이 야를 물지 못하게 짚을 놔가지고 돌을 띄워주면은 이것이 탁탁 때리면서 이렇게 벌어지게 만들 수가 있는데, 돌과 돌이 서로 물어버리면 돌이 절대 안 나가요. 이건 뭐 굉장히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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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번 때려서 나갈거 열 번 때려도 안 나가요. 돌이 야를 딱 물어버리면 그 야를 빼가지고 찍을 놓고 야를 탁 때리면 반동으로 야가 탁 튀어 올라야 돌이 잘 나가요. 탁탁 튀어 오르다가 탁 물면은 그때는 돌 나간 거예요. 

이렇게 큰돌을 벌를 때는 크기가 워낙 크니까 이건 야를 꽉 물리지 않고는 안 되는데. 이건 띄울 수가 없으니까 이거는 물려놓고 해야 하는데 그 외에 웬만한 돌들은 팍팍 띄워줘야 돌이 빨리 나가요.

돌에 금이 간 상태에서 몇 번 안 때리니까 돌이 쫙 벌러져. 일단 한 번만 나가면은 그 다음부터는 굉장히 쉬워요. 그 다음부터는 뭐 그 철판 물릴 필요도 없고 돌이 아무리 커도 한 번 벌러지면은 너덧 개만 박고 코(측면에 박은 야)도 하나만 걸리면 그대로 팡팡 나가기 시작해요.

제일 첫 번 돌을 두 개로 젖혀놓을 때가 최고로 힘들어요. 그 다음부터는 계속 반씩 반씩 벌러나가면 돼요.

돌덩어리 쇠덩어리 보단도 강했던 내 몸뚱어리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Q. 큰 돌은 상당히 큰데 어떤 방법으로 땅에 눕힙니까?

우선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돌 밑에 흙을 막 파고 이만큼 솔지고 절로 이만큼 긴 대꾸로 딱 제끼면 뭐 벌른 거 제끼는 건 문제가 아니라

Q. 멀리 돌일 하러 갈 때 도시락은 주로 어떤 걸로 싸가시나요?

옛날에는 보리밥에, 겨울이면은 좁쌀하고 보리쌀 반반 섞은 거. 물에 된장 풀어서 국해서 먹고, 반찬은 해봐야 김치. 바닷고기 있으면 구운거 가져가서 해결하면서 다니는 거지 뭐.

Q. 큰돌은 어떤 크기로 벌러서 차에 싣습니까?

보통 우리가 돌을 벌를 적에는 신발 신은, 발로 딱 짚으면은 이 정도면 30cm 기준.

벌를 때는 끌 길이에 대강 맞춰서 딱 궁기(구멍)쳐서 그 돌을 일정하게 담을 쌓을 수 있게끔 2~3전 차이로 비슷하게 맞춰서 와리를 해줘야지 그냥 되는냥 막 와리 해버리면 나중에 돌담 쌓는 석공들이 굉장히 애먹지.

돌은 맨 처음 밑에서 35전 놓으면은 35전짜리로 계속 맞추면서 올라오잰 하면은 돌 찾는게 힘들고 하니까. 어느 정도 석공들이 그걸 맞춰서 조금씩 줄여 가면서 쌓아야 돼요. 돌의 척수(길이)가 너무 안 나와서 5cm 이상 차이 나가면 그건 따로 놔요. 나중에 따로 실어다가 다 마무리될 때 맨 위마무리 돌로 사용해요. 와리 내는 것도 많이 하다 보면은 다 요령이 생기고 또 와리를 잘해야 소문 들으멍 일도 해달라고 그래.

아무렇게나 막 허민 다음에 사람들이 빌질 않지. 그런 식으로 해서 내가 살아와서 지금은 몸이 다 망가져 버렸어요. 몸을 너무 무리하게 써 버려가지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일하면서 목표가 70살까지만 일하자 했는데 70까지 일해도 아픈 데도 없고 힘이 남아돌고 일은 막 해달라고만 하고 하니까 한 5년만 더해야지 하다가 결국 다쳐가지고. 게난 애들은 일하지 말라고 엔간히 했는데도 집사람도 못하게 말렸는데 그때 안했으면 인대도 나가버리지 않고 관절도 괜찮았을건데. 그래도 하다 보니까 일하고 싶어가지고, 또 해달라고도 하고.

한 번은 병원에 주사 맞으러 갔다 오면서 나도 모르게 막 울어져서. 팔이 연골이 하나도 없이 다 다여가지고 팔을 못 쓰게 돼서 인공관절을 놓고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인공관절을 노면은 아무 것도 못하고 화장지로 뒤 씻는 것도 힘들다고 하더라도…. 야, 그렇게 할 바엔 죽는 게 낫지 이건 뭐, 그렇게 하면서 살 수가 있는가 싶어서. 돌덩어리보단도 세고 쇠덩어리 보단도 강했던 내 몸뚱어리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고 생각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흐르는 거라….

근방에 딸 많이 낳은 사람 많지만 딸들이 부모 데령
미국여행 갔다 온 사람은 나밖에 어서

어깨가 아프고 물도 차고 하면 병원에 가서 물도 빼고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계속해도 효과가 없어서 지금은 병원 안 다니고 서울 경희대 한의학과에서 만든 한약을 먹고 괜찮아서 지금은 생활하고 있어요. 연골도 보강해 주고 수술을 안 해도 견딜 수 있는 약을 제조한다고 해가지고 주문해서 먹어 보니까, 한 달 먹었을 때는 효과가 전혀 없었는데 한 달이 지나니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삼 개월을 먹으니까 좀 괜찮아요. 250만원 어치 5개월을 먹었는데 주사도 안 맞고 양약도 안 먹고 물 차는 증상도 없어지고 해서 지금은 활동하고 일하고 다니고 있어요.

Q. 돌 쌓는 일이 재미가 있으신 거지요?

일하러 가면은 주인이 좀 어려운데 돌아가는 데나 입구 어귀나 귀야지 귓담 같은 거는 삼춘이랑 요디 해줍서, 이렇게 하면서 항상 하고.

Q. 여기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장이 있는데요?

이거는 환갑에 우리 셋째 딸하고 사위가 아버지 생일 축하해주러 오면서 갖고 왔고, 요건 칠순 때 애들이 만들어 왔는데 24k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빛난 거우덴허멍. 나는 이런 거 하는지 전혀 몰랐어.

이건 신산리 마을에서 준 건디 ‘자랑스런 신산리상’을 만들어가지고 1호로 나를 줬어요. 첫 해는 신산리 사람 중에 마을을 위해 헌신한 사람 주고, 다음 해에는 외지 나가서 신산리 마을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뽑아서 주기로 했는데, 그 1호를 누구에게 주느냐 마을 유지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만장일치로 나에게 주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받게 됐어요.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자식을 잘 키워서 마을에 이롭게 했다고. 50세부터 거진 70세 될 때까지 마을 개발위원을 하면서, “마을에 일한 거 있습니다.” 하고 이장이 전화 오면은 마을 일하러 가지, 나 돈 벌레는 안 갔어요.

 

Q. 자녀들은 몇 입니까?

5녀 1남. 우리 제주시에 사시는 친척 분들이 우리 고조할아버지 묘에 비석을 세우게 됐는데 나만 아들이 없는 거여, 큰 아들인데.

“야, 아들 엇이 어떻게 비석 만들거냐. 빨리 아들을 낳아야 할 거 아니냐.”

그때 집사람이 딸 넷을 날 땐디 “삼촌님, 조금만 기다려주면 어떻게든지 아들을 낳겠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막 사정허영 비석을 조금만 연기시켜 달라고 했는데. 또 낳았는데 그것도 또 딸을 낳아부렀어. 에 에, 이젠 비석 세워야지 안되켄 허멍 막 해도. 아이, 안 됩니댄 쪼끔만 더 기다립센 허영 결국 아들 낳으니까 비석에 딱 이름 올령 비석 세완.

신산리 근방에도 딸 많이 낳은 사람은 많지만 딸들이 부모 데령 미국여행 갔다 온 사람은 나밖에 어서. 군대 간 딸이 미국 가서 6주간 교육을 받았는데 가서 보고는, “아,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여기를 꼭 와야겠다.” 언니들한테 얘기하니까 5형제가 논의해서 자식들 다 데리고 해서 미국 가서 15일간 여행하고 와서.

Q.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해주십시오.

나 욕심으로는 지금 50살만 된 것 같았으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잘 가서 일해주고 칭찬받고 싶은데, 사람이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모든 거 다 내려놔야죠. 나는 마을사람들이랑 모여서도 항상 얘기하는 게 나는 팔십까지만 살아져도 좋다. 다른 사람은 100세니 150세니 이야기들 해도 나는 80까지만 살아지면 좋다고 하니까, “요즘 세상에 80까지만 살아서 됩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 못하고 지금까지 1시간도 시간을 헛되게 낭비 안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죽어도 나는 후회 없다, 자식도 훌륭하게 다 키워서 이름났고 나도 내 먹을 만큼은 벌었고. 그래서 특히 자식들 잘 커준 거 하나 나는 기쁘게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지금 죽어도 원이 없다.”

이런 얘기 하면은 형님, 참 대단하네 이러는데. 신산에서 형님같이 그렇게 자식 농사 잘 지은 사람이 어디 잇수과 허멍 사람들도 다 얘기 해줘. 내 앞에서는 뭐 당연히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우리 애들이 그렇게 이름나게 해줘.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정 많고 사랑 많은 멋진 분, 나의 아버지
딸 현영실

제주도를 대표하는 상징 중에 하나인 ‘돌’

돌을 생각하면 우직함과 단단함, 견고함 등과 함께 무언가로부터 항상 지켜주는 든든함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아버지께도 그런 모습이 보였다.

늘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모든 것들을 해내시는 우직함이 있고 한 담 한 담 돌을 쌓아 가시는 모습을 보면 단단하고 견고함이 보이고 완성되어진 돌탑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서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기둥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9남매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가족들을 책임지셨다. 9남매의 맏이로서 집안을 이끌어 가야하는 책임감이 아버지의 어깨를 많이 힘들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정 많고 사람 많은 멋진 분이셨다. 우리 가족도 육남매로 다소 많다는 느낌은 있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우리들을 가르치시며 몸소 보여주시는 삶으로 산교육을 실천하신 분이라 할 수 있다.

현태성 장인.
현태성 장인.

어릴 적 기억하는 나의 아버지는 동네의 모든 궂은 일은 다 돌아보시며 손수 도와주시고 무너진 돌담들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도움을 요청하는 집에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며 도와주시는 자상하신 분이시다.

태풍이라도 불고 지나간 뒤엔 무너진 돌담들을 말없이 다시 정비해주시고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을 꼭 챙기시는 정 많고 부지런 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시다.

예전에 제주도는 도둑 없고, 대문 없고, 거지 없는 순수하고 청결한 생수 같은 곳이었기에 온 동네가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아버지는 몸이 많이 쇠하여 지셨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해서 아프시는 것을 보면 그 옛날 너무 고생 하셔서 그런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법 없어도 온전하게 살아가실 만 한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해봅니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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