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7) 감나무

 

감나무

단풍 한 잎에도 곱게 늙는 법이 있다지
박토 위 한 생애를 순한 빛만 추스르며
가난도 정으로 달래던 
내 유년의 감나무야

때로는 그 고집이 감잎 따라 물이 들고
토종감 정수리에 검버섯도 필 쯤 해서
촌로는 노을을 향해 
빈 지게를 내리는가

천년을 느껴 흐르던 한반도 저 강 빛 만치
어버이 먼 심려에 떫은맛도 삭혔을 오늘
이승의 종언終焉만 같은 
한 톨 감이 붉게 탄다

/1988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남제주군 남원면 위미리 1912번지, 올레가 길었던 그곳에는 안거리 밖거리 그리고 외양간 등 초가지붕이 셋이었습니다. 남향인 안거리 동쪽에 부엌이 있었고, 부엌 동쪽 문을 열면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독대 한 쪽을 살짝 비켜 토종감나무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돌담이 높았던 우리집 울타리에는, 감나무 잎이 바람에 훼손되지 않은 채 곱게 단풍이 들었고, 그 감나무에 토실토실 영글어가는 토종감 열매들이 마치 우리 가족들처럼 사랑스러웠습니다. 더구나 그 감잎이나 열매를 키워준 감나무는, 내 유년시절의 아버님 모습을 닮았던 것 같습니다. 

사시사철 바람에 시달리는 제주나무에는 어디 하나, 온전한 잎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 “단풍 한 잎에도 곱게 늙는 법이 있다”는 시조 첫수 초장은, 바로 내가 살던 초가집 장독대에 함께 거주하였던 그 감나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골 어느 집에나 한 그루씩은 심어져 있던 감나무와, 봄 여름 가을이 지나 겨울에 들면, 올레길 돌담 사이로 짹짹 거리며 초가집 굴뚝을 들락거리는 굴뚝새를 만나기도 합니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제주를 떠나 단풍든 나무들을 봅니다. 그러나 한반도 내륙 깊이 들어가 보면 그곳 무풍지대의 온전한 모습으로 단풍드는 나뭇잎에 부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천자문 57번째, ‘열매 과果’를 만났습니다. 이때 「홍시」라는 단시조 한 편을 나에게 던져주었던 ‘열매 果’ 자가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바로 이 맛이야
한평생 우려낸 맛

저처럼 나도 익어
잘 익은 시를 낳아

뜨겁게 빨간 입술로
빨려들고 싶어라 (2012)

 「홍시」 전문

이처럼 평소 주변 사물들과 잘 사귀어두면, 언제 어디서나 나의 시취詩趣에 딱 알맞은 맛깔의 시의 선물을 저들에게 받을 수 있어 살맛이 난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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