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88)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창비, 2023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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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던 삶에 갑자기 비극적인 사건이 닥쳤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런 비극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몸담은 공동체 그리고 내가 거주하는 지구 행성 전체의 문제라면? 

분명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종류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매일매일 발표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통해 불분명하지만 강렬하게 감각되는 비극. 처음 비극이 닥쳤을 때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고 이겨내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다. 그렇게 4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지금 팬데믹의 기억은 어느덧 희미해져 간다. 팬데믹 기간에 넘쳐났던 질문들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제 비극의 시간은 끝난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 코로나 예방접종의 피해를 보고 여전히 투병 중인 사람들, 팬데믹 시기에 직장이나 경제적 터전을 잃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 비극은 숨어서 여전히 진행 중이고 팬데믹이 남겨놓은 상흔은 깊다.

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에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그러한 팬데믹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란 대체 어떤 종류의 세계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질문은 코로나 팬데믹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는지, 또 코로나 팬데믹은 언제 끝나게 될 런지와 같이 우리가 마음속에 품어 봤음직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비극, 이런 파괴가 가능해진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비극적인 것과 세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 비극적인 것에 의한 상실의 감각이 세계에 대한 감각을 구성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비극적인 것은 세계가 그런 사건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충격과 당혹감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비극적인 것은 세계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라고 말한다. “비극적인 사건이 비극적인 것의 원인일지라도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한데 모여 세계의 구조를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이 드러난다. 사건은 그 원인이지만 세계는 동시에 그 조건이자 현상 그 자체이다.”(43-44쪽). 비극적인 것은 그 원인이 되는 사건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조건으로서의 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시에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던져주는 현상이다. 우리는 비극적인 것을 통해 변화한 세계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갖게 된다. 

특히 팬데믹 시기에는 ‘접촉’과 ‘호흡’ 그리고 ‘거주 공간’에 대한 감각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누군가를 만지거나, 누군가와 예상치 못하게 가까이 있다거나, 누군가가 내쉰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감각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호흡, 접촉, 타인과의 연결을 두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팬데믹 시기에 우리는 마스크와 거리 두기, 격리를 통해 접촉을 상실하고 가족을 넘어선 친밀성과 사회성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자신만의 울타리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된 세계에 대한 감각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존적이고 연결된 존재인지를 일깨워 주기도 했다. 호흡과 접촉을 통해 신체의 경계를 넘어 침투해 들어오는 바이러스는 온전한 경계로 이루어진 완결된 신체라는 관념을 허물고 우리가 주위의 세계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지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 몸은 외부의 침입자를 방어하는 충직한 면역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감염이나 백신을 통해 외부의 적을 우리 몸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 무조건적인 부정과 배제의 면역만으로는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할 수가 없다. 면역학적 위기를 무릅쓰고 바이러스를 우리 몸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지구 행성 안에 수용할 때만 역설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코로나 팬데믹은 나와 타자 혹은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라는 이분법으로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상호 얽힘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어떤 신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들과, 객체들과, 표면들과, 그리고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 그 어떤 이의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의 것이기도 한 공기를 포함한 원소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66쪽)한다.

그래서 “이것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 거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버틀러는 팬데믹으로 인해 변화한 세계에 관한 감각 속에서 어떤 윤리적 교훈을 끌어낸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의 삶은 오롯이 나 자신만의 것이라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있었다면 팬데믹이 불러온 새로운 감각, 즉 나는 불투명한 존재이며 내 안에는 다양한 타자가 침투해 들어와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자족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존재가 아니라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의 삶은 “단수이자 대체할 수 없는 삶이지만 동시에 다른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 체계 및 네트워크와 공유하고 있는 삶”(75쪽)이기도 하다. 팬데믹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로서 비극적인 것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인 감각을 갖게 해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의 감각이 우리 모두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지는 않는다. 팬데믹 초기 몇몇 나라에서 벌어졌던 집단 면역에 관한 논란에서 그런 점이 두드러졌다. 꽉 막힌 경제 활동을 풀기 위해, 건실한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격리와 봉쇄를 해제하려고 했던 것은 노인, 필수 노동자, 소수자, 가난한 이, 면역 저하자의 생명을 담보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려 했던 지독한 시장 합리성의 발현이었다. 버틀러는 집단 면역은 결국 “가장 취약한 이들의 건강보다 경제의 건강이 더 중요하므로 이 병으로 죽게 될 모든 사람들은 죽게 놔둬라!”(171쪽)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유색인종, 빈민, 이민자, 장애인 등 취약 집단을 가장 먼저 공격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여과 없이 드러냈다. 미국에서는 백인 대비 유색인종의 감염 확률은 3배, 사망 확률은 2배라는 통계가 집계됐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라는 질문은 공통의 비극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처럼 지독한 불평등이 지속되고 강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팬데믹 시기에 취약한 조건으로 인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곁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적절하게 공적인 애도를 보냈던가? 예를 들어 코로나 예방접종 부작용 탓에 사망한 사람들은 공적인 애도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여전히 보상과 배상의 정치에 포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애도 가능성이 어떻게 불공평하게 할당되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인정과 불평등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책무는 팬데믹으로 인해 팽배해졌지만 분출되지 못하는 상실의 감각을 정당한 애도와 세상에 대한 요구로 바꿔내는 일이다. 우리가 모르는 이의 상실을, 너무 먼 곳에 있어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상실을 애도하고 기념함으로써 하나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다시는 공적인 애도 가능성이 침해받지 않도록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일. 이것이 팬데믹 이후 남겨진 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인 요청이다.

결국 팬데믹은 우리가 서로에게 온전히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같은 공기를 함께 들이마시는 존재, 그래서 오염되거나 바이러스가 가득한 공기에 대해 공통의 취약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었다. 또한 이런 근본적인 취약성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사회적 지원이 배분되는 과정은 공평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는 우리보다 사회적으로 더 취약하고 불평등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단순히 우리가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최선의 상호의존성을, 누군가가 소외되고 차별받지 않는 형태의 상호의존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될 것이다. 


# 황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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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박사.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팬데믹,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공저),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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