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8) 담쟁이 바람벽에

 

담쟁이 바람벽에

애써 벽을 넘고 다시 벽에 갇히리라
하루 한 번 갇히고 하루 한 번 탈옥하는…
저들은 절망 앞에서 
사다리를 버린다

한 뼘 오르기 위해 두 뼘씩 낮추는 비법
담쟁이 초록연대가 머물다 간 바람벽엔
선천성 외유내강의 
육필 획이 넘치고

앞에서 뼈를 버리고 뒤에서 어둠을 쓸며
낙지보법 하나만으로 산전수전 건너온 그대
외고집 갑골문자엔
마침표가 
없었네

/2011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십이월이 되고 진눈깨비 내리면, 담쟁이들도  빨갛게 단풍 든 제 이파리를 내립니다. 이파리 없는 담쟁이 줄기에서 하루 한 번 갇히고 하루 한 번 탈옥하며, 그 절망을 극복해온 한 넝쿨식물의 고집과 유연성을 배웁니다. 외고집 갑골문자 같은 담쟁이줄기 끝부분에는 마침표가 아닌 말없음표가 몇 점 씩 찍혀 있습니다. 

그리운 마놀린! 넘어서는 안 될 선일수록 범하고픈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라, 적어도 글 속에서 만큼은 원론적 울타리에서 탈출해보려는 게 한결같은 제 ‘글 버릇’입니다. 날마다 갇히고 날마다 탈옥하는 담쟁이의 처세술을 배우려 여기저기 떠돌다가, 아차! 이번엔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다도해 한 민박집에 사흘째 갇히고 말았습니다. 

“크르렁 크르렁!, 내가 기필코 너의 모서리를 깎으리라, 내가 기필코 너의 모서리를 깎으리라!” 풍랑주의보가 내리진 섬 자락에, 수박덩이만한 화강암을 굴려대는, 밤바다 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튿날 아침 창을 열고 바다를 보았습니다. 눈발 흩날리는 바다 중심을 가르며, 떠나가는 화물선 한 척이 수평선을 허물고 있었습니다. 떠나는 배의 뒷모습이 어깨 넓은 사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저렇게 큰 배는 이 정도의 풍랑주의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착할 항구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화물선은 여기에서도 나에게 짤막한 시조 한 수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다시 넘는구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눈 오는 날을 골라 수평선 허무는 배

등 돌린 말없음표가 

점 점 점 점 

흐리다. (2007) 

-「선의 침묵」 전문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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