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9) 오석烏石 한 점

 

오석烏石 한 점

언제나 돌과 진리는 낮은 곳에 자리했다
맞닿은 인연 앞에 몸과 마음을 고쳐 잡으며
한 덩이 오석烏石을 껴안고 
밤새 볼을 비비던 사람

탐석의 먼 길에서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발 딛는 곳곳마다 시와 사랑을 싹틔우던
묵묵히 바위 하나가 
지고만방의 길 밝히네

어둠을 겹겹이 모아 한 올 빛을 저장하듯
마모된 조약돌에도 심장 하나씩 감춰놓고
사람을 기다린 것이 
하늘이고 땅이란다

사랑도 미움도 한恨도 다 삭힌 형상석 하나가
바람서리 불변함으로 정온히 몸을 뉘일 때
창변의 아침 수반에 
금발 머리 태양이 뜬다

/ 2013년 고정국 詩

사진=고정국 시인
사진=고정국 시인

#시작노트

1988년 신춘문예 당선했을 당시, 수석壽石을 취미로 하는 지인으로부터 오석烏石 한 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시조 일만 계단 내려 걷기 한창인 2013년 겨울에서 봄 사이, 심하게 앓았던 대상포진의 병마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나의 병상 머리맡을 오직 그 오석이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도내 수석모임 한 곳에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수석회 회원 각자가 수집한 수석 작품들을 전시하면서, 그 사진집에 게재할 축시 한 편을 부탁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필자로써, 축시를 쓴다는 것은 암만해도 무리인 것 같아 고사하려고 전화를 끊으려 했습니다. 그때 문득, 30년도 훨씬 넘게 내 곁을 지켜오던 그 오석烏石이, 묵직한 어조로 “이럴 때 이 친구에 대한 시조 한 편 써준다면 어디에 덧나우?”하며 퉁명스런 몸짓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차!” 이제야, 주변의 온갖 것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이 오석친구에겐 그토록 무심했다니… 속으로 “미안해, 미안해!”를 반복하면서, 오랜 세월 갈고 닦아온 시력, 어휘력, 상상력을 오석 앞에 쏟아놓았습니다. 

즉석에서 이 작품을 쓰고, 이를 지켜보던 오석을 물티슈로 곱게 닦고는, 이 작품을 낭송해주었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물티슈에서 묻어난 물방울인지, 그 오석 정수리에 습한 기운이, 오래도록 묻어있었습니다.

한참 후 해당 수석회에서 엮어낸 묵직한 사진첩 한 권이 배달 돼 왔습니다. 컬러판으로 제작된 그 책 첫 페이지 양면 가득, 이 축시와 나의 프로필 사진 그리고 약력 등, 무슨 대단한 시인인 것처럼 장황하게 펼쳐놓고 나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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