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이어도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지난 3일 극단 이어도의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지난 3일 극단 이어도의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 극단 이어도의 최신 창작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청년 준우와 그의 아버지 관희, 이 부자 관계가 극의 중심이다. 

관희는 우연히 형수로부터 노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더욱이 어머니가 이혼을 주도하면서 손자(아들 준우)가 서류 작업을 도와줬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하지만 정작 준우의 반응은 덤덤하다. 관희 부부는 준우가 고등학교 시절 이혼을 했었다. ‘부모 이혼’을 먼저 겪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픔에 대처하는 단계를 하나씩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감당하기 버거운 심적인 충격, 비통함이 내게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분노하고 원망하다가 어느 순간 침묵하고…, 이내 나를 흔드는 모든 상념들이 가라앉아 자연스레 밖으로 흘러가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 자칫 상대를 향한 무리한 시도는 서로를 헤집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물기까지 손대지 않고 시간을 둬야 한다는 것. 몹시 흥분하는 관희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소식을 나누며 마음을 추스른 과정은, 실은 아들 준우가 몇 년 전에 이미 지나온 길과 다르지 않다. 

나를 낳는 것도 버리는 것도 부모 마음대로라는 큰 실망감 속에 “그냥 흘러가게 둬”라고 흐느끼는 준우. 관희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도 비슷한 아픔에 처하면서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를 바라본다. 나이는 어리지만 앞서간 아들과, 나이는 많아도 뒤따라간 아버지는 그렇게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은 감정을 내밀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송정혜 작가의 장점이 빛난다. 길고 짧은 대사들을 리듬감 있게 배치하고,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함축적인 표현 덕분에 스케일이 크지 않은 작품임에도 몰입도를 확보한다.

특히, 제주어 대사는 말끝만 바꾸는 정도가 아닌 단어, 어감까지 상당부분 공을 들였다. 이 작품은 올해 제주연극협회 ‘제주 더불어-놀다 연극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연극제는 모든 출품 작품의 대사를 제주어로 변환했는데,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주어’ ‘연극’ 두 가지 모두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송정혜 작가의 이전 작품 ‘삐칠 준비가 되어 있어’(2022)는 오랜 극단 멤버들 사이에 쌓인 복잡한 감정들을 끄집어냈고, ‘몽골 익스프레스’(2019)는 퍽퍽한 도시의 삶에 고립된 두 남녀가 교집합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번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가족’까지 소재를 넓혔다. 관희의 형 관수, 관수의 아내 영주를 등장시켜 애증하는 형제(관수-관희), 자녀가 없는 중년 부부(관수-영주)를 다룬다. 소재의 영역을 넓히는 작가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다만, 관희-준우 부자 관계는 작품의 큰 주제와 맞물려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가온다면, 나머지 인물과 관계는 그만큼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관수-관희 형제가 추억 속 한 장면을 마지막에 재현하고, 중간에 중년 부부의 성격을 대사로 언급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관객을 향해 설명하는 준우의 역할이 중반을 넘어서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내용을 말로 풀어내면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인물 간의 배경과 서사를 효과적으로 엮어낼 만 한 뒷심 역시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성장’이다.

강명숙의 연출, 출연진과 제작진, 심지어 막을 전환하는 순간까지도 묘하게 여유가 느껴졌다. 정상언, 장원영, 이선숙, 좌진우 등 출연진의 연기에서도 기자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이어도 작품 ‘삐칠 준비가 되어 있어’와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달라질 만큼 여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배우들이 공감하기 용이한 일상 역할과 제주어 대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어도가 그동안 다져온 역량 강화의 힘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닌지 상상해본다. 

극단 이어도는 잇따른 대표 교체 등 한동안 부침을 겪으면서 활동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만히 손 놓고 있진 않았다. 기둥 역할을 해줄 멤버들이 자리를 지켰고, 제주문화예술재단 지원 사업을 적극 시도하면서 극단 안정화에 힘을 기울였다.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극작 능력 덕분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3대째 손두부’(2021) 같은 비교적 큰 도전도 가능할 수 있었다.

말과 행동에 한껏 자신감이 묻어나는 배우들, 단순한 장치로 현실과 과거를 구분하며 주제 구현을 뒷받침한 깔끔한 무대 연출,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공감’을 다루는 가족 이야기, 그리고 앞선 장점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극단의 지난 시간까지. 두 차례 공연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달라진 이어도의 모습에 반가워하며 기대를 가졌을 테다.

연극 ‘조부모의 이혼이 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올해 제주 연극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차근차근 나아갈 이어도의 행보와 다음 공연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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