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⑩ 돌하르방 조각 장인 김남흥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돌하르방 조각 장인 김남흥(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거주)<br>
돌하르방 조각 장인 김남흥(1967년생,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거주)

돌하르방을 직접 일일이 답사를 다니면서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이라는 것

Q. 다른 조각도 많은데 특히 돌하르방을 주제로 작품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 작업의 흐름을 보면 자연스러웠던 거 같아요. 그 ‘자연스러웠다’라는 게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전업 화가로 제주 풍경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계절 따라가지고 제주 전역을 누비면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1997년으로 기억이 되는데 어음2리에 갔는데 초가집이 갖고 있는 가옥 구조나 현상태 유지가 되게 멋스러웠습니다. 그림을 그리러 갔었는데 한 3~4일 정도 야외스케치의 특성상 계속 드나들면서 그곳에 계속 살고 계시는 할머니와 가까워졌습니다.

그 할머니도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은 좀 낯설었고, 당시만 하더라도 낯설었으니까.

“어디서 옵데가? 무슨 일 햄수가?”
나도 이런저런 답을 하고. 저도 궁금해서 물어보고,

“이 집 언제 지엇수과? 가족은 어떵 되엄수과?”

이런 애기들을 나누면서 그러다가 다시 그림을 이어나갔습니다. 이전만 하더라도 초가집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림을 그렸다라고 전제를 하면 할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워져서 내가 화폭에 임하는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는 거.

그거를 현상과 이면이라고 비유를 하고 싶은데 그 전 상황은 내가 현상을 보고 그렸던 이유였고, 그리고 현상들의 감춰진 이면을 느끼고 나서 그림에 임하는 마음은 되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전업의 길을 한 6, 7년 걸으면서 마침 시기적으로 그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맞물려가지고 내가 갖고 있는 뭔가의 그 부족함. 지역에서 나고 자라면서도 제주를 너무 몰랐다는 불편함. 결국은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지역 도서관의 향토자료실을 드나들면서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근거로 현장 답사를 한 3년 정도 공부하면서 돌하르방을 만나게 된 거죠.

돌하르방을 만나게 됐는데 막연하게나마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돌하르방은 다 알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도 하고 있었고. 그런데 현존하는 돌하르방을 직접 일일이 답사를 다니면서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이라는 것은 이 섬 땅에 돌하르방이 만들어져서 지금 시간까지 이렇게 편한 얼굴로 제주민의 결과 너무나 잘 닮아있는 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라는 것이 되게 안타까웠죠. 그래서 당시만 해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이 얼굴을 좀 알리고 싶어서 그림은 좀 뒤로 하고 돌하르방 조각을 하게 된 이유였죠.

그 얼굴을 어찌 됐든 알려보고자 재현작업을 거치면서, 재현 작업을 거치다 보니까 궁극적으론 처음에는 미학적 측면에서 고즈넉함의 여유로움을 두고 있는 그 얼굴이 안타까워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점점점 같은 작업의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깊이라는 것들은 왜 당시의 사림
들이, 선인들이 이걸 만들었을까? 이 돌하르방을 왜 만들었을까?

그런 이유에 대해 이해를 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론 섬 땅의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들을 위로받고자, 이렇게 위로받고자 세웠던 게 지배적으로 보는 속뜻이 아닌가. 그 이유를 알게 되니까 결과적으로는 당시 시대의 감정적 목소리가 반영이 있있다라고 전제가 되는 거었고, 그리고 창작자로서 2000년도에 새로운 돌하르방을 애기해도 되겠구나, 이런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죠.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2000년도에 내가 주제로 잡아야 될 영역이 뭘까 고민을 하다가 시대적으로 국가적으로 평화의 섬 선포식도 하고 막 이런 분위기라서 제주 섬땅에 평화라는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런 의미를 헤아리면서 돌하르방의 몸짓을 빌어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죠.

그게 이제 일련의 그림활동을 하면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들을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돌하르방을 만났고 그 만나는 과정에서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워서 조각을 하게 되고, 조각을 하면서 창작자로서 받아들여야 될 ‘숙명적 작업들이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지난 한
25년 걸어왔던 여정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늘 부단히 공부하고 자기 마음 수련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이해에 대한 깊은 울림이 온다

Q. 옛 제주 조상들처럼 돌하르방을 만들 때 마음의 위안이 되셨나요?

그렇죠. 그 동류의 작업을 거친다라는 건 동일한 감정선에 대한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처음엔 안타까워서 시작을 했고, 창작자로서 새로운 돌하르방을 보고 싶어서 만들었고, 일련의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이렇게 계속 고되어도 작업하는 이유가 뭘까라고 고민을 해보면 가장 본질은 아…, 재료에서 주는 영원성인 거 같아요. 영원성. 우리야 100세도 못 누리고 가야겠지만 조각되어있는 이 작품들은 만 년이 간다라는 영원성.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그 영원성이라는 깊은 매력이 있는데 그런 매력이 조각에 임할 때 적당히 못하는 마음의 태도를 또 필터링해준다라는 감정들, 그래서 매 작업에 진지하고, 많은 고민을 하고, 내가 갖고 있는 공부의 역량을 최대치로 꺼낸다라는 게 늘 고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거는 작가 양심을 늘 지키면서 숙명적으로 작업에 임하고 결과 또한 그렇게 만들어 내야 된다라는, 그런 전제 과정들이 작업 과정 과정에서 되게 마음 수련하는 이 과정이, 카테고리가 형성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런 작업을 매 숙명적으로 거치다 보니까 결국은 주어진 작업은 수많은 예술활동에 대한 작업영역을 두고 활동을 해나아가지만 우리 생에는 늘 부던히 공부하고 자기 마음 수련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이해에 대한 깊은 울림이 온다. 결과적으론 현명하게 살 수 있는 삶의 기조를 이룰 수 있다는 데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영역의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오롯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다 그런 지점들이 와닿아가지고, 그래서 작업을 하는 거 같습니다.

제주목인 경우 석수가 여섯 명 있었다고 봐요.
자기만의 조각 수법은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게 보여요.

Q. 제주도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48기의 돌하루방의 모양과 크기가 같은가요?

전부 다 다릅니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문헌에서 얘기하는 거는 1754년에 김몽규 목사가 옹중석을 창건하였다 이거거든요. 그 외에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니까 유추해볼 수 있는 게 조선시대 때 제주목사로 다녀간 사람이 250여 명이고 당시에 교통 수단은 배잖아요.

제주도 발령받는다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니고 좌천이죠. 유배지고 변방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목사가 온다라는 것은 여기 제주 출신 사람이 아닌 거죠. 그러니까 임금의 교지를 받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로 제주 목사로 오지 않은 사람들이 되게 많았다고 합니다. 오가는 뱃길에 목숨을 두 번을 내놔야 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김몽규 목사가 어렵게 어렵게 해서 제주도에 당도했어요. 목사로서의 책임을 갖는데 여기는 아둔한 사회였던 거죠. 혼란의 상황에서 풍토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그가 공부하면서 생활했던 내륙의 상황과 섬땅의 상황이 너무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외부의 침탈도 빈번하지, 풍토병도 막 돌지. 밭작물 위주의 사회이지. 그래서 그 시대적 전후가 너무 삶이 어려워서 섬땅에 있는 사람들이 도망 나갔어요. 도망가니까 국가적으로 출국금지령이라는 제도로 묶어놨죠.

돌하르방이 창건되기 이전 시기에 큰 기근이 돌아서 되게 어려웠어요. 이 사람이 적어도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되잖아요. 이때 조선시대는 중국의 영향이 제일 크니까 읽었던 책들 중에서 옹중석의 의미를 목사가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아마도 옹중석의 의미를 헤아리면서 제주사람들에게 이렇게 애기했겠죠. 

“다들 모여보세요, 환난이나 질병을 막는 뛰어난 신, 완옹중의 석상을 세웁시다. 그러면 제주 사회가 든든해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도 든든해지고 마음이 든든해질 겁니다.”

이런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완옹중의 의미를 헤아리면서 관 주도 사업으로 제주목 성 동서남북에 세우게 되죠. 이거는 목사의 지시사항이었기 때문에 목성과 현성의 계급 간의 갈등이 일어났겠죠. 그러니까 현성은 제주목 성에서 이런 거 하라고 하니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정의현 성이나 대정현 성은 수량도 각각 12기씩 크기도 쪼꼴락 쪼꼴락하고, 지시하달형인 거죠, 반면에 제주목 성에 있는 돌하르방들은 우락부락하고 무장했다는 표현들을 하고 있거든요.
한 여섯 기 정도에선 옷이 입혀진 표현을 해요. 수문장의 옷에 따라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제주목 성 주도의 사업이었다.

그럼 대정현 성과 정의현 성은, 왜 쪼끄만 하고 생김새가 다른 이유가 뭐냐면. 정의현 성 돌하르방 같은 경우는 정면을 보지 말고 뒤로 돌아가서 보면 뒤로는 조각이 안 돼 있어요. 우리 빌레 돌 탁 걷으면 앞뒷면이 반반하잖아요. 이런 걸 갖고 조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앞뒷면에 판판한 돌을 딱 세워서 조각을 하게 되면 손을 표현하는 데 가슴선을 파고 들어가서 손을 드러낸 거예요. 목 부분도 얼굴은 이만큼 큰데 여기만 살짝 다듬은 거죠. 그러면서 면이 사각면체 잖아요. 그리고 뒤에는 조각을 안 했어요. 그러니까 귀찮았던 거지. 정의현 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판석을 갖고 조각을 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고 가장 손쉬운 조각 형태인 겁니다.

근데 대정현성은 왜 둥굴둥글하냐? 그것도 재료에 대한 한계가 있어요. 대정현 성에서 모슬포 방향으로 이렇게 나가다보면 몇몇 집 일부는 경계 울타리 담을 중간중간 큰 돌을 세워서 쌓은 담들이 보여요. 우리가 판석도 있지만 조금 더 두께를 주는 절개지나 함몰된 지역을 보면 육각의 절리가 형성돼서 나오는 돌들이 나와 있어요. 이게 재료가 됐던 겁니다. 그러니까 육각의 면을 갖고 있으니까 그냥 있는 상태에서 슬쩍슬쩍 면을 둥글려 버린 거죠. 그러니까 곡선이 그대로 살아났던 거지. 그러니까 재료에 대한 한계는 그 지역에 산재한 돌들을 어떤 돌을 선정해서 썼느냐가 표현의 확정물이 돼버린 거죠.

반면에 제주목 성의 돌하르방은 관(官) 주도 사업이잖아요. 관 주도 사업이니까. 제주 목 성에서 가장 큰 돌을 볼 수 있는 데가 어디라고 생각해요? 해안 절개지. 그런 데는 절리대에 용암이 흐르면서 육각이 절리 형태로 쭉쭉 긴 치아 이빨처럼 형성되어 있잖아요. 그런 돌을 갖고 위엄성을 보여야 하니까 가장 큰 원석을 고르고 그 크기를 그대로 살려서 조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균등미가 없는 겁니다.

그 안에서 손도 찾고 얼굴도 찾고 모자도 찾으면서 조각을 그대로 순응해서 조각을 하게 된 거죠. 그게 제주목 성의 돌하르방들이고 그리고 내가 본 작업의 영역으로는 지금 일련의 이렇게 하는 애기들을 언젠가 좀 시간이 나면, 이게 논문이나 학술지에 나와 있는 자료가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체득한 거라서.

그래도 이 같은 경험을 해봤으니, “이런 것도 있는 거 같습니다”라고 해서 책을 하나 내려고 합니다. 그럼 누군가는 그런 이유에 대해서 들여다 볼 수 있겠죠.

제주목 성 같은 경우는 내가 살펴본 느낌은 석수가 여섯 명이었어요. 자기만의 조각 수법은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6명이 했어요. 그게 보여요. 여섯명들 각자가 자기만의 표현법이 있으니까. 그 흐름이 제주 목 성에서는 많게는 일곱 사람, 적게는 여섯 사람. 그 여섯 사람을 보는데 그에 따른 표현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여섯 사람이 주도해서 정제했고 나머지 보조 인력이 있었던 거고, 그렇다고 봐야 되는 거지.

돌담 쌓을 때도 그 재료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데.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작업한 후에 만나면 내가 그 영역에서 공부된 걸 직접적으로 느끼니까 미학적 고찰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다. 그래도 지역을 얘기하고 있으면 지역 문화도 들여다봐야 된다, 그리고 사색을 많이 해야 된다, 생각하는 힘이 결국 작가의 힘인 것 같다, 이런 얘기를 진짜 많이 하거든요.

일감을 준 그쪽에다가 스케치 자료로 협의하고
그쪽에서 좋습니다라고 결정이 났을 때 작업으로 옮기죠.

Q. 돌하르방 작품이 똑같은 작품이 없는 이유가 있나요?

그에 대한 헤아림은 조각으로 들어왔을 때 어설프게 접근하는 게 아니라 온 마음 다해서 이제 진지한 고찰을 통하면서 작업을 해나갑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작업들은 이 미술관에 작업이 끝나면 설치하고 전시가 되는데 외부에 대한 작업들은 그런 거 같아요.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미술이라는 도구를 갖고 사회적으로 시대성을 담아서 최대한 소통할 수 있는 영역을 기조로 그걸 바탕으로 관계를 풀어가는 거 같아요. 그래서 외부작업 의뢰가 들어왔을 때는 그쪽 기관이든 개인이 되든 결과적으로 그쪽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뭘까를 먼저 고민을 해봅니다. 그리고 스케치를 통해서 일감을 준 그쪽에다가 스케치 자료를 협의 드리고, 그리고 그쪽에서, “좋습니다!”라고 결정이 났을 때 작업으로 옮기죠.

결과적으로 작업이 다 끝나고 설치가 돼서 향후에 과정들을 보면 미술이라는 도구가 고급 예술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영역에서 풀어주는 것들은 또 다른 큰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외부와의 작업 관계들은 주로 무거움을 두고 가는 작업들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성에서 보편타당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주제에 이런 감정선을 위주로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제주에서도 지역마다 돌의 특성이라든지 특히 조각하기에 좋은 돌이 따로 있나요?

그것은 제주에 산재하는 돌의 한계성에서 예전에 선인들은 어찌 됐든 제주의 자원을 이용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그래서 필요한 민구류를 만들고 그 민구류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런 거 같습니다. 제주에 이제 산재한 돌돌 중에 말 그대로 집을 짓고, 구들장 돌을 놓기 위한 일종의 편마암 돌들이 나는 지역에서는 그거를 계속 캐서 구들장을 놓고. 반면에 누군가가 이제 통과의례로 죽고 나서 분묘를 만들고 비석을 쓰기 위해서는 무른 조면암질을 찾는데 산방산이나 하효 돌을 주로 썼죠. 그러고 나서 조각 용도로 보나 연자맷돌을 봤을 때는 이제 어찌됐든 석집이나 곰보가 치밀한 돌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지하층에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육상부에 노출된 돌을 갖고 연자맷돌을 만들어 냈고.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주로 이런 과정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제주도의 돌의 생김새, 쓰임새는 한시적으로 극히 제한되지만 지배적으로 근 90%는 다공 현무암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공 현무암을 쓰는데 석질에 대한 차이는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결국은 화산섬 토양 안에서 두 가지 용암의 대표적 특성이 지배적으로 우리가 필요한 돌로 활용할 때 썼습니다. 결과적으론 거친 돌, 산돌이라고 애기하는 아아용암 특성의 돌은 주로 밭담 용도로 쓰임새가 좋았던 거 같고, 반면에 파호이호이용암의 종류들은  점성이 낮아서 묽게 흘러가면서 만들어진 넓고 편편한 돌들 갖고서는 도구리와 같은 도구를 만들기가 수월했다 보여집니다. 조각의 강도를 부드럽게 써야 할 때는 아아용암보다 파호이호이용암의 돌을 썼습니다. 주로 그런 돌들이 좀 더 부드럽고 조각할 때는 센 돌보다는 부드러움을 갖고 있는 돌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동체 정신이 워낙 탄탄하게 잘 녹아있는
이 제주정신이 관광과 함께 무너졌어

Q. 저희 동네 용천수 주변에 돌담을 1934년에 쌓았는데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 들어서 같이 일하고, 돌 벌르는 석공은 이웃 동네에서 초빙해 왔는데 하루하루 각 집마다 당번을 정해서 석공을 먹이고 재우면서 했다고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이거를 우리 문화의 권역으로 봤을 때 과거에 생존을 이어갔던 선인들의 삶속에는 자급자족의 시스템이야. 공산품 문화가 발달이 안돼있고 변방 지역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민속촌이나 옛날 집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초가집을 중심으로 감낭(감나무)이 심겨져 있고 족대(이대, 수리대)가 심겨지고, 신사라(신서란, 뉴질랜드 원산 식물, 초공예의 재료)가 있고 조달해야 하는 긴밀한 재료들이 심어져 있었다고.

왜 그러냐면 어디 가서 사오고 이런 게 아니라 필요한 걸 만들어서 썼다는 거야. 집을 짓는다, 마을 공동체 안에 이제 뭐 용천수를 만든다, 연자매를 만든다, 이런 것들은 한 사람의 힘으로 안되니까 품앗이와 수눌음 정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어려운 환경에서의 삶이란건 협력 없이는 안 된다는 거지.

그런데 이 공동체 정신이 워낙 탄탄하게 잘 녹아있는 이 제주정신이 관광과 함께 무너졌어. 관광이 되면서 기회의 땅이 되고 많은 대규모 자본이 노렸던 게 국유지와 마을공동목장이었던 거지. 그럼 그 공동목장에 따른 이해관계가 지역민의 이해관계로 갈라졌던 거야. 그리고 정부의 국책사업으로 해군기지 이해관계가 다 갈렸던 거야. 그래서 공동체가 다 깨져 버린거야.

그래서 우리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생각했을 때 결과적으로는 공동체 정신이 되게 중요한 거거든. 정신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럼 공동체 정신을 어떻게 꺼낼 거냐? 회복할 수 있는 게 있어. 그 영역이라는 건 우리가 돌하르방을 만드는 작업 이야기를 꺼내듯이, 나는 행정에서 늘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게 마을을 들여다 봐가지고 건강한 정신이 녹아 있는 공회당, 마을쉼터, 마을의 공동 자산으로 보여져있는 외부 소통공간에 대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된다고 봐요. 

근데 적극적인 지원이 돈으로만 지원해주고 끝나야 된다고 생각해. 그걸 마을에서 수눌음으로 할 사람 다 모여 들어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래야 그게 빛나는 거지 업자들 해서 발주시켜서 형식을 가져가는 건 껍데기인거야. 마음도 안가 그거는. 

난 그래서 늘 그 부분을 고민하는 거야. 그거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가 함덕 대돌쉼팡 작업 한번 해봤잖아. 서툴러도 지역의 정서와 감정이 들어가야 만이 그게 마을 것이 되는 거야. 행정에서는 그 고민을 해야 된다는 거지.

서투름은 제주에 미학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요소거든.
제주 돌담 기가 막혀. 서툴기 때문에

행정에서는 안하지. 사례가 없고 귀찮고 이거 어떻게 정산하나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거 뭐 어려운 부분들을 서로 이렇게 머리 맞대서 찾아내면 분명히 방법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안되는 거지. 그래서 마을 안에 용천수든 뭐든 복원한다는 건 문화재 자격 기사가 하는 게 아니야. 문화재 자격 기사가 하는 거는 다 잘못된 오류야.

왜? 마을에서 공동으로 했던 작업은 비전문가가 했기 때문에 서툴러, 서투름은 제주에 미학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요소거든. 제주 돌담 기가 막혀. 서툴기 때문에 그래 서툴기 때문에 세련되게 쌓는 게 아니라 있는 거 편하게 편하게 얹어져서 그 시간의 흐름과 같이 빛나기 때문에 보기가 편한 거지.

근데 우리가 조각이나 예술품 볼 때 되게 위대하다 하는 것들은 괜히 경직돼 마음이 불편해 어렵다고. 근데 편하고 편한 것들은 그런 마음이 없는 거야. 편하게 받아들여지고 자기도 모르게 느끼기 시작하는 거거든. 그래서 그게 좋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좋은 감정과 좋은 본질을 담고 있다면 실행하고 복원하는 과정도 그렇기 풀어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보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야. 진짜.

연대(煙臺) 복원은 문화재 기술자들이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지역민들 할 사람들이 할 수 있게끔 그 뭐 자금 지원만 해주고 그렇게 해줘야 돼. 그게 맞는 제대로 된 복원의 의미를 둘 수 있는 거지

아, 그래서 뭐 지나다니다가 복원된 명월진성이나 연대 같은 것들을 보면 우리 제주게 아니야. 잃어버리면 정신적 근간이 흔들려버리는 건데. 행정에서는 어렵다어렵다 하는데 어려우면 서로 조건을 맞춰서 찾아내면 될 거 아니야. 당연히 행정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야? 행정에 있는 사람들은 공무원들은 뭐든지 봉사하는 봉사자의 정신을 갖고 있어야 돼.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우리 사회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공무원들은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을 하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은 마을에 넘겨줘서 마을의 힘으로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래야 이제 병들었던 공동체 정신들도 회복되어 돌아오고 우리 삶은 형편껏 일했지만 선조들의 삶에서는 이렇게 협력하는 삶에서 단단하게 마음 관계 설정이 되어 있고 이렇게 풀어야 된다고 생각해.

방향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이 돼야 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지. 나는 우리 미술관에 도움 되는 거 필요 없고 제주를 생각했을 때 제주인 한 사람으로 제주 미래를 생각했을 때는 건강한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는 소통의 지점들이 필요하다. 그거 없이 안 되는 거잖아.

삶의 이치는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할 수 있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Q. 작업하면서 어떤 점이 어려우셨나요?

작업에서 장르별 건축이 되든, 조각이 되든, 회화가 되든 각각의 영역에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완성된 결과물이 전해주고 채워주는 감정선이 있긴 합니다. 아까도 전제로 만년에 대한 영원성이 가장 큰 돌 작업에 매력이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모르겠습니다. 회화도 하고 건축 작업도 하고 이러지만 여하튼 돌에 대한 물성은 영원성을 갖고 있다. 그게 늘 숙명처럼 와 닿아서 적어도 작업에 임할 때는 내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라는 그런 기준들을 세워놓은 이유가 세상의 삶의 이치는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를 연연하지 않는 초월할 수 있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결국은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는 늘 최선을 다해야 된다. 그 최선이라는 건 작가의 양심이 올곧게 그대로 가서 꽂히고 그 결과로서 매듭이 지어져야 된다라는 전제들이 늘 숙명처럼 왔던 기고 그런 과정들이 계속 채워질 때마다 결국은 우리가 사회적 가치에서 물질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게 삶에서 절대적 기준 우위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삶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살아왔다. 이런 거 같아요.

결국은 저에게 숙명처럼 생명이 왔고 주어진 나의 창작자로서의 작업 과정에서 내 양심에 반하지 않고 충실히 가려고 하는 여정을 지킨 나의 삶이라는 거는 늘 채워지는 나의 마음 안에는 당당함이 있다. 결국은 이런 마음이 채워져야 잘 살고 있다라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매 작업마다 확인하고 올라오는 감정들이죠. 그래서 편한 과정을 취하는 게 아니라 매 과정이 일종의 구도자의 여정처럼 하나씩 하나씩 받아들이고 풀어가고 과정을 끝내는 이런 과정은 되게 성스럽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Q. 돌하르방 작업이나 지금의 예술작품을 하시는데 영향을 주신 분이 있나요?

영향이라는 건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왕도가 없다. 근데 ‘현자의 삶’은 있다. 현자의 삶이라는 건 배우고 익힌 삶을 의미하는 건데 제 스스로 부족함을 늘 경계를 해요. 그리고 부족함이 보이면 그걸 채우려고 공부하고 그리고 과정을 거쳐 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거 같아요. 천만다행처럼 생각하는 제 회화의 장르에서는 내 작업 영역은 고집하면서 나의 모습으로 회화영역을 구축했다면, 조각이라는 장르 안에서는 대중과의 호흡 관계를 훨씬 더 생각했기 때문에 사회 현상이라든가 많은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헤아림, 이것 또한 공부로써 채워졌던 거 같아요.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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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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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우리가 조각을 통해서 만나는 작업 영역의 끝은 결과적으론 헤아리는 이 공부가 되게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작가의 우월성 위주로 기술적 테크닉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라는 게 경계 지점들이고, 그러다 보니까 저는 생긴 것도 이렇고, 말 수도 많지 않고, 이래서 되게 관계가 형성이 안 될 땐 되게 불편한 사람 중 한 사람인데 의외로 제가 부족한 부분은 되게 오픈된 마음으로 열어놓고 헤아리면서 그런 걸 채워 나아가죠.

작업이라는 건 심상적 반영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래서 생긴 건 이러지만 마음에 대한 울타리는 두고 있지 않다. 그래서 늘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고 필요한 건 공부하려는 자세는 늘 갖고 있습니다.

돌하르방 창건 과정에도
축제의 본질은 녹아있다는 거예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일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작업 안에서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이제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제 동일한 작업 여정을 거쳐보니까 ‘이건 아주 큰 콘텐츠가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지점이 어디냐면, 결국은 현존하는 돌하르방을 창건할 때는 당시에 이제 불안한 마음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웠다라는 측면이 이제 강하게 흘러서 결과적으로는 수호신적 의미를 두고 우리가 애기를 하는데, 그런 거 같아요. 당시 시대 상황과 돌하르방이 창건되는 과정을 적은 기록은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추해서 동일한 작업을 거쳐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드는 생각들이 있어요.

적어도 문헌에서의 기준으로 동시대에 48기 돌하르방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다라고 전제를 하고 보면 지배적으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그게 첫째 드는 생각이고, 왜 그런가하면 수호신적 의미를 헤아린다라는 거는 원래 제주의 현존한 가장 큰 돌 원석을 기준으로 선정을 하고 그곳에서 조각을 거치고 성안까지 끌고 들어와서 세우는 작업은 1기도 아니고 동시대에 48기가 이루어졌다면 그건 대단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애기죠. 그리고 그 과정 안에는 우리가 또 다르게 주목해야 될 지점이 있는데, 물론 관 주도 사업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골고루 좋은 감정의 혜택이 있었다.

돌하르방이 창건돼서 동서남문에 문지기 역할 기능으로서 세워졌을 때 늘 불안했던 마음들이 돌하르방이 세워짐으로 인해서 와 담는,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마음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거는 관에 있는 사람도 그랬을 것이고 당시 고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고.

제주도 형성사 이래 돌하르방 창건하는 작업이
가장 큰 국책 사업이었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그건 무엇이냐. 우리가 지금 와서 수많은 축제들이 벌어지는데 이게 행정적으로 좋다는 것을 받아들이다 보니까 a, b, c, d의 축제에서 성격들이 비슷비슷해져 버린다는 거죠. 좋은 건 받아들이는 게 지금 시대에 흐름이니까. 근데 우리가 축제라고 하는 부분들은 결과적으로 축제의 본질은 흩어져 있던 마음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본질인건데 그러면 돌하르방 창건하는 과정에도 축제의 본질이 녹아있다는 거예요.

나도 좋고, 행정에 있는 사람들도 좋고, 그리고 흩어져 있던 사람들의 많은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과정에서 말씀드리자면 제주도 형성사 이래 저 개인적으로는 돌하르방 창건하는 작업이 가장 큰 국책 사업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과연 제주도 형성사 이래 이만큼 많은 인력과 협조와 이루어져서 이렇게 돌하르방이 만들어지는 작업이 있었나? 있다면은 우마와 관련해서 상잣, 중잣, 하잣 그 다음에 10개의 소장을 나누는 이런 것들이 좀 큰 사업들일 건데. 그거 못지않았다.

어쨌든 되게 와 닿는 감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돌하르방을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이거는 사회적 시선에서는 어찌됐든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름의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름이라는 건 고루함을 갖고 있는 게 와 닿는 이미지의 흐름이다. 그래서 돌하르방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고루함과 정직성 이 두 가지인거 같아요.

그러면 이런 것들을 개선하고 바로 잡아가야 된다는 건 오롯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축제로 끌어가보면 어떨까? 그게 제 개인적으로 갖는 희망인데 그래서 지역의 축제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가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꼭 돌하르방이 그 당시에 세워져 있지만 우리가 또 다른 새로운 이 시대의 돌하르방을 만들면서 일련의 만드는 과정이 멀리서 돌을 선정하고 석수들이 조각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끌고 필요한 곳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세우고. 그거를 기리는 잔치가 벌어졌을 때 돌하르방이 갖고 있는 이런 오해적 편견의 시선을 올곧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행정에서 관심 갖고 가치를 안다면, 그리고 제가 하는 얘기에 대해서 공감한다면 축제의 본질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하는 자리는 기록으로 남겨질 내용들이라 돌하르방에 대한 이미지들은 축제의 본질을 끌고 가는 데는 원래 과정이 그런 축제의 본질이 녹아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콘텐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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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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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도구로 감정을 꺼낸 거에요.
톨하르방 조각의 영역도 그렇게 표현한다면 재미있겠지요.

Q. 돌하르방을 만들어 세우는 행위 자체를 축제화 하는 거네요?

한라문화제 이런 축제들은 주로 문화의 민속적인 영역을 재현하고 적립하는 영역에서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고 보면 우리는 돌하르방에 대해서는 드러난 지금 현상에 설과들만 보고 사진 찍는 하나의 대상물로서만 인식을 할 뿐이지, 돌하르방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인식은 편한 존재감은 아닌 거예요. 단지 지역 풍토의 대표성을 갖고 있고 경직되어 있다. 그리고 이름에서 주는 고루함이 있다.

이런 사회적 시선을 개선한다는 것은, 돌하르방을 들여다볼 때 본질이라는 부분은 당시 왜 만들었을까? 그게 본질인건데, 당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우리의 불안한 그 마음을 위로받고자 세웠던 것이 돌하르방을 창건한 본질적인 이유인데, 그 이유도 새롭게 이런 축제의 일환으로 가져갔을 맨 다 정립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참여형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새로운 제주의 아젠다를 만들어서 그 주제 형식에 맞게끔 새로운 표현도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전통에 회귀하는 게 아니라 전통과정 안에서 잘 묻어나 있는 부분들을 지금 시대성으로 수용을 해서 축제로 담아낼 수가 있다는 게 제 생각인 거죠

Q. 조각이 전문 예술분야라고 생각되는데 일반인들도 축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 조각의 영역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학적인 가치가 잘 채워진 뛰어난 예술품의 영역도 있지만 원래 미술이라는 도구는 출발점이 개별성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a,b,c,d가 다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대상에 대한 표현을 해도 표현되는 영역에 대한 감정선이 다 다르다는 거죠.

우리가 예술이란 도구를 쓸 때는 개벌성은 늘 잊어버려요. 우위를 논하는 영역에서 봐버렸기 때문에 이게 불편한 건데. 그러니까 예술이란 도구로 감정을 꺼내는 거예요. 돌하르방을 조각하는 영역도 그렇게 표현을 한다면 재밌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누구나 자기 심상적 표현에 대한 것들은 한 번에 덜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돌은 조금씩 조금씩 깎아야만이, 그리고 많은 시간이 채워져야 만이 형태성을 갖는 가장 오래되고 정직한 미술의 조각도구인 거죠.

가장 오래됐으니까. 구석기 문화가 제일 오래 됐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현존하는 것도 구석기 문화가 제일 많고, 결과적으로 우리 인류와 출발한 건 불을 만나고 구석기 문화가 지금까지 지속되면서 원류에 대한 느낌을 가장 잘 갖고 있는 게 석조각의 의미라고 봐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에 따른 표현들을 풀어내는 형식은 되게 다양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굳이 큰 것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작은 걸로도 할 수가 있는 거고.

그 문제는 제주 사회의 아젠다, 주제를 무엇으로 할 건가. 보편타당적으로 같이 할 수 있는 이야기구조라면 지금 시대 조류를 봤을 때 사상을 재조명하고 보상 조치가 되고. 이런 논의가 있다면 4.3도 해봅시다. 4.3에 대한 이미지를 조각의 형태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가 있다는 거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하죠. 옛것에서 새로움을 배우는 정신인건데 말 그대로 전통 영역들은 거의 본존교육이에요. 근데 거기서 끝나지 말고 보존교육과 지금 시대성을 수반해서 새로움을 만든다. 이게 저는 문화라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문화라는 건 당시에는 사람들의 삶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 삶을 들여다봤을 때 우리가 오늘날 시선에서 문화라고 얘기하는 거거든요.

문화는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적 지표를 갖고 문화적 영역에서 작업을 한다라는 건 아마도 이런 결들이 다가서서 채우고 새로운 작업의 흐름으로 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다공 현무암이 주는 매력은 구멍이 주는 결들이 있어서
조각을 하면서도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Q.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제주도 돌하르방만의 지닌 돌조각의 매력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재료가 주는 영역이 제일 큰 것 같아요. 재료 영역은 돌이고 근데 제주에 산재한 다공 현무암이라는 거죠. 다공성을 갖고 있다는 건 애초에 내 의지대로 섬세한 표현을 할 수가 없는 재료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표현주의적 미술의 장르에서는 심상적인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비율이나 비례감들이 다 무시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구체화된 형상성을 띠는 쪽으로 조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돌하르방이 그렇고 동자석이 그렇고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제주의 석상 문화의 조각 기법은 거의 다 표현주의적 방법을 취하거든요.

제주의 다공현무암이라는 건 이 화산섬 토양 안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 화산석. 이 다공 현무암을 쓴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작업할 때 가끔씩 드는 생각이 뭐냐면 화가로서 하얀 여백의 화지와 누런 종이의 화지를 주고 각각 드로잉을 해보라 말하면 하안색이 되게 어려워요. 근데 누런 화지는 그래도 채도가 좀 깔려 있어서 드로잉 선이 나가는 게 편하죠. 그러듯이 화강암과 현무암을 놓고 조각을 하라 할 때 이런 비유가 적절할 거 같아요.

다공 현무암이 주는 매력은 구명이 주는 결들이 있어서 조각을 하면서도 흐름을 이해하고 흐름에 결을 따라갔을 때 조각도 편해지고 불편하지 않은 조각의 완성도가 나오는 거 같아요.

흐름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다공 현무암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근데 내륙에 있는 화강암은 얼마든지 필요한 크기의 들을 채집하고 자기가 다룰 수 있는 작업의 스케일을 크게 가져갈 수 있는데 다공 현무암이 갖고 있는 재료의 한계가 구멍을 갖고 있고 애초에 용암이 지표면을 나와서 식어가면서 균열이 일면서 수축성이 생기다 보니 큰 돌은 만나기 어렵고 결과적으론 돌을 헤아리면서 순응하는 조각을 할 수 밖에 없는 매력이 있어요. 그런 매력들이 결과적으론 반짝거리는 힘을 주진 않는데 오래 봐도 지겹지 않은 매력을 준다는 게 조각자로서 느끼는 감정이거든요.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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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지 않다라는 거는 봐도 봐도 흥미가 있다. 그리고 다공 현무암에 대한 또 하나의 매력은 원석을 조각하다 보면 생채기가 나고 회색조로 변하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10년이면 원래 자연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있던 것처럼 느낌을 준다. 모든 게 다 편한 거예요. 질서적 흐름의 조각하는 방법이 그렇고, 완성되었을 때 흐름 또한 이제 자연의 결과 너무나 잘 닿아 있다. 그래서 제주의 다공 현무암에 대한 매력은 그래서 이제 이런 복합적인 감정선들이 지겹지 않은 매력을 줘서 결과적으로 우리 곁에서 두고두고 볼 수 있는 매력을 주지 않나 싶습니다.

돌하르방 공원에서 주제영역으로 우리가 늘 고민하면서
큰 토대가 뭐냐면 평화라는 화두였어요

Q. 돌을 조각하여 공원을 만드는 일이 어려웠을 듯한데요?

거칠고 단단한 돌을 조각하고 자연환경을 존중하면서 공원을 조성하는 것들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하르방 미술관에서 주제영역으로 우리가 늘 고민하면서 큰 토대가 뭐냐면 평화라는 화두였어요. 그게 당시에 돌하르방을 창건하게 된 이유도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고 평화에 이르고 싶어서 만들어진 거거든요. 결과적으로 그래서 만든 거야.

우리 시대의 삶도 지구촌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도 왜 수많은 이런 불협화음이 생기느냐라고 보면 존중을 못해서 그래요. 종교 간 존중을 못하니까 맨날 분란에 휩싸여서 우월과 우위를 논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는 거잖아요. 결과적으로 평화의 첫 걸음은 존중에서 시작한다는 겁니다.

‘존중한다는 건 뭘까?’라고 보면 내가 이 돌하르방의 배경이 되는 상곶을 구해서 이 상곶을 정리해나갈 때 늘 자연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각되어서 숲에 전시물을 세울 때 포크인 장비길을 안 열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옛날 예전에 고인돌 끌듯이 사람들을 사가지고 나무 깔고 돌하르방 끌고 들어간 거죠. 예전에 돌하르방도 밖에서 조각하고 성까지 끌고 들어왔을 거 아닙니까. 들지는 못했을 거고. 그러니까 일련의 과정과정을 겪으니까 몸으로 체득이 되니까.

/ 사진=조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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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게 동시대에 48기가 창건이 됐다면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다른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당시에 인구 수는 3만5천에서 5만 명으로 보더라고. 그러면은 성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경제활동 인구, 이렇게 보면 적어도 2만 5천명으로 봐야할 거 아닌가? 절반으로 치자. 2만 5천명 중에 대정현도 있고 정의현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 분포 됐을거라 봤을 때 성안에 있는 사람이 한 만 명이라고 치자.

대다수의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협력 없이는 이게 이루어지기 힘들었다고 전제가 돼버렸던 거죠. 한두 사람이 끄는 게 아니잖아요.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물론 여러 날에 걸쳐서 이거 계속해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원해주는 사람도 있을 거고 감독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성까지 끌고 들어와야 되는 것도 있고 좌대 파묻어야 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아, 이게 과정에는 동일한 마음이 내재가 되어 있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기꺼이 사람들은 그 힘든 여정을 선택해서 같이 할 수 있었구나라고 판단했던 거죠. 그러니까 이게 축제였던 거야.

Q. 돌하루방 공원을 북촌마을에 만든 이유가 있나요?

내가 미술관을 만들면서도 이 미술관을 만드는 근원적인 힘은 인문학 답사를 통해서 제주 문화의 본질을 봤기 때문에 수용을 해서 제주다운 색의 제주 문화의 트렌드는 이쪽이 되어야 됩니다라고 대안적 제시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여기 흐름을 손수 작업을 고집했던 거고. 그래서 제주문화예술에 대한 지표는 이쪽이어야 될 것 같습니다고 해서 시범적 사례로서 만든 거예요. 

답사를 다니면서 돌하르방에 꽂히고 나서 제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하르방 얼굴을 꺼내서 알려야겠다라는 마음으로 접근을 했을 때 들었던 생각이 돌하르방이 제주의 대표성을 갖는 하나의 큰 힘을 갖고 있어서 돌하르방이 들어가는 배경은 제주의 건강한 자연이라야 된다는 것이 원칙이 있었죠.

원칙성이라는 것은 제주에 많은 자연 자원들이 있지만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산림자원, 그러니까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자연적으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자연자원, 그곳을 우리가 상곶이라고 애기하는데 겨울에는 우마를 내려서 낮은데서 추위를 피하고, 다시 날씨가 풀리면 올려 보내고, 땔감도 수시로 나르고 집 짓는 건축 자재도 필요에 따라서 준비하고, 이런 것들이 지금 이 북촌 지역에 산재한 잡목림지대가 마을하고 굉장히 가까이 있는 산림자원지예요.

여기를 ‘상곶’이라고 칭할 수 있는 곳인데, 그래서 일부러 이제 이런 땅을 찾아서 1년 가까이 제주 전역에 땅을 보다가 상곶의 형태가 잘 남아 있어서 돌하르방을 조각하고 자연 자원을 그대로 정리해서 써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 땅을 구하게 된거죠.

Q. 이 공원에 오는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제가 외국어는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는데 감정으로 느껴지는 영역은 그런 거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되게 근본주의자라서 어떤 일들을 들여다볼 때는 항상 근원부터 보는 게 이제 습관화돼 있는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주 섬땅에 여행의 과정에서 본질은 뭐냐라고 물어보면 우리가 여행을 들여다볼 때는 자기 삶을 떠나서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 과정을 성찰하면서 비울 것 비우고 채울 건 채우면서 다른이의 삶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그게 여행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외국인들이나 선진사회 사람들은 시민 사회의 성숙함들은 있죠. 그들의 공통된 그런 감정선에서 제주 섬땅에 와서 돌하르방을 만나는 거는 존중한다는 의미가 전제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주로 살고 있는 터에서 보지 못했던 환경적 문화적 요인들을 보면서 많은 느낌들을 얻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외국인의 반응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제주 여행을 생각하고 여행의 관광 지속력을 본다면 그래서 제가 이제 2번, 3번, 4번 강조하고 강조하는 이유가 우리 정체성이란 거. 그리고 정체성예 대한 것들은 자연 자원 안에서 보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트렌드라는 거는 이게 과거에 답습해서 끝나서는 안 된다. 다시 우리 생애 와서 우리 시대성과 맞물려서 새롭게 문화의 트렌드가 구축되고 가야 된다 이게 제 생각의 기조예요.

그러면 넓은 의미로 보면 언젠가부터 우리 케이팝이 세계화됐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것만 고집할 것이 아니거든요. 케이팝의 이미지를 보면 제가 가끔씩 음악을 듣다 보면 세계 곳곳에 음률이 묻어나 있어요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우리 것만 강조를 해서 우리 것만 보라는 게 아니라, 보편화된 트렌드에 굽이굽이 갖춰주는 음률에 따른 리듬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인이 충족이 되고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거죠.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그건 앞선 애기긴 하지만 우리가 제주도로 생각했을 때는 어찌 됐든 많은 것들이 국가 지정, 세계 지정해서 보존의 가치들은 잘 정비되고 있는데 문화라는 트렌드는 학계에서나 행정에서나 대다수 시민사회에서나 막연하게 생각하는 게 이게 제가 드는 개인적인 아쉬움인 거예요. 우리가 4.3을 겪고 나서 이제 전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 20년차 이상의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 사람들의 애기를 들어보면 미래를 새롭게 해 나갈 수 있는 구조의 시장은 열어놓을 수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자문기구에 대한 협의체, 말 그대로 제주도에 많은 예술계 단체들이 있지만 전문직인 생활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구들을 만들어 내면 충분히 앞으로의 시간들을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로 채우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제주관광의 축의 본질은
제주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Q.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 있을까요?

지금 시대에는 인플레이션이나 고금리, 국제사회의 전쟁으로 인한 유가 파동 이런 것들로 혼란스러움이 되게 많이 있어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지금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날 때 타개하는 방법은 말 그대로 전문성을 갖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죠. 그 역할을 하는 건 이제 소통의 지점을 찾아서 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걸러내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 나가는 것. 결과적으로 그런 연결고리만 잘해두어도 향후 50년, 100년은 이상 없이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이제 모든 정책 주도는 행정인 행정에서 갖는 한계는 늘 해왔던 형식에서 되풀이하고 그 다음에 계량화 되어버리고. 그 한계성이 늘 있는 거라서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외부와 깊이 있게, 그리고 제주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져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걸러내면 좋은 모델을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두 가지 측면 같아요. 두 가지 측면이라는 게 지금 사회적 속도는 빠르게 편하게 이게 사회의 속도이고 방항성인데. 이제 제가 드는 성각은 어차피 제주는 그래도 관광의 축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관광의 축의 본질은 제주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게 정체성에 맞닿아있는 얘기인 전데. 그러려면 앞으로 100년, 200년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제주 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런 영역이 지속력을 가질 수 있다면 결과적으론 자연자원을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스며들면서 현대사회의 산업성에 들어가는 부분들은 피할 수가 없는건데요.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절충점으로 제주의 건축물이 되든 아니면 제주 문화 원형에 필요로 하는 마을 공동체 차원이든 이런 요소들이 되게 많을 거라고 여겨지는데 그런 거를 회복하고 지원해주고 보존해주는 것들이 되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건축과정이 현대사회의 발전 속도 안에서는 되게 큰 비중을 차지해서 현재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축적 요소에는 적어도 제주돌이 자원으로서 활용이 된다면 일정 부분의 조례를 정해서 지원 체계를 마련해서 유도하는 방향이 된다면 좋을 듯 합니다. 건축물에서도 제주 현무암을 결합하면서 제주의 색을 가미할 수 있는 건축물로서 최소한의 방어적 조치가 되지 않겠냐라는 것들이 있고.

결과적으로는 시대 변화의 조류를 거부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최소한의 통로에 드나들 수 있는 소통의 지점들. 이런 것들은 행정적으로 조례를 정해서 정책적으로 유도해야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다음으로 앞전에 얘기한 우리가 문화원형 실체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답습하고 교육학술 정리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한계성을 벗어나서 원래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에서부터 찾아보면 순응하고 공감하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거든요. 그래서 그 본질부터 헤아림을 갖는 행정의 시선이 와닿는다면 제주문화의 콘텐츠들은 새롭게 정리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 행정의 시선이 없다면 자문기구를 두어서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소통의 지점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남편을 말한다]

거칠고 험한 돌 작업이 업인 사람
아내 강정임

근육이 찢어지기도 하고
돌가루가 눈에 튀어
안과를 들락거리기도 몇 번

저녁이면 어깨 죽지를
파스로 도배하면서도
계속하게 되는 돌 작업이
그냥 이 사람의 업인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던 손으로
거칠고 험한
이 일을
계속하게 되는걸 보면요.

그래도 이제는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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