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89)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베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디플롯, 2021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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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겨우살이의 생존

제주 토종 붉은 겨우살이의 삶은 참으로 치열하다. 시쳇말로 생존에 진심이다. 식물 생존의 필수조건인 광합성의 능력이 부족하여 숙주를 찾아 기생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다. 땅에 떨어지면 죽는다. 아니 멸절한다. 그러니 악착같이 숙주가 될 나무에 기대야 한다. 붉은 꽃이 둥지 모양으로 펼쳐진 것은 새의 도움을 받아 번식하기 위함이고, 단단한 참나무에 구멍을 뚫는 여린 뿌리의 견고함은 참나무의 수액을 얻어 살기 위함이다. 참나무인들 어찌 넉넉함으로 다른 것의 기생을 허여하겠는가? 몸뚱이를 부풀리며 저항한다. 하지만 끝내 겨우살이 보금자리 위쪽 마른 가지를 떨어뜨리고 만다. 

겨우살이의 씨앗은 달콤하고 끈적끈적하며 새가 집어 삼키기에 적당하다. 배설된 씨앗도 그 끈적끈적함을 유지한다. 땅에 떨어지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에 오로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길게 이어지다 바람 한 번 불면 그 끈적함으로 나무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새로운 생존이 시작된다.   

사진작가 정상기의 사진전, ‘섬의 산물, 한라산 붉은 겨우살이’(문예회관 전시실)를 관람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제주의 산물(용천수, 湧泉水)의 또 다른 면모, 아니 진면목을 세밀한 수묵화로 보여주고 있었다. 산물은 퐁퐁 솟아나는 샘물의 모습이 아니라 물의 본성을 체현하는 거대한 줄기이자 뿌리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산물은 곱상한 몸짓으로 기어 다니는 샛길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맞섬의 자세로 웅장함을 연출하는 해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었는데,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사진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사진으로 걸려 있는 붉은 겨우살이의 환영 같은 실재에 마치 용천수처럼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이야기가 어울리면서 아주 짧은 시간에 긴 여운을 얻는 기쁨까지 선사받았다.      

약육강식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적자생존’, 그리고 ‘약육강식’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방식은 이보다 더 복잡하고 교묘하며, 때로 의외이고 낯설뿐더러 은밀하여 감춰져 있다. 말인 즉, 우리는 아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뇌리를 강타하는 것이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말 그대로 약한 녀석의 고기를 강한 녀석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당나라 관리이자 학자, 시인인 한유韓愈는 ‘화상和尙 문창께 보내는 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약한 짐승의 고기를 강한 짐승이 먹는다(弱之肉,強之食).”고 비유를 통해 유가의 인의, 예악을 통한 교화 없이 부도浮屠(부처, 승려, 불탑)만으로 산다면 결국 짐승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가 말한 ‘약육강식’은 짐승들의 본성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동물 세계에선 정말로 ‘쎈 놈’만이 생존하고, 승리할까? 육식 동물로 가장 방대하고, 그만큼 세며, 심지어 동종의 공룡까지 서슴지 않고 먹어치우던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는 어쩌다 사라졌는가? 먹성 좋은 야생의 늑대는 어찌하여 점차 사리지고 그 변종인 개, 이미 야생의 습성을 잃어 강자의 면모가 수그러든 반려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짐승의 삶이 지닌 습성이 어쩌다 사람에게 전이되었나? ‘적자생존’이 끼친 해악이 크다. 

적자생존

교육의 힘이 무섭다. 적자생존하면 곧 바로 찰스 다윈이 떠오르니 말이다. 오늘 이야기할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 추천의 글을 쓴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죄를 죄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 뒤집어씌웠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도 아니다.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의 작품인데 앨프리드 윌리스의 종용으로 다윈은 ‘종의 기원’ 제5판을 출간하며 당신 이론의 토대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다윈의 죄는 거기까지다.……그는 생존투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the fittest가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양한 예를 들어 풍성하게 설명했다. 그의 후예들이 그를 좁고 단순한 틀 안에 가둔 것이다. 이 책은 그 틀을 속 시원히 걷어낸 반가운 책이다.”(4~5쪽)   

장자는 자신의 책을 쓰면서 세 가지 서술 방책, 즉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卮言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중언은 일반적으로 연장자의 말이란 뜻으로 풀이하나, 단순히 연장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고명한 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요 임금이 말씀하시길, 뭐 이런 뜻이다. 물론 공자님도 요 임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이름만 빌렸을 따름이다. 당혹스럽지만 더 황당한 것은 우리다. 다윈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게다가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그냥 그가 말했다고 하니 그렇게 확신하고,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적자’라는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 논리를 야생에 대입하면 덩치가 클수록 더 싸우려 들며 그럴수록 덤비려는 자가 적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최상의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고, 가장 매력 있는 짝을 얻을 것이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잘못된 ‘적자’의 해석이 사회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의 바탕이 되어 왔으며, 정부 무용론의 근거로, 타 인구 집단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근거로, 또 그런 평가가 야기하는 결과의 참혹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어왔다.”(19쪽)   

유색인은 열등하다는 근거 없는 인종 차별론, 인간의 유전형질 가운데 우수한 것을 선별하여 인류의 유전적 품질을 높이자는 우생학(優生學, eugenics), 여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남성우월주의,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 등등이 바로 이러한 ‘오해’ 또는 ‘의도적인 왜곡’에 의해 우리 인류사회 전체를 옭아매었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흑인을 대상으로 한 노예무역부터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아리안족의 후예인 게르만족의 세계 지배라는 환상에 빠진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아르메니아, 크로아티아, 유고, 보스니아 등지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과 인종청소, 그리고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적자생존’의 가짜 그림자가 희번덕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적자’가 되기 위해 교실에서 회사에서, 아니 우리 전체 사회와 나라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오로지 현실에 적응하고, 다수에 순응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이를 위해 악착같이 남들보다 더 좋고, 낫고, 멋있고, 우세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타인을 억압하고, 무너뜨리며, 그 위에서 서서 승리를 구가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바로 적자생존이다.” 경쟁, 투쟁, 억압, 우열, 배제, 왜곡, 차별에 열중하느라 우리는 우정, 연민, 다정, 협력, 평등, 공존, 친화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호모 사피언스가 현생 인류의 조상이 된 까닭

본서의 저자는 듀크 대학교에서 진화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과 교수로 있는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와 같은 대학 진화인류학과 연구원이자 작가, 언론인인 버네사 우즈Vanessa Woods이다. 참고로 두 사람은 부부다. 브라이언 헤어는 진화인류학과 신경과학과를 전공하면서 진화론의 관점에서 사람을 포함하여 개, 늑대, 보노보, 챔팬지 등 10여 종의 동물을 연구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현장 탐사를 마다하지 않은 탁월한 학자이자 연구자, 탐구자이며, 버네사 우즈는 그와 함께 ‘개의 천재성’을 공저한 뛰어난 작가이자 연구가, 탐구자이다. 특히 그들은 ‘개’와 ‘보노보’(콩고 강 일대 열대우림에서 사는 침팬지속에 속하는 동물로 침팬지보다 작고 온순하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적자생존’에 대한 오해를 수정하는 발상 전환의 토대를 만들었다. ‘적자’, 즉 the fittest 또는 the fitter의 함의를 바꿀 수 있는 근거를 찾았다는 뜻이다. 그의 연구는 인류의 진화 궤적을 따라가고, 심리적 또는 정신적 메커니즘의 근거를 찾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뇌의 크기, 신경세포의 밀도, 자제력(전전두엽피질의 담당함) 등을 예시하면서 인류의 먼 조상들(호모 플로레시엔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하이델베르크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유독 호모 사피엔스가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 까닭을 밝혔다. 그가 제시한 가설이 바로 프렌들리스트(Friendliest)이다. 다시 말해 다정하거나 친화적인 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이다. 

다정함이란

원서 제목은 Survival of the Friendliest 이다. 프랜들리는 말 그대로 친구처럼 친근하고 우애로우며, 서로 공감하며 적의가 없고, 상호 의지하고 동조하는 것을 말한다. 중문 역본 역시 ‘우자생존友者生存’이라고 하여 ‘친구처럼’에 방점을 찍었다. ‘다정多情’이라고 하면 고려 후기 문인이자 학자인 이조년李兆年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라는 시조가 생각나는 필자에게 역서의 제목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정함이야 말로 친근, 우애, 공감, 의지 등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다정함을 이렇게 정의한다. 

“일련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협력, 또는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행동이다.”(20쪽)

타인에 대한 배제나 도발이 아니라 우회적인 관계맺음이 협력을 낳고(또는 협력을 달성시키고) 이를 통해 한 개체가 다른 개체와 네트워킹이 가능해지면서 인류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른바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근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적으로 크게 열세인 사람이 생존하려면 서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세력을 확대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이를 위해 말이 날로 많아지고, 글자까지 생겨났으며,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고, 이후로 서로 지켜야할 예법(윤리도덕과 법률)이 만들어지고, 우두머리와 더불어 통치체제가 자리를 갖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란 바로 이러한 관계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자는 이러한 다정함, 친화력과 더불어 자제력 등이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과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른바 사람가축화 가설을 내민다. 사람가축화란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사회화 과정에서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말이다.(31쪽 주석. 랭엄 피터슨, ‘악마같은 남성’,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1998)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아질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122쪽)

그리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최초의 유전자 근거로 줄기세포 가운데 하나인 신경능선세포를 제시했다. 이는 유전학자인 랭엄과 애덤 윌킨슨이 발견한 것이라고 하는데(147쪽) 이동 능력이 있는 신경능선세포가 가축화징후와 관련된 많은 형질을 발달시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을 적게 분비하도록 한다거나 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 뇌 크기가 작아진다거나 생식주기의 빈도를 높일 수 있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책을 읽다보면 비록 가설이긴 하되 개연성이 농후하다는 느낌이 들어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든다. 이렇듯 친근하고 우호적이며, 자제력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길로 접어들었는가? 저자의 발언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탁월한 친화력과 극악무도한 잔인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168쪽)

나는 너의 친구다.

대답부터 하자면, 자기가축화를 통해 친화력이 강화된 호모 사피엔스라는 우리 종種에 새로운 공격성이 생겨났다. 그것은 개가 주인에게 보이는 충성이나 어미가 자식에게 지니는 끝없는 사랑의 이면에 자리한 것으로 자기 또는 자기 것, 좀 더 확대하면 ‘우리’(울타리 안에 있는)가 위협을 받게 될 경우 생겨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옥시토신 분비가 증가하면서 분노, 공격성, 폭력성이 생겨난다는 것인데, 자기가축화를 통한 친밀함에 따른 역반응인 셈이다. 동물군의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옥시토신은 일명 ‘사랑의 호르몬’이란 별명답게 임신과 출산에 간여하는 중요 호르몬이지만 반대로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경쟁 집단에 속한 타인을 대할 때, 특히 갈등 상황에서 발생하는 극도의 제노포비아(Genophobia, 타인 공포증, 이방인 혐오증), 심지어 인종이나 이념, 종교의 차이와 대립으로 발생하는 대량 살해인 제노사이드(Genocide, 지난 200년 동안 남극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대규모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다)가 생겨나는 것도 역설적으로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황당하지만 그럴듯한, 매우 끔찍한 역설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옥시토신’ 분비의 증가에 따른 폭력을 어찌할 것인가?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히 지닌 상대 집단에 대한 극도로 노골적인 비인간화 경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극우와 극좌가 서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본서 한 권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답변을 찾기란 난망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상호간의 투쟁이 아니라 친밀한 우정과 협력으로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홉스는 전제주의 군주를 옹호한 ‘리바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간과한 것이 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분출이 단순히 타인과의 싸움에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는 싸워서 얻는 것보다 설득, 타협, 협력, 우호관계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이든 무엇이든 간에 인간이 지닌 본연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거나 취소시킴으로써 얻는 것이란 참으로 미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냐하면 후자는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명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책 끝머리의 다음 구절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친구가 되길 바라며 함께 읽는다.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될지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기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그들은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그런 차이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299쪽)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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